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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체험단이라는걸 처음 신청해본다. 꼭 써봐야 할 이유가 있는 물건이 많지도 않은데다,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돈 모아서 샀지 굳이 그걸 업체로부터 제공받아 무료로 쓰기 위해 안달을 해야하는게 너무나 귀찮았기 때문이다. (업체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는 점도 싫었고.)

 

그런데 LG에서 홈브루 체험단을 선발한다는 이야기에는 안 흔들릴 수 없었다.

 

그간 내가 맥주를 위해 해왔던 모든 작업들... 그러니까 잘 구워진 맥아를 사다가 물에 넣고 끓여 맥즙을 짜고 그걸 다시 걸러서 홉을 넣고 자글자글 끓이다가 이스트를 넣고 2주를 카보이에서 발효시켰다가 다시 병입하여 2주를 기다리는 그 작업을... 단 한 대의 기계가 해준다니까. 캡슐머신처럼 넣기만 하면 끝이라니까.

 

이건 원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이걸 한 번에 해준다는데.

 

체험단 신청 조건이 체험해보고 싶은 레시피를 블로그에 쓰는거라는데, 맥주라면 당연히 IPA다. 필스너도 좋은데, 날씨가 춥다. 청량한 맥주는 날이 더울때 마셔야 제격이다. 위트는 너무 순하다. 페일에일은 흔하고, 스타우트는 외관과 맛이 매치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결론은 I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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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홈브루 체험단 가입을 위한 포스팅  (0) 2019.11.05

10년 만에 민주당계 정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민주노동당 입당으로 시작해서, 진보신당-사회당-노동당으로 이어지는 이 철새역사가 드디어 민주당계 정당까지 이어진 셈.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당원이 되기로 결심한 까닭은 별 것이 아니라, 참 근거없는 이야기로 자꾸만 공격을 받는 어떤 대선후보를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름 정치판에서, 그것도 까보면 깔수록 아사리판인 진보정당 영역에서의 짬이 좀 되는지라 이미 볼 건 다 봤다는 근거없는 자신감 같은게 있었는데, 요새 상황은 그야말로 미증유의 개판이다. 오로지 한 후보의 낙선을 내건 사람들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게 어디 보기 쉬운 일일지.


각설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온라인 당원가입서 - 더민주에서 온라인 당원가입서를 내놓으면서 '정당 역사 최초 온라인 당원가입'이라고 주장했는데, 사실 공인인증서 기반 입/탈당은 예전 진보신당 시절에도 되던 것이다 - 를 작성했다. 주민등록번호와 범용공인인증서를 통한 본인인증을 마치고, 시도당을 정하기 위한 간단한 정보와 당비납부정보를 입력하니 가입완료 화면과 시도당의 검토를 거쳐야 한다는 메세지가 나를 반겼다. 문득 당원가입에 왜 시도당 검토가 필요한지 생각해 봤다. 아마도 여러 사람들이 검증되지 않은 페이퍼를 뭉텅이로 가져와 강제로 가입시키고, 그것을 기반으로 여러 당내 선거 등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과거 '페이퍼 당원'을 뿌리뽑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생각했다.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문자가 하나 왔다. 내가 당원에 가입되어 있으니 시도당에 문의하라는 내용이었다. 더민주가 창당된 이래,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입당 러시가 벌어지던 때에도 꿈쩍하지 않았는데 이미 가입이 되어 있다니 무척 의아했다. 경기도당에 전화해봤더니 전북도당에 당적이 있다는 것만 확인해 줄 수 있고, 자세한 내용은 전북도당에 물어보라고 했다. 담당자의 목소리는 피곤한데다 짜증으로 얼룩져 있었다. 한국같은 정치에 쓸데없이 엄숙한 풍토에서 당원가입을 한다는 것 자체가 꽤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인데 - 물론 대단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당제 민주국가에서 자기의 정견과 일치하는 정당에 당원으로 가입하는 것은 반드시 장려되어야 하며, 기초교육 과정에서도 소개해야 하는 아주 기초적인 내용이라 생각한다. - 그렇게 마음 먹고 전화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태도로 응대한다는 것이 마케팅 측면에서 딱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한 소리 할 수도 있었지만, 우선 내용 확인이 급해서 전북도당 전화번호만 안내 받고 전화를 황급히 끊었다.


전북도당에 전화를 해서 주민등록번호를 불러주니, 2004년에 당원으로 가입이 되어 있다고 했다. 최초 가입 당시 당이 어딘지 알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것까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2004년이면 아마도 열린우리당이었을 것이다. 그 해에 노무현 탄핵이 있었고, 공세에 몰린 열린우리당에 힘을 싣기 위해 당원가입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렇게 졸지에 13년차 더민주 당원이 됐다.


