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벳

9월 9일 금요일.


이날은 모처럼 여유있는 날이었다. 아침의 소란만 빼면.


새벽 2시에 캉딩에 도착해 터미널 근처의 숙소에서 새우잠을 잤다. 주인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러샨으로 가는 버스가 아침 7시 반에 있다고 했다. 바이두에서 찾은 결과가 6시, 7시, 7시 반의 3개 설로 분분하였으나 동네 사람의 말이므로 믿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L은 불안했는지, 아침에 조금 일찍 나가서 표를 사겠다고 했다. 표가 없다면 플랜을 다시 고민해야 했으므로 그러는게 좋겠다고 했다.



조용한 새벽은 L의 비명으로 깨졌다. 표를 사기 위해 터미널로 갔던 L이 러샨으로 가는 버스 출발시각이 7시 반이 아니라 7시니 지금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눈을 떠 본 시계 속 숫자는 6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20분이었다.


아슬하게 출발시간 5분을 남기고 버스에 올랐다. 캉딩부터 러샨까지는 버스로 5시간 이상 걸리는 길이었다. 구불구불한 산악도로를 타며 옆을 보니 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캉딩과 야안을 잇는 고속도로라고 했다. 만약 저 길이 완공된다면 캉딩부터 청두까지 가는데 차량으로 소요되는 시간이 약 3시간 이상 줄어들 것이라고도 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힘든 것은 좋지 못한 도로사정이었다. 완전히 오프로드도 아니고, 완전히 포장도로도 아닌 어정쩡한 길의 연속. 베이징에서 쿤밍을 잇는 고속도로('경곤고속도로')나 베이징과 라싸를 잇는 고속철도노선('칭짱철도')이 완공된지 벌써 수 년이 지났고, 이제는 거점 외 주변부에 대한 사회간접자본의 투자를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차와 사람이 닿는 어디든 사천의 강토는 토목공사로 다져지고 있었다. 아마도 다시 십 년이 지나면 이렇게 고생스러운 자동차여행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로마는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가 중앙집권의 기틀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가장 먼저 통치체제에 반영한 제국이다. 원활한 물류는 마치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처럼 필연적으로 정치적 권력의 흐름도 원활하게 한다. 점령지를 중심부와 직결하여 물자와 사람을 실어나르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동화를 추구한다는 것. 그것이 현대 중국이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식민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러샨에 가는 길에 페이퍼를 꺼내들었다. '오베라는 남자'. 정말 오랜만에 읽는 소설이었다. 나는 평소에 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은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마저도 등장인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전국시대가 통일되어 가는 과정을 탐색하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판단하기 위한 문화적 출판물로서의 레퍼런스였긴 했다. 시도 마찬가지다. 책 자체를 많이 읽지 않지만 픽션은 그 틈바구니에도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내게 독서란 언제나 레퍼런스를 찾는 과정이었다. 연구를 위해 책을 읽었고, 그러다보니 쓰는 글들도 대부분 정규적인 형식의 글이었다. 말과 글과 생각을 항상 포멀하게 하다보니 스스로를 늘 공식적인 틈 안에 가둬둔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했다. 특히나 - 물론 꼭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 감정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를 몰라 전전긍긍하며 난감해 할 때마다 더 드는 생각이었다. 좋은 선배, 좋은 동료, 좋은 후배는 되었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늘 당황해했다.


물론 논픽션보다 픽션을 더 즐겨 읽는 사람이 삶에서 더욱 감정을 잘 드러낸다는 연구결과는 아직 찾아 읽은 바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적 배경은 전승된다.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아도 말이다.



러샨 터미널에 도착해서 러샨 고속철도 역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차는 많이 타봤으니 이제 중국의 고속철도를 타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느냐는 L의 아이디어였다. 줄을 서서 표를 샀다. 이때가 오후 4시. 기차를 타야 하는 저녁 7시까지는 고작 세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대불이 있는 낙산대불사로 향했다.


나는 이때쯤에 경치보다는 사람에 집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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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도를 타고 청두에 도착한 것은 8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저녁을 먹고 클럽에 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클럽에 간 것은 12년이었다. 친구가 무슨 홍보대사를 하면서 연 파티에 초대를 받아 간, 신논현역 인근의 클럽이었다. 몰랐던 바는 아니지만 30분만 있다가 나왔다. 이상하게 어두운 곳에서 큰 음악이 흐르며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나는 아직 잘 즐기지 못한다. 물론 그저 익숙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예전의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내가 담배 - 엄밀히 말하면 궐련이지만 - 도 피우고 술도 먹는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변하면서 인생에 적응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지가 관건이지만.



