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행

9월 3일 토요일.


이 날의 기억은 그다지 좋지 않다. 우선 호텔에 들어간지 세 시간도 되지 않아 일어나야 했다. 청두부터 첫 목적지인 캉딩까지는 장거리버스로 대략 4시간 이상 소요될 것이었기에, 짧은 기간 동안 압축적으로 시간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빠른 탈것이 필요했다.


캉딩공항으로 떠나는 비행기의 시간은 오전 7시. 쓸데없이 꼼꼼하기로 소문난 중국의 항공보안검색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잔 것인지도 모르게 일어나 다시 공항으로 떠났다. 아직까지는 초반이니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고.


한 시간을 날아 내린 캉딩 공항은 해발 4,300미터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공항이라고 했다.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탈의실과 의무실. 그땐 몰랐지만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올라왔을 때에 겪어야 할 두 가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중국의 4대 화로라 불리는 청두와는 다르게, 캉딩의 기온은 한 자리수로 내려갔다. 짐을 찾고 서둘러 가방에서 후리스를 꺼내 입었다.


공항을 나섰더니 자기 차를 타라는 호객꾼들의 아우성이 빗발친다. 인근의 대도시인 캉딩 현이나 혹은 중간 경유지인 신두차오[新都橋]를 제시했지만, 우리는 설산을 보기 위해 상목거로 가야 했다. 목적지를 말하니 수많은 호객꾼들이 다 떨어져나가고 단 한 명만 남았다. 젊은 청년이었다.


상목거까지의 가격은 편도 1,000위안이 조금 넘었던 것 같다. 대략 20만원 정도 되는 건데, 그는 돌아올 때에 빈 차로 돌아와야 하니 그 정도는 충분히 받을만하다고 주장했다. 이럴 것 같아 한국에서부터 차량을 수배해야 했지만, 나와 L 모두 막판에 서로 바빠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상목거까지는 정규 교통수단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기도 했고, 또 넷이 나누면 어찌되었든 큰 돈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바이두 지도를 꺼내 루트를 보여줬더니 파란 색으로 표시된 비포장도로를 제외하면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분명 이때에 후회했어야 했다.


상목거 까지의 길은 좋지도 않았다. 사실 나는 이때까지 이 곳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독일이나 일본의 도로를 달릴 때처럼 끝없이 펼쳐지는 (한국과는 다른) 풍광이 있지도 않았다. 가끔 티베트인들의 건물이 보이긴 했지만, 우리로 치면 흔히 시골 길가에서 보이는 슬레이트 지붕을 쓴 초라한 집 정도라 특별히 무슨 차별성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덩치 때문에 앞에 탄 나로서는 3시간 반을 뜬 눈으로 보내야 했는데 - 그것이 조수석에 탄 자의 의무라 생각하기 때문에 - 이런 사실들 때문에 그 시간은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 지루함도 간선도로까지였다. 지루함은 이내 불안함으로 바뀌었다. 성도(省道, 우리로 치면 '지방도')에서 갈라져 나와 상목거로 들어가는 길은 모두 비포장 도로였다. 청년의 차는 올해 뽑은 세단이었다. 크기는 우리나라 기준 경차와 준중형차의 사이. 이 차가 비포장 도로를 달린다는건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금만 길이 나빴다 치면 길 가운데의 낙석이 차량의 바닥을 긁었다. 비가 왔는지 진창이 이어졌고, 어떨 때는 차가 나가지 못해 나를 제외한 뒤 셋이 내려야 겨우 지나가는 일도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때 그의 차는 마치 10년 정도 탄 차량 같았다.


우리가 묵은 곳은 상목거의 민가였다. 난방이 되지 않았고, 수압은 낮았으며 따뜻한 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단 한 명도 불평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유일한 여성이었던 J가 몹시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 역시 단 한 마디도 나쁜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 때문에, 나중에 나는 L에게 J의 기특함에 대해 장광하게 말한 바 있다. (물론 이는 비뚤어진 젠더관념의 산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L은 도착하자마자 설산을 볼 수 있는 즈메이야커우[子梅垭口]에 가고 싶어했다. 민가를 운영하던 이가 차편을 알아봐주겠다고 했지만, 구할 수 없어 다음날에야 출발하게 되었다. 그렇게 상목거 민가에서의 조용한 오후가 지나갔다. 민가에서 간단히 차려준 식사는 장족 고유의 음식이었다. 야크 젖으로 끓인 차에서는 시큼하면서도 짭짤한 맛이 났고, 치즈에서는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농후한 맛이 났다. 개인적으로 유제품은 잘 먹지 못했던 지라 골골대며 밀가루 빵만 먹었다. 이때까지도 나는 이곳에 내 휴가를 사용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비가 왔다. 밤새 올 것 같아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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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1 - [1일차] 9월 2일, ICN-CTU

2016/09/11 - [prologue] 그렇게 다시 중국으로 갔다


[1일차] 9월 2일, ICN-CTU

2016. 9. 11. 20:33

9월 2일 금요일.