여담이지만, 이 전화를 끊고 다시 경기도당에 전화했더니 아까 전화받았던 그 분이 다시 받았다. 당적을 전북도당에서 경기도당으로 옮겼기 때문에, 당비납부약정을 위해서는 경기도당에 문의해야 한다고 전북도당에서 말해줘서 전화했다고 하니 또 막 짜증을 내면서 '아까 온라인 당원가입때 적으신 정보로 하면 되죠?'라고 말한다. 한마디 해야겠다 싶어 '이상한 사람들이 전화를 많이 하나봐요. 아니면 일이 많으시던가요.'라고 물었더니, '온라인 당원가입이 많아서 서둘러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전북도당 당직자도 되게 짜증을 냈던 것 같다. 뭔가 이런 일 말고 다른 일이 많아서 그런가보다. 


전직 진보정당 당원으로서, 그리고 더민주 당원으로서 우리 동네 시도당을 책임지는 당직자의 노동환경을 보호해주길 중앙당에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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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부쓰를 가기 시작한건 2013년부터다. 블로그에 올린 방문기의 일자가 2013년인걸 보니 확실히 그렇다. 당시 더 부쓰는 경리단에서 자라는 크래프트 비어의 새싹이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당시에는 바로 옆의 맥파이의 후발주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니엘 튜더를 언급한 것으로 마케팅 포인트가 잡혔지만, 그때는 그다지 맥파이와는 차별점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더 부쓰를 다시 만난건 2014년 삼성에서 인턴을 하던 때였다. 원래 하나 밖에 없었던 더 부쓰의 펍이 서초의 삼성타운 인근에 열려 있던걸 보고 무척이나 기뻤던 기억이 난다.


취직을 하느라 그렇게 2년이 더 지났고, 어느새 더 부쓰의 펍이 신논현역 인근에도 하나 더 생기더니 판교에는 브루어리까지 지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르는 새에 공모도 해서 소액주주들도 모았다고 했다.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주주총회 사진이라는게 올라오기 시작했고, 기회가 된다면 나도 투자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때쯤에 더 부쓰에서 다시 한 번 10억 미만의 규모로 소액투자를 공모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자신이 있는지 투자설명회도 한다고 했다. 내 입장에서는 놓칠 이유가 없었기에 지난 금요일, 잠깐 시간을 내서 다녀왔다.



투자설명회를 다녀온 느낌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글쎄. 별로 특별한 부분은 없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국내에서 크래프트 비어가 주류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술은 아직까지 '여가'의 수단이기 보다는 '망각'의 수단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크래프트 비어 같은 고품질의 술이 잘 팔리려면 술이 안 팔려야 한다. 술을 마시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위해서는 알콜의 양은 제한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에게 술이란, 사교의 수단보다는 사교의 목적이다. 수단이라면 지갑이 열리지만, 술을 마시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적은 돈으로 더 많은 양의 알콜을 소비하는 것이 효용극대화를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자칭 '혀에 민감한 사람들'이 소주를 가리켜 '싸구려 타피오카 주정을 희석해서 감미료 따위를 버무린 식용알콜'이라 비웃지만, 여전히 소주가 대중적인 인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런 합리적 선택의 산물이라고 봐야 한다.


투자설명회에서 더 부쓰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무척 강조했지만, 그건 개도국이 산업화를 하는 시점에 보이는 경제성장률과 비슷하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장이 작으면 마켓리더의 성장은 눈부시다. 시장의 확대가 곧 마켓리더의 성장과 직결되기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크래프트 비어는 일종의 '스노브 효과'를 얻는 아이템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싶은 사람들에 의해 소비되는 아이템이기에, 평범한 재화에 비해 다소 비싼 가격에도 팔리고 있다고 해석하고 싶다. 문제는 이들 소비자는, 가치가 아니라 단순히 차별화를 위해 소비하기 때문에 그 차별성이 소멸되는 시점에는 얼마든지 다른 재화를 소비하기 위해 시장을 떠나는 것을 감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앞으로 더 부쓰가 어떻게 방향을 잡아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런 소비자들에게 올인하는 게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은 굳이 내가 강조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부분일게다.