사고를 치고 숙소에 와서 잠들었다. 할 수 있다면 기억을 삭제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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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5 - [6일차/7일차] 9월 7일-8일, 써다[色達]-캉딩[康定]

2016/09/13 - [5일차] 9월 6일, 빠메이-딴빠[丹巴]/자쥐짱짜이[甲居藏寨]-따오푸[道浮]

2016/09/13 - [4일차] 9월 5일, 상목거-신두차오[新都橋]-타공[塔公]-빠메이[八美]-야라설산[雅拉雪山]

2016/09/13 - [3일차] 9월 4일, 상목거-즈메이야커우, 그리고 북망산(...)

2016/09/12 - [2일차] 9월 3일, CTU-KGT-상목거(上木居)

2016/09/11 - [1일차] 9월 2일, ICN-CTU

2016/09/11 - [prologue] 그렇게 다시 중국으로 갔다


나는 죽음이 또 다른 삶으로 인도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닫히면 그만인 문이다.

                                                                                                     ― 알베르 까뮈


9월 7일 수요일, 그리고 9월 8일 목요일


이 날은, 아니 이 날'들'은 무척이나 기억에 남는 날이었다.



보통 써다까지 가는 사람들은 단 하나, 오명불학원(五明佛學院)을 찾아간다. 어찌나 유명한지 '심지어' 나무위키에도 항목이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온라인에서 찾은 이 곳의 사진을 보고, 마냥 티베트 불교에 대한 환상을 꿈꾸며 이 여행의 목적은 이 곳이라 단언하기도 했다. (놀라운 일이다.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이 역시나 오리엔탈리즘을 가지고 있다니.) 수요일은 오명불학원을 탐방했고, 목요일은 천장(天葬)을 보았다.


다만 나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자세한 이야기와 사진을 내놓지 않을 생각이다.


오명불학원은 관광지가 아니라 수도의 공간이다. 이름에서도 눈치챘듯, 이 곳은 티벳불교를 공부하는 승려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국내 불교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세계 최대의 불교 학원이라는 것 같다. 이를테면 대학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나 영국의 옥스포드, 미국의 앤 아버처럼 말이다.


최근 중국 정부는 이 일대를 재개발하며, 3만 7천 명까지 거주했던 이 공간을 5천명 수준으로 줄이려 하고 있다. 명목은 불량한 위생상태 개선 등을 통해 수도에 정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 - 그러면서 기존 불학원 공간 외에 기숙사 같은 공간을 신축하고 있었다 - 하겠다는 것이다. 동시에 중국인 - 정확히는 '한족' - 외 기타 국적자의 써다 방문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불교계가 공인한 판첸 라마[각주:1]를 철저한 공산당 인사로 바꿔치운 것이 먼 옛날의 일이 아니다. 이쯤되면, 이들의 최종 목적은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명불학원은 이런 맥락 속에서 소비되고 있다. 매일 한족들은 자차나 버스로 몰려와 특유의 시끄러움과 함께 사진을 찍고 그것을 너도나도 자랑하기에 바쁘다. 웨이보를 하지 않는 자가 없고, 웨이신으로 동영상을 찍어 친구에게 보내지 않는 이도 없었다. 신기하다며 법복을 입고, 야경을 찍겠다며 야간에 거주지를 헤멘 내가 할 이야기는 아니나, 적어도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라면 최소한의 선은 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에게서는 타 문화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이 풍경을 소비하기에 바쁜 한 떼의 유커의 모습만 찾아볼 수 있었다.


이 생각이 더욱 확고해 진 것은 9월 8일의 천장(天葬) 중이었다. 비록 윤회사상의 일부로, 오늘의 죽음이 끝이 아닌 것이 이들의 믿음이고 그렇기에 장례풍습이란 것이 우리처럼 무작정 슬퍼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가시는 길에 사진 못 찍어 안달난 이들처럼 셔터를 연신 눌러댈 필요 따윈 없지 않았던가. 그것도 '제발 찍지 말아주세요'라고 정중하게 써 있는 표지판을 앞에 두고 말이다. 심지어는 잘 보겠다고 담을 넘어 갔다가 장례 관계자에게 큰 소리를 듣는 자들도 있었다.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며 숫자 '8'과 '6' 따위의 미신에 일억금도 아깝지 않게 내다버리는 위인들이, 어째서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서는 그렇게 세속적이고 멍청한 모습을 보였는지 나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생경한 체험을 했다는 기쁨보다 이 멍청이들과 함께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이 너무 부끄럽고 짜증났다.


그렇기에 이 날의 '아름다운' 기억을 당신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다. 사진도 정말 여행 내내 찍은 것 중 베스트 컷만 남았지만 차마 내 손으로 이 곳을 다시 '관광지'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다.