이 날은 거의 하루종일 서비스 관련 보도자료를 작성했다. 회사에 대언론 창구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이걸 내가 왜 쓰고 있어야 하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튼 뭐 그랬다.


글을 쓰는 건 일이어도 즐겁다. 현상이 나의 언어로 번역되어 타인의 논리구조에 들어가고, 타인이 제대로 이해하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나는 일이다. 여행과는 큰 관계가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진작에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해외영업이니 경영이니 하는 것들에 억지로 관심을 가지며 스스로를 속여왔던 날들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저녁 8시 출발 비행기라, 오후 5시 45분에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인천공항행 직통열차를 타야 했다. 팀장께 양해를 구하고 30분 일찍 회사를 나섰다. 이미 아침에 회사에 오면서 50리터짜리 가방에다 등산화를 신고 간터라 팀장도 어느 정도 짐작을 하셨을거다. 반차를 써도 됐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이것도 내 복이다.


아슬아슬하게 기차를 타고 공항에 가는데 거래처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분명히 9월 첫 주에 휴가가 잡혀 있으니, 급한 건이 있으면 미리 좀 달라고 그렇게 부탁하며 신신당부했건만 이런 식이다. 차주까지 물건을 받아야 하는데 문제가 없겠냐고 묻는다. 노력은 해보겠으나 장담할 수 없다고 했어야 했지만, 또 멍청하게 '문제없도록 하겠다'고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 일을 물려주고 떠난 선임자는 내게,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주지 마세요. 착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라 당부했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본인부터 그렇게 모질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바보같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랬기에 그녀가 참 좋았다. 9개월 정도, 아니 파트를 옮긴 이후니 대략 6개월 정도 밖에 시간을 공유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떠날 때에 매우 아쉬워 했던건 모두 다 그녀의 품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공항에 들어와 라운지로 향했다. 인터넷도 대략 되지 않는 오지로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휴대폰과 간단히 웹 서핑을 하기 위한 LTE라우터 외에는 네트워킹이 가능한 장비를 일체 지참하지 않았다. 짐도 줄여야 했고. 다행히도(?) 회사 업무망은 어디서든 동일한 환경을 제공하도록 가상머신에서 구동되고 있었기에, 라운지 내 컴퓨터에 앉아 간단히 거래처의 급한 부탁을 처리했다. 시간이 없어 미처 다 하지 못한 일은 다른 팀의 선배에게 부탁했다. 사실 응당 부재시에 업무를 처리할 대행자가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회사는 '사람이 적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어서 백업할 사람이 없다. 이건 한 번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다.


탑승시간이 임박하자 여행을 함께 가자고 한 '누군가'에게 어딘지 묻는 전화가 계속 왔다. 라운지에서 일하고 있고, 곧 가겠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바쁜 사람이다. 나와 함께 같은 회사에서 인턴을 했지만, 둘 다 전환이 되지 못했었다. 다행히 그는 다른 회사에 잠깐 다녔다가 결국에는 인턴을 했던 회사에 입사를 했다. 누군가는 그를 부러워 하는 내게 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강조했다. 매일 새벽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한다고 했다. 이번 여행이 무계획에 가깝게 진행된 것도 그의 부재가 컸다. 원래 시작부터 그렇게 하자 - 빡빡하게 계획에 매달리지 말자 - 고 합의하긴 했지만, 내심 그도 나도 두려웠는지 막판에 뭔가를 찾아서 막 던져 놓긴 했었다. 사실 상대적으로나 - 절대적으로나 - 그에 비해 여유가 많았던 내가 그를 도왔어야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짜증 한 번 내지 않은 그에게 고맙다. 집에 돌아와 이렇게 여유있게 여행을 회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공헌이 지대하다. (이런 매우 뻔뻔하게 보이지만 말이다.)


15분 전에 게이트에 갔다. '누군가'와 그의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누군가의 친구를 'K'라고 부를 생각이다. 누군가도 'L'이라 지칭하자.


K의 첫인상은... 글쎄. 그는 까무잡잡하고 자그마한 친구였다. 기억나는건 눈이 선했다. 말씨도 나긋나긋했다. 그리고 열흘의 여행을 마친 후에 나는 K의 팬이 되었다. 그는 여행기간 내내 단 한 번도 찡그린 적이 없다. 여행기간 중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는 그 상황을 좋게 이해하려고 했다. 어떤 사안이 던져졌을 때 먼저 위기로 판단하고 분석부터 하는 나와는 달리 그는 그야말로 '이 역시 지나가리라'며 유연하게 넘는 친구였다. 여행 끝까지 얼굴 붉힐 일이 없을 수 있었던 것은 K의 덕이 컸다.