그럼에도 나는 공모가 개시되는 월요일 09시에 공모 페이지를 열어 1분 만에 투자의향서를 제출하고 소액의 투자금을 넣었다. 십 여 분만에 공모가 마감되었다고 하니, 1분 안짝에 입금까지 완수한 나는 아마 넉넉하게 더 부쓰의 주주가 되었을 것이다. 위와 같이 회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투자를 결심한 데에는 대동강 페일에일의 물류 과정에 대한 친구의 전언이 결정적이었다. 맥주를 위한 콜드체인이 전무한 상황에서, 물류밥을 먹는 친구가 괴로워 할 정도로 세심하고 빡빡하게 대동강 페일에일을 들여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이 사람들의 맥주를 위한 이런 정성은 충분히 투자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재무담당하시는 부사장님께서 '투자설명회에 오신 분들의 면모를 보니 이젠 더 이상 맥덕들이 아니시다'며 대중화된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꽤 즐거워 하셨던 것 같은데. 글쎄. 같이 양조하는 동료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더 부쓰의 재무적 가치보다는 맥주를 위한 열정을 이해할 수 있는 맥덕들이 더 모여주는게 아직까지는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뭘 복잡하게 썼지만, 그냥 이게 내가 투자를 결심하게 된 이유의 전부다. 나는 내가 가치를 두고 있는 부분을 충족하는 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계속 이어갈 예정이고, 그들이 내가 좋게 보는 그 부분을 계속 유지하기를 바랐다.



다시 추억이나 팔아보자면, 2013년의 포스트에 뭔가 종업원과의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 '파트너 김희윤'이 남긴 덧글이 있다. 그 파트너는 이번 투자설명회에서 더 부쓰의 코파운더co-founder이자, 최고마케팅책임자Chief Marketing Officer로 소개되었다. 4년의 시간 동안 커진 더 부쓰의 몸집을 실감케 하는 부분이다.



+ 쓰다보니 뭔가 엄청 장황한 느낌인데, 알콜성 치매가 아닐까. 아, 내가 술을 끊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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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방황중

2017. 1. 28. 02:19

작년 중순에서 말까지, 엄청나게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 회사 가기가 끔찍하게 싫었고, 누구도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정말 유치하기가 짝이 없다. 고작 내 편이 없는 것 같다는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했으니까. 하긴 꼭 그 '편'이라는게 사람이라는 법은 없다. 나는 내 마음을 어딘가에 두고 싶었다. 미치도록 지루하게 떠다녀야 하는 상황이 싫었고, 어딘가에 안정적으로 두 발을 디딘 채 서고 싶었다. 연말에는 그럴 일이 좀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줄 알았다.


물론 그건 착각이다. 여전히 멍청하게도, 나는 회사가 나에게 무엇을 많이 해줄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우스꽝스러운 인용이지만, 이 시점에 곱씹어 볼만한 인용이 있다. 바로 케네디의 취임연설 중 '국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를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십시오'라는 부분[각주:1]이 그것이다. 회사가 나의 목표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내 목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는게 여러모로 더 합리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정말 게으르게도 늘 환경이 나에게 맞게 변화해주기를 바라왔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어떠한 형태로든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목표를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틀을 깨부수기 위한 노력. 아웃사이더로 포지셔닝을 해 놓고, 인사이더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낭비를 계속해 왔지 않았는가 싶다. 대니 콜린스가 자작곡을 부르고 싶었지만 결국 '헬로 베이비 돌'을 부르는 것처럼, 익숙함 - 그리고 '다른 이로부터의 사랑' - 에서 떠나려는게 두려웠던게 아닐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상욱씨도 이제 뭔가 하고 싶은 걸 찾아야 하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단편적으로, 회사와 나의 목표를 일치시킬 수 있다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편한 선택이다. 근데 그러기는 싫다. 그러면 다른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 아니면 회사에 끼워맞춰 살 수 있는가?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고 살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고민하길 미뤄도 언젠가는 다시 이 고민을 하게 될 것이라면, 빨리 결정하는게 낫지 않을까?


  1. 사실 나는 케네디가 '국가'를 운운하는 것에 의문이 있었다. 이 사람이 애국주의자일 수는 있어도, 국가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궁금해만 하다가 연설문 전체를 보니, 이 문구 뒤에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하자'는 내용이 덧붙여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래야 내 케네디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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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17년입니다. 직전 글을 쓴 게 12월 말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중순이네요.


요즘은 대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업무에 변동이 있어서 정신이 좀 없기도 하고, 그간 신경쓰지 않았던 일에 관심도 가져보려고 하니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일일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하루 종일 뭘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보면 벌써 내일 출근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잊혀질 것은 잊혀지고 또다시 새로운 어떤 것은 찾아옵니다. 가버린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오는 것에도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L은 이런 저더러 '그렇게 흙바닥에서 구르는 것 같아도 레벨업은 꾸준히 하고 있다는 거지'라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쩌면 레벨업보다는 포기가 빨라진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어떤 하나의 관념에 매달리지 않으니 적어도 마음은 편합니다.