생각보다 늦게 끝난 천장 때문에 8일은 밤을 새워 캉딩으로 달렸다. 아저씨는 중간에 쉬었다 갔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일정상 그럴 수 없었다. L은 이렇게 된 거 못 본 설산을 보기 위해 해라구로 가는게 어떻냐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거기서 헤어질 생각이었다. 오랜 고민이었다. 꼭 함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구태여 죽상을 하며 모든 분위기를 나쁘게 만들기보다 나 혼자 떨어져 나오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하루 종일 기분 나쁜, 아니 마지막 날까지 기억의 한 구석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날이었다. 이 날, 나는 여기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2016/09/13 - [5일차] 9월 6일, 빠메이-딴빠[丹巴]/자쥐짱짜이[甲居藏寨]-따오푸[道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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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1 - [prologue] 그렇게 다시 중국으로 갔다


  1. 달라이 라마 사후 환생한 달라이 라마를 찾고, '달라이 라마'로서의 존재를 확인하는 인물이다. 역으로 판첸 라마 사망시 환생한 판첸 라마를 찾고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달라이 라마의 역할 중 하나다. [본문으로]

9월 5일 월요일.


이 날도 날은 흐렸다. 그래도 오늘은 여길 나간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설렜다. 민가 주인이 여행기간 동안 이용할 차량과 기사를 물색해주었다. 유류비 제외 1일 600위안. 만약 숙박을 하게 된다면 숙박비는 우리가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장거리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과 비교하면 결코 저렴한 금액은 아니었지만, 금액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정된 기간 내에 압축적으로 여정을 소화하는 것이었다.


상목거의 길은 매일이 달라졌다. 어제는 분명 있었던 길이 오늘은 없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날도 그랬다. 엊그제 들어오며 우회했던 길이 오늘은 간밤에 온 비 때문에 떠내려갔고, 대신 원래 다리가 어설프게 복구되어 있었다. 여전히 다리 옆에는 전복된 트럭이 그대로 물에 잠겨 있었다. 아마도 공사 때문에 자재를 싣고 가던 트럭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다리가 휘어버렸던 모양이다.


길의 상태에 따라 민감해지는 기사 아저씨를 따라 내 관심사도 길에 집중되었다. 덩치 때문에 나뉜 앞뒤 자리의 구분은 여행이 끝나는 순간까지 변하지 않았다. 길이 험하건 어쩌건 뒤의 셋은 참 잘 잤다. 하기사 이렇게 태평하지 못하면 이런 여행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생각과 조금만 다르면 무척 민감하게 받아들이곤 하는 나는, 아마 앞에 앉지 않았더라도 끊임없이 불안해하며 잠들지 못했을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의도치 않았지만 매우 적절한 역할 분담이었다.


가는 길은 왔던 길의 역순이었다. 좋지 않은 길을 따라 오르다 다시 포장도로를 탔다. 길 밖의 풍경은 여전했다. 그나마 오늘은 날이 좀 개어서 맑은 하늘이 함께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오던 길에 들렀던 샤더 쩐[沙德鎭]에 정차했다. 기사 아저씨는 험한 길을 달리느라 차가 많이 더러워졌으니 세차를 하겠다고 했다. 앞으로 가는 길이 지금까지 달렸던 길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 분명히 제대로 된 길이 아닐 것이라고 - 생각했던 우리는 대체 아저씨가 왜 이 시점에 굳이 세차를 하겠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구태여 뭐라 첨언하지는 않았다. 대신 세차를 하는 동안에 과일을 좀 사겠다고 떠났다. 불과 사흘 밖에 있지 않았지만 뭔가 싱그러운 것이 먹고 싶다는 것에 우리 모두 동의하는 것만 같았다.


이틀 동안 장족의 식사를 세 번 정도 했지만, 단 한 번도 살아있는 느낌의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차가 든다고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장기보관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음식들을 먹었다. 우유는 끓이거나 발효시켜 먹고, 곡식은 빻아서 말렸다가 빵을 만들었으며, 채소류는 모두 익혀 먹었다. 이 즈음에 동네 슈퍼에만 가도 싱싱한 어떤 것들을 쉽게 먹을 수 있는 우리의 상황과는 몹시 대비되는 양식이었다. 평소에 건강식을 추구하는 부류도 아니었건만, 이렇게 계속 먹다가는 곧 곡기를 끊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내가 할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일도 사고, 과자도 좀 사고 길거리 주전부리도 먹었다. 대략 2-30여 분 쯤,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라 생각하며 세차장으로 돌아왔을때 몹시 당황스러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우리를 데리고 온 아저씨가 없어진 것이었다. 우리에게 박혀 있는 중국에 대한 여러 인상 중 하나는 바로 '사기'. 모든 짐이 다 차의 트렁크 안에 들어 있었기에 만약 아저씨가 정말로 그걸 노리고 사라진 것이라면 우리로서는 매우 막막한 상황이었다. 더 재밌는건 누구 하나 기사 아저씨의 전화번호를 얻어야 겠다고 생각한 이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쯤되면 아저씨가 나쁜게 아니라 우리가 멍청한거라고 해야 했다.


