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記/2016

글이라는 것, 감정을 짜내어 기호로 표현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잉여 감정이 없을 때에는 그럴 법한 문장이 나오질 않는다. 어느 때고 보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일 때에는 기호수용자의 어떠한 선을 침범하여 넘어가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글의 방향은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문장에 힘이 실리고, 문단이 가지런해진다. 말을 좇는 데에 들어가는 주의력은 글을 좇는 데에 들어가는 그것보다 가볍다. 말은 분위기를 타지만, 글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글의 수용력은 그것을 만지는 사람의 능력에 철저하게 좌우된다. 기호수용자들에게, 글을 쓰는 사람의 능력은 다이달로스의 미궁과 그 안을 헤메는, 테세우스의 옷자락 끝에 붙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와 같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구분되지 않는 공간을 결정짓고, 가지 않아야 할 길을 가로막으며, 나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그런 것. 글을 쓰는 사람은 그래서 친절해야 하고, 신중해야 하며, 섬세해야 한다.



기호수용자들이 기호를 수용하는 양태는 저마다 제각각이지만, 이른바 술술 읽히는 기호들은 대부분 위안을 얻기 위한 효용을 갖는다. 이를테면, '이 세상에 혼자인 것은 나뿐만이 아니구나'라던가 아니면 '아니 또 이 세상에 이런 막장 인생을 사는 인격체가 (나 말고) 또 있다니'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던가 뭐 그럴 때 말이다. 사실 실념이 환희로 가득찬 사람들은 굳이 나열된 기호에 감정을 싣고 이입할 필요가 없다. 내 인생은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데,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안정적으로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있는데 굳이 남의 기호를 수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을 쓰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 거짓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문장이 생각을 나누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생각을 나누는 데는 비단 문장만이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문장력이 떨어져서 글을 못 쓴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른 교감수단에서는 능통할 수 있다. 역으로 문장을 잘 쓰는 사람들이 다른 교감수단을 사용하는 데에 능통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최소한 요즘과 같이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아니하면 바라볼 잠깐의 여유조차 허가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문장'만' 잘 쓰는 사람들이 가장 벽창호같은 자들이다. 해일같이 몰려드는 다양한 표현 속에서 수용을 위해 가장 많은 정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문장'이고, 문장만으로 호객행위를 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요새 통 글이 잘 안 나오는 너를 보니, 그래서 더욱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최소한 글에만 집중해야 하는 그런 외로운 시대는 지나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라고 내년 이맘때에는 내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건데... 나는 요새 글이 잘 써진다. 근데 아마 앞으로도 잘 써질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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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 여느 때처럼 퇴근하려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데 내선 전화가 울렸다. 사업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 주신 선임님은 요새 상품이 생각보다 안 팔리는거 같은데 이번달 말까지 추세가 어떨 것 같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짐짓, '그래서 뭐 어쩌라고'의 표정을 잠깐 지었다가 '월초에 연휴여서 그런게 아니겠느냐'는 상투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전화가 마무리 될 때 쯤, 대뜸 사업팀 선임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선임님이 잘 해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봐요."


나는 쑥스러워서 '왜 이러시냐, 일 더 시키시려고 이러는 게 아니냐.'고 농을 쳤지만 예상치 못한 칭찬에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불현듯 지난 9개월을 돌아보게 되었다.



입사 3개월만에 퇴사를 고민했다. 6개월 차에는 실제 다른 회사 면접을 보기도 했다. 면접 결과가 좋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붙었다면 진작 이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직의 사유는 되먹지 못한 회사의 시스템과 인간적인 부분 때문이었다. 비효율적으로 설계된 환경에서 인간을 갈아서 성과를 내는 것에 동의하지 못했고, 그것을 강요하는 사람들도 싫었던 것이다.


그랬던 게 불과 3개월 전인데, 이제는 회사 업무 중 주요한 업무 몇 개를 맡아서 하고 있다. 어떤 업무는 상품 발급에 중요한 부분으로 전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사람이 전사에 나와 사업팀 선배 단 둘 뿐이고 어떤 업무에서는 대외기관과 내부 조직을 매개하는 유일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사회에 직접 보고를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내 재량에 따라 정책결정을 하는 경우도 생겼다. 9개월 차에게 걸맞지 않은, 지나치게 많은 권한 - 그렇다고 막 회사의 향방을 조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 이 주어진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일단 요즘은 일하는 게 재미있다. 업무가 전문성을 띄게 되기도 했지만, 선배들이나 동기들과의 관계도 원만해진 덕도 크다. 3개월 전의 상황과는 상전이 벽해로 바뀔 정도의 변화다.



앞으로 상황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에, 긴 안목으로 봐야 한다느니 따위의 말을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정말로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아도 어떻게든 살아갈 구멍은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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