올해는, 너무 스스로가 가진 개념에 대해서 골몰하지도, 생각하지도, 표현하지도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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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라는 것, 감정을 짜내어 기호로 표현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잉여 감정이 없을 때에는 그럴 법한 문장이 나오질 않는다. 어느 때고 보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일 때에는 기호수용자의 어떠한 선을 침범하여 넘어가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글의 방향은 명확해야 한다. 그래야 문장에 힘이 실리고, 문단이 가지런해진다. 말을 좇는 데에 들어가는 주의력은 글을 좇는 데에 들어가는 그것보다 가볍다. 말은 분위기를 타지만, 글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글의 수용력은 그것을 만지는 사람의 능력에 철저하게 좌우된다. 기호수용자들에게, 글을 쓰는 사람의 능력은 다이달로스의 미궁과 그 안을 헤메는, 테세우스의 옷자락 끝에 붙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와 같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 구분되지 않는 공간을 결정짓고, 가지 않아야 할 길을 가로막으며, 나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그런 것. 글을 쓰는 사람은 그래서 친절해야 하고, 신중해야 하며, 섬세해야 한다.



기호수용자들이 기호를 수용하는 양태는 저마다 제각각이지만, 이른바 술술 읽히는 기호들은 대부분 위안을 얻기 위한 효용을 갖는다. 이를테면, '이 세상에 혼자인 것은 나뿐만이 아니구나'라던가 아니면 '아니 또 이 세상에 이런 막장 인생을 사는 인격체가 (나 말고) 또 있다니'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던가 뭐 그럴 때 말이다. 사실 실념이 환희로 가득찬 사람들은 굳이 나열된 기호에 감정을 싣고 이입할 필요가 없다. 내 인생은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데,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안정적으로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있는데 굳이 남의 기호를 수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을 쓰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 거짓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문장이 생각을 나누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생각을 나누는 데는 비단 문장만이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문장력이 떨어져서 글을 못 쓴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른 교감수단에서는 능통할 수 있다. 역으로 문장을 잘 쓰는 사람들이 다른 교감수단을 사용하는 데에 능통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최소한 요즘과 같이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아니하면 바라볼 잠깐의 여유조차 허가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문장'만' 잘 쓰는 사람들이 가장 벽창호같은 자들이다. 해일같이 몰려드는 다양한 표현 속에서 수용을 위해 가장 많은 정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문장'이고, 문장만으로 호객행위를 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요새 통 글이 잘 안 나오는 너를 보니, 그래서 더욱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최소한 글에만 집중해야 하는 그런 외로운 시대는 지나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라고 내년 이맘때에는 내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건데... 나는 요새 글이 잘 써진다. 근데 아마 앞으로도 잘 써질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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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카드와 Alias (2/15)

2016. 10. 11. 22:35

출근을 위해 거의 매일 광역버스를 타는데, 가끔 '미승인 카드입니다'라는 메세지 때문에 버스비 지불을 못하는 경우를 본다. 글 쓰느라 구글링해보니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꽤 되는 모양이다. 이런 일은 왜 발생할까.


설명이 좀 길어질 것 같아 답부터 먼저 이야기하면, 해당 단말기에 그 카드의 Alias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교통카드 기능이 되는 카드는 우리가 카드에서 보는 카드번호 외에 별도의 번호를 하나 더 가지고 있다. 특허청 등록 기준으로는 이 번호를 가리켜 '메모리 주소'라고 일컫고, 업계에서는 그냥 Alias라 부른다. 맞다. 미드 '앨리어스'의 그 앨리어스. 너와 나를 구분하는 구분자. 애초 메모리가 지금처럼 확장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던 시절에, 15~16자리인 카드 번호를 10자리로 압축하여 저장 공간의 효율성을 기하는 동시에 카드 정보를 플래그로 붙여 관리하기 위해 주식회사 이비[각주:1]에서 고안한 방식이다.


직전 글에서 한 차례 언급했듯, 현행 교통카드 승인/지불 프로세스는 오프라인 기반이다. 카드가 단말기에 태깅되는 순간, 단말기 내부 저장소에 이미 다운받은 정보와 비교대조하여 해당 카드를 승인Accept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승인을 위해 통신망을 사용하지 않다보니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시간지연이 없고, 그래서 수 밀리세컨드(ms) 내에 승인 결과가 도출된다. 이것이 대기만 하면 지불이 되어 게이트가 열리는 교통카드 승인의 프로세스다.


이 과정에서 비교대조하는 기준이 바로 Alias다. 단말기는 카드가 가진 Alias를 읽어들이고, 이 Alias에 붙은 정보('플래그')[각주:2]를 읽어들여 승인여부를 결정한다. Alias에 붙는 정보는 크게 할인등록여부와 카드사용가능여부다. 할인등록여부는 후불보다는 선불에서 더 의미있는 정보[각주:3]다. 단말기는 Alias에 붙어 있는 할인등록 플래그를 보고 이 카드에 일반요금을 부과해야 할지, 청소년요금을 부과해야 할지, 어린이요금을 부과해야 할지를 결정한다.


