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記/2015

기술과 정치 - 감시사회의 한 켠에서

클라시커 2015. 8. 25. 14:15

이케아에 가던 길이었다. 신호를 기다리느라 광명역 앞 사거리에 서 있는데 옆 차가 계속 슬금슬금 앞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신호위반을 하려던 모양이다. 때마침 신호가 바뀌어 그 차와 같은 방향으로 한 블록을 더 가게 되었다. 이번에도 빨간불. 삼거리에 통행하는 차가 없던 것을 본 그 차는 결국 신호를 위반하고 좌회전을 했다. 한 번이라면 모를까, 아까도 신호위반을 하려던 것을 본 터라 운전습관이 고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사람에게 메세지를 보내주고 싶었다. 마침 차 안에 블랙박스가 달려 있었고, 그 차가 내 차 바로 앞에서 신호위반을 했기 때문에 집에 돌아온 후 블랙박스 영상을 편집하여 "스마트 국민제보"에 신고했다.


△ '스마트 국민제보' 앱의 모습. (해당 사진의 저작권은 해당 사진의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사흘이 지난 오늘, 처리가 완료되었다는 연락이 와서 확인해보니 해당차량에게는 꽤 큰 액수의 과태료 및 범칙금과 벌점이 부과될 예정이라고 했다. 결과를 보고나니, 한편으로는 작은 규모로나마 사회정의를 실현했다는 만족감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이라면 저런 당당한 법규위반을 보고 나면 기분만 나쁘고 말 일이었지만, 이제는 차량마다 달려 있는 블랙박스를 이용해 법의 처벌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보복운전이 특정범죄로 지정되어 가중처벌될 수 있었던 것도 블랙박스가 보급되며 가능해진 일이었다.


비단 교통법규 뿐만 아니다. 다른 범죄와 관련해서도 행정부 차원에서 설치한 폐쇄회로 영상 뿐만 아니라, 개인이 각자 설치한 폐쇄회로 영상을 이용해 범죄의 실마리를 찾는 일이 늘어났다. 예전에는 큰 규모의 기업이나 행정부에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폐쇄회로 시스템이 이제는 소규모 업장에서도 사용될 정도로 보급화 되었다. 어디에서든 어떻게든 나의 과거 종적을 복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생활의 영역이 공도에서 사라진 셈이다.


누군가는 이런 의견에 대해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라고 한다. 카카오톡 불법 감청 논란 때에도 그랬다. 카카오톡으로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그만인데, 왜 다들 걱정하느냐는 것이었다.


기술은 중립적이다. 비행물체를 유도하는 기술은 미사일에 실려 전쟁을 하는 데에도 사용되지만, 드론이나 자동차에 달려 무인이동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같은 기술이지만 어떨 때는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되고, 어떨 때는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아직까지 인공지능이 궤도 위에 올라와 있지 않으므로) 그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제어하는 것은 법과 원칙이고, 그 법과 원칙을 합의하여 형성하는 것은 결국 정치의 영역이다. 즉, 결국 기술의 영역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에서 사용된다면 정치의 영역과 만나지 않을 수가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한국 정치는 지나치게 '정치 본래의 영역'에만 골몰하는 느낌이다. 그것도 정치인들 생존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길지 않고, 그렇기에 여전히 원시적인 부분에서 손봐야 할 곳이 많다는 점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누군가는 계속 정치의 영역을 우리의 삶 전반으로 넓히려는 작업을 계속 해야 하고, 그 논지를 지속적으로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폐광 직전까지 온 광산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광산을 캐서 우리의 자산으로 만들어 보는 것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집단은 다름 아닌 진보정당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는 기존의 영역에서 얻을 것도 없고, 동시에 잃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