황망히 주변을 배회하다, 내가 잠깐 다른 데에 가보겠다고 했다. L은 너마저 없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답했다. 어차피 나도 그렇게 멀리 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 큰 도로를 따라 걷는데 저 멀리서 아저씨가 '허허'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오고 있었다. 냉큼 가서 어디 갔었냐고 물어보니 '너네 찾으러 여기 돌았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으며 이야기한다. 뭐랄까. 이 때부터 우리는 이 아저씨를 '아재'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우리 사이에 뭔가 라포Rapport가 형성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신두차오에서 점심을 먹고 타공에 갔다. 가는 길 내내 평온하던 날씨가 갑자기 변덕을 부렸다. 타공 초원에 오르는데 천둥번개를 포함한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걸 대체 뭘 봐야 하나 황망하게 걷고 내려가려는데, L이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휙- 가버린다.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높은데서 타공의 티베트 사원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고산지대라 언덕 오르는 데 숨이 가빠 죽겠건만, 이렇게 비가 오는데 진창길을 걸어 갔다. 재밌는건 나 빼고 - 솔직히 나는 얼굴에 써 있었을거다 - 아무도 찌푸리기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쯤되면 얘네가 정말 사람인지 아니면 보살인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초원에서 내려 오는 길에 K는 장족 전통복장을 구매했다. 그렇잖아도 대강 준비하고 온 턱에 갑자기 부쩍 내려간 기온에 이미 어설픈 코트 한 벌을 구매한 K였다. K는 싱글벙글 웃으며, 이제 '라마승 복장만 구매하면 되겠다'고 말했다. 대체 얘는 무슨 생각인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라면 갖지 못할 그 정신상태에 다시 한 번 감탄하기도 했다.


기다리고 있던 차에 타니, 아재가 여기서 더는 못 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타공에서 빠메이로 가는 길이 보수 중이라 저녁 6시에나 교통관제가 풀릴 것 같다는 것이었다. 오기 전에 다른 이들의 여행기를 찾아 읽으면서 버스 타고 가다가 앞에서 사고가 나서 5시간을 기다렸다는 둥, 산사태 때문에 길을 돌아서 가야 했다는 둥 등의 쓰촨의 길 상태에 대한 악소문을 많이 들었었는데 그게 내게도 사실이 된 셈이었다. 물론 이건 시작일 뿐이었지만.


비에 맞아 몸이 젖었는데 그냥 계속 차에 있을 수는 없어서, 차를 일단 돌려 타공 중심으로 향했다. 커피라도 한 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그 소원을 들었는지 타공 광장에 '카페'라는 표지판이 보여 냉큼 향했다. 아마도 유럽인으로 보이는 여성과 티베트인 남성이 운영하는 카페 겸 게스트하우스. J와 K는 뜨거운 토마토 수프와 빵을 주문했고 L은 카페오레를 주문했다. 나는 갑자기 눈에 들어온 생강차를 주문했다. 감기 기운에 생강차를 먹으면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기대 때문이었다. 원래 마시려고 했던 블랙 커피를 마셔도 되는건데, 왠지 그 기능성에 휘말려 생강차가 좋은 선택일 것만 같았다. 결정적으로 틀리지는 않았지만 구태여 꼭 그렇게 효용에 초점을 맞춰 살아야 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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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고 테라스에서 잠깐 사진을 찍다가 내려가서 시계를 보고 차에 몸을 실었다. 이때도 L과 K와 J는 여전히 광장에서 사진 삼매경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못마땅했다. 이들은 매번 이런 식이었다. 이들은 대체 일정개념이라는 것이 있는걸까 싶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래도 되지 않을 공간에서 너무나 문명의 기준에 맞추어 스스로를 내몰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어쨌든, 시간은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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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메이로 가는 불편한 길이 다시 시작됐다. 빠메이는 신두차오에서 딴빠[丹巴]로 가는 길목에 있는 현이다. 타공에서 빠메이를 가기 직전에는 '흑석림(黑石林)'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검은 기암괴석이 마치 숲처럼 우뚝 서 있다고 해서 붙여진 곳이다.


당초 계획은 원래는 빠메이를 지나 야라설산을 보고 딴빠에서 잘 계획이었다. 그러나 타공-빠메이 구간의 도로보수공사로 시간이 지연되어 야라설산까지 가다가 인근에서 자는 것이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조금 비싸긴 하겠지만, 야라설산의 뒤에 풍경구(風景區)가 따라 붙는 것을 보고는 나름 관광지로 개발된 곳이라 믿어 숙박시설 또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빠메이를 통과하여 야라설산에 가는 길은 산 위로 굽이치는 뱀과 같았다. 그 길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다보니 저 멀리 설산의 봉우리 끝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설산을 봤다는 기쁨도 잠시,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전망대 아래로 보이는 풍경구에도 숙박시설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딴빠까지는 3시간. 벌써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두움을 뚫고 산길을 갈 배짱은 나도, 아저씨도 없었다. 결국 사진만 몇 장 찍고, 다시 빠메이로 돌아갔다.