카드사용가능여부는 선불보다는 후불에서 중요하다. 분실/도난등록한 카드의 교통카드 기능이 정지되는 것이 바로 이 플래그와 관련있기 때문이다. 이 플래그에 '사용불가' 딱지가 붙어 있으면 단말기는 승인을 거부한다. 선불카드도 사용의 제한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사용 제한이 가능하다는 것이 곧 카드 내 잔액의 환불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후불교통카드는 일정 기간 동안의 승인 데이터를 모아 월말에 일괄청구를 하기 때문에 잔액소실에 대한 문제가 없는 것일 뿐이다.



Alias의 갱신은 예전에는 새벽 시간대에 일괄적으로 이뤄졌다. 시내버스 기준으로 단말기에 장착된 WIFI 모듈과 차고지 서버 간 Ad Hoc으로 연결하여 송신하는 방식이었다. 즉, 다운로드 이후에 변동된 Alias 정보는 실제 운행 중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서울의 경우, 최근 버스 단말기를 모두 LTE 모듈이 장착된 신형으로 교체하며 실시간 반영이 가능하게 되었다.



해당 기술은 원래 주식회사 이비가 발명한 것으로, 교통카드 초창기에는 이비가 독점적으로 사용하던 기술이었다. 그때도 물론 다른 발행사들은 열심히 교통카드를 팔았는데, 그건 비교적 단순한 스펙의 마이페어 클래식 - 앞서 설명했다. 궁금하면 1번 글을 보시길. - 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저장기능 외에 연산기능이 추가된 스마트카드로의 전환이 이뤄지고 수도권 통합환승이 요구되며 Alias는 수도권 내 교통 인프라 운영사 (서울 - 한국스마트카드, 경기, 인천 - 이비, 수도권 일부구간 - 코레일) 모두가 사용하는 기술이 되었다. 물론 이 기술을 그냥 내주기 싫었던 이비와 '서울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절대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한국스마트카드의 입장이 맞부딪히며 두 회사가 이 특허를 두고 소송전을 벌이기도 했다. 결과는 이비의 미비한 대처로 해당 특허 일부가 무효화되면서 한국스마트카드의 승리로 끝났다. 해당 특허분쟁은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철저한 준비서면의 작성이 필요한 사례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는 카더라가 있다.



여기까지 읽었으면 대강 교통카드가 어떻게 승인되는지에 대한 메커니즘은 이해했으리라 생각된다. 위 이야기를 이해했다면 우리카드 도움말 중 후불교통카드에 관한 이 이야기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우리카드 홈페이지 중 '후불교통카드'관련 설명 섹션. https://sccd.wooribank.com/ccd/Dream?withyou=CDCNT0201



더 쓰면 마티즈 타면서 사직서 내야 될 것 같아,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엔 또 뭘 써 볼까.



+함께보기

  1. Alias에 대한 주식회사 이비의 특허 내용 (출원번호 10-2003-0080830) : http://patent.ndsl.kr/patDetail.do?cn=KOR1020030080830

     - Alias가 뭔지 관심있는 분들이 읽어보면 좋은 내용. 이후 실무 과정에서 약간의 변동이 있긴 했지만 여전히 이 특허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 특허정보넷 KIPRIS에서 해당 특허의 등록사항과 심판사항 부분을 보면 위에서 언급한 한국스마트카드와의 분쟁 내용도 볼 수 있다.


  2. 단말기 오류로 후불교통카드가 안 되었다는 내용의 기사 :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012709471375730

     - Alias 이야기는 없지만 이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기사 중 '교통카드 발급대역폭'이라는 부분이 Alias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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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6 - 교통카드의 종류 (1/15)


  1. 롯데에게 인수되어 캐시비를 발행하는 그 eB 맞다. [본문으로]
  2. 고유명사는 아니고 그냥 '딱지' 같은 보통명사다. 흔히 쓰는 3M사의 그 책갈피 같은거 이름도 '플래그'인데, 그거 생각하면 된다. [본문으로]
  3. 후불은 기본적으로 일반요금을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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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facebook.com/leetw302 이태욱 2017.03.31 11:36

    교통카드 지불 프로세스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었는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교통카드의 종류 (1/15)

2016. 10. 6. 08:35

- Project 'FEEDBACK'의 본론으로서는 첫 글.


