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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받았던 기억

최근에 직장 선배로부터 소개팅을 받았다. 예쁘고 귀여운 사람이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장점이 정말 많다는 것이었다. 그 점이 참 좋았다. 첫만남 이후에 말도 잘 통하는 것 같았고, 상대에서도 그닥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라 두번째 만남에서 내댑다 세번째 만남을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아니오'였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10개의 일 중 9개의 일이 좋아도 단 하나의 일이, 그것도 내가 정성을 쏟은 일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기분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삶의 이유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결과론적이겠으나,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는데 거기에 며칠간의 내 삶을 투영하였던 모양이다. 그런 것이 한 방에 사라져버리니 허무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덜어내는 것..

일상記/2020 2020.05.06

총선에 즈음하여

열린민주당과 더불어민주당(또는 더불어시민당) 관련한 이야기다. 오전에 출근하면서 뉴스공장을 들었는데, 김진애 박사가 서운한 감정을 공장장에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그럴만 하다 했다. 오랫동안 김어준을 지켜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점이 이번 총선에서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열린민주당에 대하여 언급하는 걸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중 더러는 '김어준이 민주당 편만 든다'고 섭섭해하고, 더러는 '김어준이 변절했다'고 깎아내리기도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공통적으로는 자신들이 기대해왔던 '총수' 또는 '공장장'으로서의 모습과 현재 국면에서의 김어준이 내놓는 메세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 지점이다. 사람만 보는 정치. 사람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좋겠지만, 어디 그게 ..

일상記/2020 2020.04.13

LG 홈브루 체험단 가입을 위한 포스팅

살면서 체험단이라는걸 처음 신청해본다. 꼭 써봐야 할 이유가 있는 물건이 많지도 않은데다,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돈 모아서 샀지 굳이 그걸 업체로부터 제공받아 무료로 쓰기 위해 안달을 해야하는게 너무나 귀찮았기 때문이다. (업체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는 점도 싫었고.) 그런데 LG에서 홈브루 체험단을 선발한다는 이야기에는 안 흔들릴 수 없었다. 그간 내가 맥주를 위해 해왔던 모든 작업들... 그러니까 잘 구워진 맥아를 사다가 물에 넣고 끓여 맥즙을 짜고 그걸 다시 걸러서 홉을 넣고 자글자글 끓이다가 이스트를 넣고 2주를 카보이에서 발효시켰다가 다시 병입하여 2주를 기다리는 그 작업을... 단 한 대의 기계가 해준다니까. 캡슐머신처럼 넣기만 하면 끝이라니까. 이건 원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

일상記/2019 2019.11.05

더불어민주당 온라인 당원가입기

10년 만에 민주당계 정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민주노동당 입당으로 시작해서, 진보신당-사회당-노동당으로 이어지는 이 철새역사가 드디어 민주당계 정당까지 이어진 셈.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당원이 되기로 결심한 까닭은 별 것이 아니라, 참 근거없는 이야기로 자꾸만 공격을 받는 어떤 대선후보를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름 정치판에서, 그것도 까보면 깔수록 아사리판인 진보정당 영역에서의 짬이 좀 되는지라 이미 볼 건 다 봤다는 근거없는 자신감 같은게 있었는데, 요새 상황은 그야말로 미증유의 개판이다. 오로지 한 후보의 낙선을 내건 사람들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게 어디 보기 쉬운 일일지. 각설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온라인 당원가입서 - 더민주에서 온라인 당원가입서를 내놓으면서 '정당 ..

일상記/2017 2017.04.06

'Equity for The Booth' 참가기

더 부쓰를 가기 시작한건 2013년부터다. 블로그에 올린 방문기의 일자가 2013년인걸 보니 확실히 그렇다. 당시 더 부쓰는 경리단에서 자라는 크래프트 비어의 새싹이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당시에는 바로 옆의 맥파이의 후발주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니엘 튜더를 언급한 것으로 마케팅 포인트가 잡혔지만, 그때는 그다지 맥파이와는 차별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더 부쓰를 다시 만난건 2014년 삼성에서 인턴을 하던 때였다. 원래 하나 밖에 없었던 더 부쓰의 펍이 서초의 삼성타운 인근에 열려 있던걸 보고 무척이나 기뻤던 기억이 난다. 취직을 하느라 그렇게 2년이 더 지났고, 어느새 더 부쓰의 펍이 신논현역 인근에도 하나 더 생기더니 판교에는 브루어리까지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르는 새에 공모도 해서 소..