빠메이 숙소는 좋았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도로보수공사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에 여기에는 전기장판이 있었다. 며칠 간 완전하게 갖춰지지 않은 환경에서 보내다 이제 좀 도시로 나와 편할 줄 있을 줄 알았지만 우리에게 그런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저녁과 바이주를 마시고 잠들었다. 내일은 딴빠로 가야 했다. 뭐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실낱같이 자쥐짱짜이[甲居藏寨]에 희망을 걸었다.


내게는 의미없는 하루가 또 지나갔다. 이쯤되면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반성해 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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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3 - [3일차] 9월 4일, 상목거-즈메이야커우, 그리고 북망산(...)

2016/09/12 - [2일차] 9월 3일, CTU-KGT-상목거(上木居)

2016/09/11 - [1일차] 9월 2일, ICN-CTU

2016/09/11 - [prologue] 그렇게 다시 중국으로 갔다


9월 4일 일요일.


이 날은 아침부터 비가 많이 왔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전날 민가 주인은, 우리가 애초 가려 했던 즈메이야커우까지 길이 험해 차량 접근이 어려우므로 오토바이를 타고 갈 것을 권했다. 그리고 즈메이야커우 외에 두 곳의 여행지를 추가로 추천해주었다. 즈메이야커우는 새벽에 올라가야 공가산[貢嘎山]의 전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밤늦게 미리 와서 자고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었다.


출발하기로 한 시간이 임박했으나,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역시, 전날의 여정이 힘들었는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기다렸다, 비가 그치기를. 비가 그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딱히 그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전 9시가 되었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다. 플랜B가 가동되었다. 다른 곳을 가려고 했던 차를 타고 우선 즈메이야커우로 올랐다. 어제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길은 험했다. 가는 길에 좌우로 간간히 공가산의 만년설이 눈에 보였다. 평소에도 잘 보여주지 않는 자태였기에, 비가 오는데도 보이는 것을 두고 '신이 허락했다'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때는 정말 그런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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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메이야커우에 도달할 즈음, 비는 그쳤다. 그러나 하늘은 구름 투성이였다. 사진으로만 보던 설산이 눈 앞에 있지 않다는 것에 - 나는 이때는 우기라 그러기 쉽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구태여 나중에 더 이야기하지 않을 것 같아 미리 적자면, 우리는 이번 여행 내내 설산 관망에 실패했다. 나중에 계속되는 설산 관망 실패에 J가 농담처럼 이야기한 것처럼, 스위스만 가도 널린 것이 설산이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섭섭한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오르다보니 절벽을 깎아 만든 집이 한 채 보였다. 아마도 야크 방목을 위해 만들어 둔 임시 거처 같았다. 오르는 길이 있길래 올랐다. 정말 대책없이, 아무런 계획없이 온 것 때문일까 하는 자책이 한 켠에서 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계단을 올라 집 뒤로 난 구릉을 따라 걸어 올랐을때, 넓게 펼쳐진 초원과 그 위에 드문드문 피어있는 에델바이스를 보고는 그 자책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날씨가 좋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그 순간의 만족할 부분을 찾아 즐거워 할 줄 알아야 했다.


초원에서 숨을 돌릴 때 저 멀리서 구름이 걷히며 만년설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의 카메라로는 잡히지 않는 그 먼거리를 애써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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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산 끝자락을 보더니 능선을 따라 올라보자고 말했다. K는 씩씩하다. 아니,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유베날리스의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말. 나는 한때 이 말을 비웃었지만, 요즘 들어 날이 가면 갈수록 망가지는 스스로를 보며 다시금 해당 경구를 떠올리곤 했다. K는 이 경구에 걸맞는 사람이었다. 그의 무한긍정주의는 결코 막연한 것이 아니었다.


능선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아래쪽으로 호수가 그려졌다. 석회암 호수였다. 사진으로 본 구채구와 같은 석회암 호수. 다만 물빛이 파랗거나 빨갛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특정 미네랄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만족할만한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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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올 즈음에 내 이마에는 두 대의 대못이 박혀 있었다.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이 이후에 차로 한 곳을 더 갔는데 기억이 없다. 설산을 관망할 수 있다는 어딘가에 또 올랐지만 내게는 그저 북망산일 뿐이었다. 문득 고산병은 저지대로 내려가는 것 외에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스스로 다시 청두로 내려가야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문득 '쓸쓸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으레 어디서든 드는 생각이었다. 한국이었어도 별반 차이없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누구와 함께 하는 것에서 큰 만족감을 느껴본 일이 없다. 특히 또래집단에서 더 크게 드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들에 비해 즐길 줄 몰랐다. 그들이 신나하는 것에 나는 큰 의미를 둘 수 없었다. 언제나, 나는 어떤 현상을 보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느낌과 생각을 되먹임하며 다시 그것을 이미지로 만드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그 풍경 너머의 의미를 찾고 싶어했다.


내가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나는 내 묘비조차도 적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묘비에 들어갈 수 있는 글자는 고작 현상을 묘사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 즐겨야 할 때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배회하며 내게 맞게 재정의할 방법을 찾지 못해 좌절하고 슬퍼하는 것이 이제까지의 내 인생이었다.