교통카드의 사용을 가능케 하는 기술은 RF다. RF의 세부 내용에 관해서는 앞서 두 포스팅에서 상세히 다룬 바가 있으므로, 오늘은 교통카드의 종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서울에 교통카드가 처음 도입되었을 당시 사용된 기술은 NXP반도체(구 '필립스' 였으나 이후 분사함)의 '마이페어Mifare'다. 서울버스조합에서 내놓은 유패스는 이 마이페어의 초기 버전인 '마이페어 클래식Mifare Classic'를 상용화한 세계 최초의 교통카드다. 다만 현재는 마이페어 클래식이 사용되지 않는데, 마이페어 방식은 단순히 메모리 방식으로 카드 내에 삽입되어 있는 기억소자에 잔액의 입출금만을 기록할 뿐 암호화나 해당 거래의 부당여부를 판독하는 연산기능이 없다는 취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련해서, 한때 잔액 오류로 무한정 사용되는 교통카드에 대해 보도된 바[각주:1]가 있는데 이게 가능한 것이 바로 마이페어 클래식의 보안취약점 때문이다. 유패스 외에도 초기 티머니 보급형, 홍콩의 오이스터 모두 마이페어 클래식을 사용하다 보안취약점 공개 후 모두 후술한 ISO 14443 규격을 충족하는 스마트카드로 바꿨다.


티머니 기준으로 보급형 티머니의 실제적 단종[각주:2] 이후 발급되고 있는 스마트 티머니는 마이페어 기술 대신 국제표준인 ISO 14443A을 적용한 스마트카드를 사용한다. 스마트카드는 카드에 삽입된 기억소자에 단순히 거래기록을 남기는 것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여러 정보들(예, 카드의 알리아스 번호, 유효기간, CVC번호 등)을 단말기에 내려받은 정보와 비교하여 해당 카드의 유효성을 함께 판독한다. 이동통신망이 잘 깔려 있는 나라에서 무슨 단말기에 카드에 대한 정보를 미리 내려받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태깅과 함께 결제가 이뤄지게 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후술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때문에 분실한 교통카드 내의 잔액 환불이 불가능하다.


온라인을 통해 카드의 유효정보를 검증하는 과정은 우리가 식당에서 밥 먹고 카드 긁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포스기에 카드를 긁는 즉시 자기띠에 들어 있는 카드 정보를 카드사 서버 혹은 VAN사 서버에 보내서 해당 카드의 유효성을 승인받고, 승인과 동시에 승인번호를 받아 결제를 진행하는 것이 바로 카드결제승인의 기본적인 프로세스다. 이것 때문에 예전에 무슨 카드결제할 때는 전화가 안 됐다가 전용선을 깔아야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오늘은 교통카드에 대한 이야기니까 이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포스팅을 하느라 블로그 몇 곳에서 관련 정보를 찾아 읽다보니, 가끔 마이페어와 ISO 14443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듯한 서술을 보는데 그게 좀 애매하다. 마이페어 클래식은 ISO 14443 제정 전에 출시된 것이 사실이지만, 국제표준 제정 이후 NXP반도체에서 출시한 마이페어 DESFire나 Ultralight C[각주:3] 같은 것들은 ISO 14443를 일부나 혹은 모두 충족하기 때문이다.


국제표준 ISO 14443은 RF카드의 결제기술에 대한 표준이며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ISO 14443에도 A형과 B형이 있는데, 이 둘은 4개 장 중 4장에서 규정된 전송 프로토콜은 동일하게 사용하나 2장과 3장의 코딩 방식Coding Scheme과 프로토콜 초기화 절차Protocal Initialization Procedure에서 차이가 있다. 나중에 NFC 기술이 등장하며 RF결제 방식과의 하위호환을 하는 작업이 펼쳐지는데 여튼 현재 타이완의 이지카드, 홍콩의 옥토푸스[각주:4], 상하이 교통카드, 한국의 티머니, 런던의 오이스터, 베이징 교통카드, 일본JR의 스이카, 샌프란시스코의 클리퍼, 인도의 모어 카드 등 대부분의 교통카드들이 ISO 14443을 준수하여 발급되고 있다. 독자규격 사랑하는 소니의 펠리카FeliCa는 ISO 14443C로 등록하려 했다가 실패하고 이후 NFC를 위한 국제표준 제정작업 중 ISO 18092로 등록된다. 국제표준이므로 아이폰7에도 실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망할! 착각했다. 이번 일본 출시 아이폰에 들어간 것은 소니의 펠리카가 아니라 JR의 스이카다.


이만하면 됐겠지. 이 다음에는 알리아스에 대해 써볼까 하는데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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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앙일보, '나 몰래 16억 충전된 교통카드 썼다가…헉!'. 2012년 8월 4일 작성. [본문으로]
  2. 공식적으로 단종은 아닌데 발급을 거의 안 한다. 보급형 티머니 외에 캐시비 브랜드 이전의 마이비/이비 발행 교통카드나 대구의 대경교통카드도 모두 마이페어 클래식을 사용한 교통카드다. [본문으로]
  3. 마이페어 클래식도 교통카드로 쓰기에는 오버스펙이라며 사양을 대폭 낮춘 규격이다. 한국에서는 지하철 일회권에서 쓰인다. 근데 암호화는 간단하게 나마 해서 완전히 클래식과 같다고 볼 수는 없다. [본문으로]
  4. 옥토푸스는 펠리카 기반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좀 더 알아보고 변동이 있으면 반영하겠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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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탁금지법에 관하여

2016. 9. 30. 17:04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하 '청탁금지법')이 시행된지 사흘이 지났다. 업무특성상 공공기관과 접촉할 일이 많아서인지 우리 회사도 이례적으로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관련법 강의를 네 차례나 열었고, 영업을 담당하는 직원들의 해당 법에 대한 관심 또한 뜨거웠다.