일상記/2017 2017.02.08

여전히 방황중

작년 중순에서 말까지, 엄청나게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 회사 가기가 끔찍하게 싫었고, 누구도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정말 유치하기가 짝이 없다. 고작 내 편이 없는 것 같다는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했으니까. 하긴 꼭 그 '편'이라는게 사람이라는 법은 없다. 나는 내 마음을 어딘가에 두고 싶었다. 미치도록 지루하게 떠다녀야 하는 상황이 싫었고, 어딘가에 안정적으로 두 발을 디딘 채 서고 싶었다. 연말에는 그럴 일이 좀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줄 알았다. 물론 그건 착각이다. 여전히 멍청하게도, 나는 회사가 나에게 무엇을 많이 해줄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우스꽝스러운 인용이지만, 이 시점에 곱씹어 볼만한 인용이 있다. 바로 케네디의..

일상記/2017 2017.01.28

흐르는 시간, 달라지길 바라며

어느덧 2017년입니다. 직전 글을 쓴 게 12월 말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중순이네요. 요즘은 대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업무에 변동이 있어서 정신이 좀 없기도 하고, 그간 신경쓰지 않았던 일에 관심도 가져보려고 하니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일일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하루 종일 뭘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보면 벌써 내일 출근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잊혀질 것은 잊혀지고 또다시 새로운 어떤 것은 찾아옵니다. 가버린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오는 것에도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L은 이런 저더러 '그렇게 흙바닥에서 구르는 것 같아도 레벨업은 꾸준히 하고 있다는 거지'라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

일상記/2017 2017.01.11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너에게

글이라는 것, 감정을 짜내어 기호로 표현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잉여 감정이 없을 때에는 그럴 법한 문장이 나오질 않는다. 어느 때고 보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일 때에는 기호수용자의 어떠한 선을 침범하여 넘어가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글의 방향은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문장에 힘이 실리고, 문단이 가지런해진다. 말을 좇는 데에 들어가는 주의력은 글을 좇는 데에 들어가는 그것보다 가볍다. 말은 분위기를 타지만, 글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글의 수용력은 그것을 만지는 사람의 능력에 철저하게 좌우된다. 기호수용자들에게, 글을 쓰는 사람의 능력은 다이달로스의 미궁과 그 안을 헤메는, 테세우스의 옷자락 끝에 붙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와 같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구분되지 않는 공간을 결정짓고, 가지 않아야..

일상記/2016 2016.11.19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 - 9월편

18시. 여느 때처럼 퇴근하려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데 내선 전화가 울렸다. 사업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 주신 선임님은 요새 상품이 생각보다 안 팔리는거 같은데 이번달 말까지 추세가 어떨 것 같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짐짓, '그래서 뭐 어쩌라고'의 표정을 잠깐 지었다가 '월초에 연휴여서 그런게 아니겠느냐'는 상투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전화가 마무리 될 때 쯤, 대뜸 사업팀 선임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선임님이 잘 해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봐요." 나는 쑥스러워서 '왜 이러시냐, 일 더 시키시려고 이러는 게 아니냐.'고 농을 쳤지만 예상치 못한 칭찬에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불현듯 지난 9개월을 돌아보게 되었다. 입사 3개월만에 퇴사를 고민했..

일상記/2016 2016.09.20

[epilogue] 현체적인 추억 (연재종료)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L과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거의 내 이야기를 하느라 잠을 못 재워서 일단 L에게 미안하다. L은 이 근래에 내 복잡한 심리 상태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가장 거지같던 시절을 함께 한 사람이고, 그 이후에 내가 어떻게 회복되었는지도 눈으로 본 사람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회복을 바라며, 이 이후에 내가 다시 어떻게 망가질지 걱정하며 보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L은 내게 우선 일상으로 돌아가 보라고 조언했다. 그러면 내가 여행 막바지에 얻은 고민이 좀 없어지지 않겠냐고. 그러나 계속 그 고민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벌써 돌아온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고 있다. 돌아온 직후인 월화 이틀 간은 L의 조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