우울한 날이었다.


2016/09/12 - [2일차] 9월 3일, CTU-KGT-상목거(上木居)

2016/09/11 - [1일차] 9월 2일, ICN-CTU

2016/09/11 - [prologue] 그렇게 다시 중국으로 갔다


9월 3일 토요일.


이 날의 기억은 그다지 좋지 않다. 우선 호텔에 들어간지 세 시간도 되지 않아 일어나야 했다. 청두부터 첫 목적지인 캉딩까지는 장거리버스로 대략 4시간 이상 소요될 것이었기에, 짧은 기간 동안 압축적으로 시간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빠른 탈것이 필요했다.


캉딩공항으로 떠나는 비행기의 시간은 오전 7시. 쓸데없이 꼼꼼하기로 소문난 중국의 항공보안검색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잔 것인지도 모르게 일어나 다시 공항으로 떠났다. 아직까지는 초반이니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고.


한 시간을 날아 내린 캉딩 공항은 해발 4,300미터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공항이라고 했다.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탈의실과 의무실. 그땐 몰랐지만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올라왔을 때에 겪어야 할 두 가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중국의 4대 화로라 불리는 청두와는 다르게, 캉딩의 기온은 한 자리수로 내려갔다. 짐을 찾고 서둘러 가방에서 후리스를 꺼내 입었다.


공항을 나섰더니 자기 차를 타라는 호객꾼들의 아우성이 빗발친다. 인근의 대도시인 캉딩 현이나 혹은 중간 경유지인 신두차오[新都橋]를 제시했지만, 우리는 설산을 보기 위해 상목거로 가야 했다. 목적지를 말하니 수많은 호객꾼들이 다 떨어져나가고 단 한 명만 남았다. 젊은 청년이었다.


상목거까지의 가격은 편도 1,000위안이 조금 넘었던 것 같다. 대략 20만원 정도 되는 건데, 그는 돌아올 때에 빈 차로 돌아와야 하니 그 정도는 충분히 받을만하다고 주장했다. 이럴 것 같아 한국에서부터 차량을 수배해야 했지만, 나와 L 모두 막판에 서로 바빠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상목거까지는 정규 교통수단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기도 했고, 또 넷이 나누면 어찌되었든 큰 돈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바이두 지도를 꺼내 루트를 보여줬더니 파란 색으로 표시된 비포장도로를 제외하면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분명 이때에 후회했어야 했다.


상목거 까지의 길은 좋지도 않았다. 사실 나는 이때까지 이 곳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독일이나 일본의 도로를 달릴 때처럼 끝없이 펼쳐지는 (한국과는 다른) 풍광이 있지도 않았다. 가끔 티베트인들의 건물이 보이긴 했지만, 우리로 치면 흔히 시골 길가에서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을 쓴 초라한 집 정도라 특별히 무슨 차별성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덩치 때문에 앞에 탄 나로서는 3시간 반을 뜬 눈으로 보내야 했는데 - 그것이 조수석에 탄 자의 의무라 생각하기 때문에 - 이런 사실들 때문에 그 시간은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 지루함도 간선도로까지였다. 지루함은 이내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성도(省道, 우리로 치면 '지방도')에서 갈라져 나와 상목거로 들어가는 길은 모두 비포장 도로였다. 청년의 차는 올해 뽑은 세단이었다. 크기는 우리나라 기준 경차와 준중형차의 사이. 이 차가 비포장 도로를 달린다는건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길이 나빴다 치면 길 가운데의 낙석이 차량의 바닥을 긁었다. 비가 왔는지 진창이 이어졌고, 어떨 때는 차가 나가지 못해 나를 제외한 뒤 셋이 내려야 겨우 지나가는 일도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때 그의 차는 마치 10년 정도 탄 차량 같았다.


우리가 묵은 곳은 상목거의 민가였다. 난방이 되지 않았고, 수압은 낮았으며 따뜻한 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단 한 명도 불평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유일한 여성이었던 J가 몹시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 역시 단 한 마디도 나쁜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 때문에, 나중에 나는 L에게 J의 기특함에 대해 장광하게 말한 바 있다. (물론 이는 비뚤어진 젠더관념의 산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L은 도착하자마자 설산을 볼 수 있는 즈메이야커우[子梅垭口]에 가고 싶어했다. 민가를 운영하던 이가 차편을 알아봐주겠다고 했지만, 구할 수 없어 다음날에야 출발하게 되었다. 그렇게 상목거 민가에서의 조용한 오후가 지나갔다. 민가에서 간단히 차려준 식사는 장족 고유의 음식이었다. 야크 젖으로 끓인 차에서는 시큼하면서도 짭짤한 맛이 났고, 치즈에서는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농후한 맛이 났다. 개인적으로 유제품은 잘 먹지 못했던 지라 골골대며 밀가루 빵만 먹었다. 이때까지도 나는 이곳에 내 휴가를 사용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비가 왔다. 밤새 올 것 같아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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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1 - [1일차] 9월 2일, ICN-CTU

2016/09/11 - [prologue] 그렇게 다시 중국으로 갔다


[1일차] 9월 2일, ICN-CTU

2016. 9. 11. 20:33

9월 2일 금요일.