해당 법률에 대한 관심은 우리 회사 업무 담당자만 뜨거웠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기자들의 관심도 뜨겁다. 청탁금지법이 발효된 28일부터 기자들이 써놓은 관련기사의 수는 무려 64,000건[각주:1]. 일평균 21,000건의 기사가 김영란법을 키워드로 한 셈이다. 권익위나 경찰청 등 유권기관에서 내놓은 보도자료를 받아쓴 식의 중복 기사도 다수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참 많은 수다. 언론의 청탁금지법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새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와중에 재미있는 현상들이 목격된다. 법 취지가 무색하게 이 법 때문에 '서민이 죽는다'는 투의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점도 그 중 하나다. 문화일보는 '식당폐업 속출, 서빙직 줄줄이 쫓겨나... '서민 일자리'직격탄'이라는 제호 하에 청탁금지법을 헐뜯는 기사를 내놨다.[각주:2] 법률이 시행된지 사흘 밖에 안됐는데 벌써 폐업하는 식당들이 속출한다는 주장도 실소를 금할 수 없지만, 이 말이 정말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얼마나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비싼 밥을 공짜로 먹어가며 청탁을 받느라 으스댔는지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


서울신문이 '[르포1...신논현역 대리기사] 콜 '0'... 대리기사의 눈물'이라는 제호로 내놓은 기사[각주:3]도 눈여겨봄직 하다. 고급술집이 밀집한 논현역-신논현역 일대에서 접대 받은 후 대리를 이용하는 경우가 없어져 대리기사들의 생계가 막막하다는 내용이다.


뉴스1이 '김영란법이 뭐길래…쫄쫄 굶고 물만 마신 기자들'이란 제호로 내놓은 기사[각주:4]는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하다. 그들 자신이 청탁금지법의 규제대상이 되면서 답답하다는 고충을 잘 털어놓은, 근래 보기 드문 수작이다. 기자들이 이 법의 대상이 된 것은 한국 사회에서 언론이 갖는 위상을 감안할 때 당연한 일이다. 언론이 내놓는 기사가 만드는 후폭풍은 매우 크다. 사실 확인이 명확히 되기 전까지는 기사라 할지라도 팩트보다는 의견에 가까운데 우리 사회에서는 철저하게 '기사=팩트'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같은 내용을 내놓더라도 해당 건을 보도한 언론사의 위상에 따라 그 팩트의 질이 판단된다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현상적으로도 자본과 언론이 결탁하여 비뚤어진 결과를 내놓는 경우는 무수히 관찰된다. 기사 형식으로 내놓는 광고 - 이른바 '협찬 기사' - 도 있고, 기자간담회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마땅히 내놓아야 할 기사를 내놓지 않거나 아니면 단신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 한국의 언론재벌들은 경제권력과 결탁하여 간혹 부정한 이들의 신분세탁에 동원되기도 한다. 안 그런 분들이 많겠지만, 빈 수레가 요란하듯 저널리즘을 배신하는 몇몇 기자들의 행동이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법을 탓하기에 앞서 기자들 스스로 직업윤리를 준수하고 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 국민권익위원회 홈페이지 중 청탁금지법 설명 부분


흔히들 혼동하는 것이 청탁금지법이 모든 청탁을 금지하는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법은 그 자체만 놓고 보면 가장 보수적이며, 합리적인 문장이다. 청탁금지법도 마찬가지여서, 공개적인 청탁에 대해서는 법률로 처벌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법이 문제삼고 있는 '부정청탁'이란 해당 사안에서 권력을 가진 자가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 경우 대부분의 과정이 금품 등 경제적 이익을 매개로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기에 경제적 이익 공여에 대한 처벌규정을 특별하게 만든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음지에서 벌어지는 부정부패를 근절하겠다는 것이 이 법을 만든 사람의 취지고, 이 법의 취지는 분명히 도덕적으로나 사회규범적으로나 바람직한 방향이란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애먼 서민경제를 언급하며 마치 이 법이 국민경제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도하는 것은 명백한 호도다.