비행기가 떴다. 지루한 3시간 여가 흘렀다. L과 K 외에 여행을 함께 하기로 한 L의 또다른 친구는 직항편이 아닌 베이징 경유편으로 청두[成都]에 온다고 했다. 원래 J - 이제 그를 J라고 부르자 - 의 비행기는 우리보다 일찍 도착해야 했지만, 중국의 공항이 언제나 그렇듯 연착 때문에 우리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불안했는지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자신이 도착했다는 한 마디를 보내기 위해 하루치의 데이터 무제한 로밍을 신청했다고 했다. 중국 국적기가 발착하는 제2터미널 게이트에 갔는데 까만 치마를 입고 손에 롯데면세점 봉투를 든 자그마한 아가씨가 사뭇 초조하게 서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저 사람이 아니냐고 L에게 물으려는 찰나, 그 아가씨가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그가 J였다.


J의 첫인상은, 솔직히 말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 순간의 기억이 모두 날아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유독 이성에 대해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하는 내 자질의 부족함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그는 어른스러웠다. 그리고 열흘 동안 나는 그 어른스러움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 J에 대해서는 첫인상을 논하는 것보다 열흘 동안 내가 그를 보며 느꼈던 것들을 쓰는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L과 K, J 모두 배울게 많았다. 공자께서 이르시듯 삼인행이면 필유아사다. [子曰三人行必有我師焉] 삼인 중 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부터 배우라는 뜻이지만, 이 셋은 모두 선한 스승이었다. 아무 목적도 없이 떠난 여행에서 행복하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 한편으로는 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해서 되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 이 셋의 덕이 컸다.


다음날 일정을 위해 호텔에 들어가 새우잠을 청했다. 이제 정말 내일부터 긴 여정이 시작될 것이었다. 청두의 고도는 487미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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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1 - [prologue] 그렇게 다시 중국으로 갔다


첫 직장에서 맞는 첫 리프레시 휴가 - 회사는 여름에 편중되어 사용되는 '여름휴가'를 없애고 대신 '리프레시 휴가'로 이름을 바꾸어 연중 어느때나 사용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 를 결정한 것은 7월이었다. 나는 당시 도무지 생각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 회사를 떠나기 일보직전이었다. 한편으로는 그 괴로운 일상을 대차하고자 다짜고짜 응했던 소개팅에서도 차여 몹시 죽고 싶은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쓰고보니 전후관계가 다소 비틀어졌지만) 보다 못한 '누군가'가 내게 같이 여행을 가자고 했다. '리프레시'를 위해서. 그 누군가는 좋은 데 가서 쉬는 것도 좋지만, 한 살이라도 더 늙기 전에 '고생하는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도 동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우면 어려울 수록 스스로를 더 저 나락의 끝으로 내동이쳐 버리는 특유의 변태적인 감성 덕분이었던 것 같다. 어디 한 번 당해보라는 심산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그것에서 살아남으면 상처를 안고 계속 살아가라는 식으로.


처음에 쓰촨[四川]성 지우짜이거우[九寨沟]에서 시작되었던 여행지는 이내 마오타이 주(酒)의 고향인 꿰이저우[貴州]로 옮아갔다가 다시 '동티베트'으로 일컬어지는 쓰촨 성 서부[각주:1]로 고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의 지인 둘이 합류하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를 무척 신뢰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내 여정의 일부에 들어오는 것에 큰 의심을 하거나 거절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누군가를 신뢰하는 것처럼, 누군가가 신뢰하는 둘이라면 나 역시 그들을 신뢰하고 좋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후에 계속 이야기 할 것이다.


휴가 결재를 받고 어디 가느냐고 묻는 팀장에게 '중국 산악 지방에 고생하러 간다'고 말했고, 팀원들은 대체 왜 리프레시를 고생하러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젊으니 사서 고생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한국사회에 최적화된 바른 정답을 말했고 그 누구도 그것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 여행의 시작이 이런 어두운 심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물론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다시 중국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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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티베트의 상징인 라싸가 위치한 시짱 자치구 외에도 인근의 칭하이 성, 쓰촨 성 등지에도 티베트인('짱족')의 자치주들이 위치하고 있다. 실제 토번제국이 강성했던 시절에는 당을 무척이나 괴롭혔고, 이때에 현재 칭하이 성과 쓰촨 성 일부를 국경으로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강제복속 과정에서 기존 티베트 지역의 서부는 시짱 자치구로 갈리고, 동부는 각각 칭하이 성과 쓰촨 성으로 편입되었으므로 이 쪽을 '동티베트'라 칭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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