이 날은 거의 하루종일 서비스 관련 보도자료를 작성했다. 회사에 대언론 창구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이걸 내가 왜 쓰고 있어야 하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튼 뭐 그랬다.


글을 쓰는 건 일이어도 즐겁다. 현상이 나의 언어로 번역되어 타인의 논리구조에 들어가고, 타인이 제대로 이해하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나는 일이다. 여행과는 큰 관계가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진작에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해외영업이니 경영이니 하는 것들에 억지로 관심을 가지며 스스로를 속여왔던 날들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저녁 8시 출발 비행기라, 오후 5시 45분에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인천공항행 직통열차를 타야 했다. 팀장께 양해를 구하고 30분 일찍 회사를 나섰다. 이미 아침에 회사에 오면서 50리터짜리 가방에다 등산화를 신고 간터라 팀장도 어느 정도 짐작을 하셨을거다. 반차를 써도 됐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이것도 내 복이다.


아슬아슬하게 기차를 타고 공항에 가는데 거래처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분명히 9월 첫 주에 휴가가 잡혀 있으니, 급한 건이 있으면 미리 좀 달라고 그렇게 부탁하며 신신당부했건만 이런 식이다. 차주까지 물건을 받아야 하는데 문제가 없겠냐고 묻는다. 노력은 해보겠으나 장담할 수 없다고 했어야 했지만, 또 멍청하게 '문제없도록 하겠다'고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 일을 물려주고 떠난 선임자는 내게,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주지 마세요. 착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라 당부했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본인부터 그렇게 모질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바보같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랬기에 그녀가 참 좋았다. 9개월 정도, 아니 파트를 옮긴 이후니 대략 6개월 정도 밖에 시간을 공유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떠날 때에 매우 아쉬워 했던건 모두 다 그녀의 품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공항에 들어와 라운지로 향했다. 인터넷도 대략 되지 않는 오지로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휴대폰과 간단히 웹 서핑을 하기 위한 LTE라우터 외에는 네트워킹이 가능한 장비를 일체 지참하지 않았다. 짐도 줄여야 했고. 다행히도(?) 회사 업무망은 어디서든 동일한 환경을 제공하도록 가상머신에서 구동되고 있었기에, 라운지 내 컴퓨터에 앉아 간단히 거래처의 급한 부탁을 처리했다. 시간이 없어 미처 다 하지 못한 일은 다른 팀의 선배에게 부탁했다. 사실 응당 부재시에 업무를 처리할 대행자가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회사는 '사람이 적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어서 백업할 사람이 없다. 이건 한 번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다.


탑승시간이 임박하자 여행을 함께 가자고 한 '누군가'에게 어딘지 묻는 전화가 계속 왔다. 라운지에서 일하고 있고, 곧 가겠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바쁜 사람이다. 나와 함께 같은 회사에서 인턴을 했지만, 둘 다 전환이 되지 못했었다. 다행히 그는 다른 회사에 잠깐 다녔다가 결국에는 인턴을 했던 회사에 입사를 했다. 누군가는 그를 부러워 하는 내게 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매일 새벽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한다고 했다. 이번 여행이 무계획에 가깝게 진행된 것도 그의 부재가 컸다. 원래 시작부터 그렇게 하자 - 빡빡하게 계획에 매달리지 말자 - 고 합의하긴 했지만, 내심 그도 나도 두려웠는지 막판에 뭔가를 찾아서 막 던져 놓긴 했었다. 사실 상대적으로나 - 절대적으로나 - 그에 비해 여유가 많았던 내가 그를 도왔어야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짜증 한 번 내지 않은 그에게 고맙다. 집에 돌아와 이렇게 여유있게 여행을 회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공헌이 지대하다. (이런 매우 뻔뻔하게 보이지만 말이다.)


15분 전에 게이트에 갔다. '누군가'와 그의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누군가의 친구를 'K'라고 부를 생각이다. 누군가도 'L'이라 지칭하자.


K의 첫인상은... 글쎄. 그는 까무잡잡하고 자그마한 친구였다. 기억나는건 눈이 선했다. 말씨도 나긋나긋했다. 그리고 열흘의 여행을 마친 후에 나는 K의 팬이 되었다. 그는 여행기간 내내 단 한 번도 찡그린 적이 없다. 여행기간 중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는 그 상황을 좋게 이해하려고 했다. 어떤 사안이 던져졌을 때 먼저 위기로 판단하고 분석부터 하는 나와는 달리 그는 그야말로 '이 역시 지나가리라'며 유연하게 넘는 친구였다. 여행 끝까지 얼굴 붉힐 일이 없을 수 있었던 것은 K의 덕이 컸다.