청탁금지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간단하다. 호의를 바라지 말자. 설마하는 생각을 버리자. 내 밥은 내가 사 먹고, 내가 일하지 않은 것에 대해 소득을 바라지 않으면 된다. 극히 합리적이고 순리적으로 생각하면 답이 간단하게 나오는 법이다. 이 법률 때문에 감사를 표하는 미풍양속 - 그런데 또 사회상규를 위한 어쩔 수 없는 기부행위에 대해서도 조건부로 허용한다 -  이 사라지니 어쩌니 하며 혀를 끌끌 차는 사람들을 보면 기가 막힐 따름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고, 그깟 관례적 호혜 때문에 부정부패를 막자는 취지의 법률을 무력화시키자는 것이 어떻게 합리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위에서 몇몇 기자들이 언급한 '서민경제 파탄', '내수위축'같은 것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누누히 강조하지만 청탁금지법은 남에게 얻어먹는 것을 제한하는 법률이니 자기 돈 주고 자기가 사먹는 것을 막는 법은 아니다. 비싼 술이 먹고 싶으면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모여 마시고 나눠 내고, 그리고 내 돈 주고 대리기사 요청하여 집에 가면 될 일이다. 비싼 밥도 마찬가지고, 골프도 마찬가지다. 그저 누군가 대신 내줘야 할 것이라는 그 게으른 탐욕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엄한 법률을 탓하는 것을 보면 대체 이들이 어떻게 언론고시를 통과하여 기자가 될 수 있었는지 청문회라도 열어야 할 판이다.


이제는 불필요한 호의들과 작별할 때다. 전 국민이 갑질에 분노했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부정하게 청탁할 수단이 사라지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권력관계도 일정 부분 해체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명쾌한 도식에서 헤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이렇게 복잡한 청탁의 그물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반증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겪으면 겪을수록,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참 안쓰러운 체제다.

  1. 구글 뉴스 검색결과. 언론에서는 '청탁금지법'이라는 정규 이름보다 '김영란법'이라는 속칭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김영란법'으로 검색했다. https://www.google.co.kr/search?q=%EA%B9%80%EC%98%81%EB%9E%80%EB%B2%95&newwindow=1&hl=ko&biw=1536&bih=731&source=lnt&tbs=cdr%3A1%2Ccd_min%3A2016.+9.+28.%2Ccd_max%3A2016.+9.+30.&tbm=nws [본문으로]
  2.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093001071003016001 [본문으로]
  3.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930008019 [본문으로]
  4. http://news1.kr/articles/?278854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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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탁금지법에 관하여  (0) 2016.09.30

18시. 여느 때처럼 퇴근하려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데 내선 전화가 울렸다. 사업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전화 주신 선임님은 요새 상품이 생각보다 안 팔리는거 같은데 이번달 말까지 추세가 어떨 것 같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짐짓, '그래서 뭐 어쩌라고'의 표정을 잠깐 지었다가 '월초에 연휴여서 그런게 아니겠느냐'는 상투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전화가 마무리 될 때 쯤, 대뜸 사업팀 선임님이 이런 말을 하셨다.


"선임님이 잘 해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봐요."


나는 쑥스러워서 '왜 이러시냐, 일 더 시키시려고 이러는 게 아니냐.'고 농을 쳤지만 예상치 못한 칭찬에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불현듯 지난 9개월을 돌아보게 되었다.



입사 3개월만에 퇴사를 고민했다. 6개월 차에는 실제 다른 회사 면접을 보기도 했다. 면접 결과가 좋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붙었다면 진작 이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직의 사유는 되먹지 못한 회사의 시스템과 인간적인 부분 때문이었다. 비효율적으로 설계된 환경에서 인간을 갈아서 성과를 내는 것에 동의하지 못했고, 그것을 강요하는 사람들도 싫었던 것이다.


그랬던 게 불과 3개월 전인데, 이제는 회사 업무 중 주요한 업무 몇 개를 맡아서 하고 있다. 어떤 업무는 상품 발급에 중요한 부분으로 전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사람이 전사에 나와 사업팀 선배 단 둘 뿐이고 어떤 업무에서는 대외기관과 내부 조직을 매개하는 유일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사회에 직접 보고를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내 재량에 따라 정책결정을 하는 경우도 생겼다. 9개월 차에게 걸맞지 않은, 지나치게 많은 권한 - 그렇다고 막 회사의 향방을 조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 이 주어진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일단 요즘은 일하는 게 재미있다. 업무가 전문성을 띄게 되기도 했지만, 선배들이나 동기들과의 관계도 원만해진 덕도 크다. 3개월 전의 상황과는 상전이 벽해로 바뀔 정도의 변화다.



앞으로 상황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에, 긴 안목으로 봐야 한다느니 따위의 말을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정말로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아도 어떻게든 살아갈 구멍은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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