비행기가 떴다. 지루한 3시간 여가 흘렀다. L과 K 외에 여행을 함께 하기로 한 L의 또다른 친구는 직항편이 아닌 베이징 경유편으로 청두[成都]에 온다고 했다. 원래 J - 이제 그를 J라고 부르자 - 의 비행기는 우리보다 일찍 도착해야 했지만, 중국의 공항이 언제나 그렇듯 연착 때문에 우리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불안했는지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자신이 도착했다는 한 마디를 보내기 위해 하루치의 데이터 무제한 로밍을 신청했다고 했다. 중국 국적기가 발착하는 제2터미널 게이트에 갔는데 까만 치마를 입고 손에 롯데면세점 봉투를 든 자그마한 아가씨가 사뭇 초조하게 서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저 사람이 아니냐고 L에게 물으려는 찰나, 그 아가씨가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그가 J였다.


J의 첫인상은, 솔직히 말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 순간의 기억이 모두 날아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유독 이성에 대해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하는 내 자질의 부족함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그는 어른스러웠다. 그리고 열흘 동안 나는 그 어른스러움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 J에 대해서는 첫인상을 논하는 것보다 열흘 동안 내가 그를 보며 느꼈던 것들을 쓰는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L과 K, J 모두 배울게 많았다. 공자께서 이르시듯 삼인행이면 필유아사다. [子曰三人行必有我師焉] 삼인 중 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부터 배우라는 뜻이지만, 이 셋은 모두 선한 스승이었다. 아무 목적도 없이 떠난 여행에서 행복하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 한편으로는 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해서 되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 이 셋의 덕이 컸다.


다음날 일정을 위해 호텔에 들어가 새우잠을 청했다. 이제 정말 내일부터 긴 여정이 시작될 것이었다. 청두의 고도는 487미터였다.


2016:09:03 09:03:12


2016/09/11 - [prologue] 그렇게 다시 중국으로 갔다


첫 직장에서 맞는 첫 리프레시 휴가 - 회사는 여름에 편중되어 사용되는 '여름휴가'를 없애고 대신 '리프레시 휴가'로 이름을 바꾸어 연중 어느때나 사용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 를 결정한 것은 7월이었다. 나는 당시 도무지 생각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 회사를 떠나기 일보직전이었다. 한편으로는 그 괴로운 일상을 대차하고자 다짜고짜 응했던 소개팅에서도 차여 몹시 죽고 싶은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쓰고보니 전후관계가 다소 비틀어졌지만) 보다 못한 '누군가'가 내게 같이 여행을 가자고 했다. '리프레시'를 위해서. 그 누군가는 좋은 데 가서 쉬는 것도 좋지만, 한 살이라도 더 늙기 전에 '고생하는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도 동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스스로를 더 저 나락의 끝으로 내동이쳐 버리는 특유의 변태적인 감성 덕분이었던 것 같다. 어디 한 번 당해보라는 심산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그것에서 살아남으면 상처를 안고 계속 살아가라는 식으로.


처음에 쓰촨[四川]성 지우짜이거우[九寨沟]에서 시작되었던 여행지는 이내 마오타이 주(酒)의 고향인 꿰이저우[貴州]로 옮아갔다가 다시 '동티베트'으로 일컬어지는 쓰촨 성 서부[각주:1]로 고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의 지인 둘이 합류하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를 무척 신뢰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내 여정의 일부에 들어오는 것에 큰 의심을 하거나 거절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신뢰하는 둘이라면 나 역시 그들을 신뢰하고 좋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후에 계속 이야기 할 것이다.


휴가 결재를 받고 어디 가느냐고 묻는 팀장에게 '중국 산악 지방에 고생하러 간다'고 말했고, 팀원들은 대체 왜 리프레시를 고생하러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젊으니 사서 고생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한국사회에 최적화된 바른 정답을 말했고 그 누구도 그것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 여행의 시작이 이런 어두운 심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물론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다시 중국으로 갔다.


Panasonic | DMC-LX100 | Normal program | Pattern | 1/1000sec | F/5.6 | -0.66 EV | 10.9mm | ISO-200 | Off Compulsory | 2016:09:08 17:23:49


  1. 티베트의 상징인 라싸가 위치한 시짱 자치구 외에도 인근의 칭하이 성, 쓰촨 성 등지에도 티베트인('짱족')의 자치주들이 위치하고 있다. 실제 토번제국이 강성했던 시절에는 당을 무척이나 괴롭혔고, 이때에 현재 칭하이 성과 쓰촨 성 일부를 국경으로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강제복속 과정에서 기존 티베트 지역의 서부는 시짱 자치구로 갈리고, 동부는 각각 칭하이 성과 쓰촨 성으로 편입되었으므로 이 쪽을 '동티베트'라 칭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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