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한나라당과 민주당이라는 거대 양당이 무려 ‘정치개혁’을 하겠다며 아깝게 진[惜敗] 사람들에게 의석을 주는 제도(석패율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각자의 정치적 영유권인 영남과 호남에서 자리를 나눠먹는 것만으로 어떻게 ‘지역구도 타파’가 될 수 있다는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으며, 동시에 마땅히 정치적 파트너로 삼아야 할 다른 정당들은 배제한 채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유리한 제도를 도입하겠다는 움직임이 어떠한 의미에서 ‘정치개혁’이 될 수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석패율 제도는 정책 선거보다는 인물 중심의 선거 풍토를 강화할 뿐더러, 이와 맞물려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인 금권 선거와 공천권자 중심의 정치 풍토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돈봉투 파문으로 공천권자 중심, 인물 중심의 풍토가 얼마나 구태스러운지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또한 석패율 제도는 지역에서 이미 한 번 유권자들에 의해 심판받아 낙선한 후보자를 정당이 억지로 당선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선거 결과가 유권자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고, 기득권을 가진 정당의 의사에 좌지우지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라면 대체 유권자들은 무슨 낙으로 선거에 참여해야 하는 걸까요? 실제로 석패율 제도를 먼저 도입한 일본 중의원 선거의 투표율은 선거가 거듭될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두 거대 정당이 ‘정치개혁’의 기치를 들고 선거제도를 손보겠다면, 유권자들의 의사가 최대한 반영될 수 있는 선거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해답은 이미 있습니다.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의 도입과 비례대표 의석수의 확대가 그것입니다.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현존하는 선거제도 중 유권자의 의사를 가장 잘 반영하는 제도입니다.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하에서 치러지는 선거에서는 무수히 발생하는 사표로 인해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는 유권자의 수가 현재보다 크게 줄어들 수 있습니다. 승자 독식의 독선적 구조가 판치는 현행 다수대표제를 채택한 나라들보다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나라들의 평균 투표율이 높다는 사실은 이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나라들에서 여성, 장애인, 성적 소수자, 소수 인종 등 사회적 소수자들의 원내 진입이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어떻습니까,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이쯤이면 국내 도입이 시급하지 않겠습니까?




  9월 18일 정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들여 준비했던 '민주주의 2.0'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노 전 대통령이 '노공이산'이란 필명으로 올린 환영사 겸 감사인사에서도 읽을 수 있듯, '민주주의 2.0'은 개방과 공유를 원칙으로 하는 웹 2.0 정신을 정치토론에도 적용시켜보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전 대통령의 이러한 행보는 수많은 이해당사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데일리 서프라이즈 정치부 차장의 말[각주:1] 마따나, 그동안의 전임 대통령들이 '청빈한 29만원',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등의 발언으로 도움은 커녕 물의만 일으켰던 것을 생각하면 민주주의의 핵심적 요소인 다양성을, 토론을 통해 제고해 보자는 그의 이번 행보는 새롭다.

  이러한 '새로움'에 대해 그의 이해관계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5년 내내 갈등을 빚어왔던 현 집권당은 우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MB의 지지율이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에서, 역지지를 받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번 움직임이 자칫 정계변혁의 신호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사실여부를 떠나 '노무현 정권의 비판적 지지세력'이란 평을 들었던 한겨레 신문은 이번 일에 대해 신중론을 폈다가 조중동과 같은 편에 몰리고 말았다.[각주:2] 촛불정국에서 '집단지성'의 현실적 사례로 주목을 받았던 아고라 역시, 민주주의 2.0의 바람을 피하지는 못했다. 아고라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민주주의 2.0으로 옮기겠다며 아고라를 털고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의도치 않았지만, 민주주의 2.0과 아고라의 세 대결 양상도 벌어지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수성론(守城論)과 외연확대론으로 볼 수 있다. 촛불정국에서 '토론의 성지'란 칭호를 얻은 아고라를 이어가자는 쪽이 수성론이라면, 더 나은 시스템을 자랑하는 민주주의 2.0으로 옮기자는 것이 외연확대론이다. 엄밀히 말해, 원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외연확대론이 더 타당성이 있다. 진보란 것의 속성상, 단결보다는 연대[각주:3]가 더 적성에 맞을 뿐더러 '조-중-동-문'이라는 강력한 여론생산 기제를 가지고 있는, 현 정권을 위시한 수구 세력에 효율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비수구 세력' 역시 다양한 미디어 루트를 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발적 투쟁'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아고라는 이제 이빠진 범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아고라를 지배하는 사고는 '내 편, 네 편'의 사고다. 요즘 유행하는 말대로, 거리에 나선 시민들 간에는 '총론은 같으나 각론은 약간씩 다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고라는 '애국과 매국'의 프레임으로 나와 타인을 규정하고 있다. 이런 압제 속에서 민주적 다양성이란 숨을 쉴 수가 없다. MB의 대부분의 실정에 실망감을 표하는 사람일지라도, 일부의 정책에 옳다는 이야기를 하면 바로 알바로 낙인찍히는 일마저 벌어지고 있다. 경제방에서 활동하던 한 논객이 단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가상의 집단 린치를 당한 사례도 있었다. 이 '명쾌한' 프레임은 각각이 지닌 고유의 속성을 은폐하고 사실을 왜곡해서 우리를 눈멀게 한다. 이런 '명쾌함'이 가져온 왜곡의 사례는 바로 IT과학 방에서 베스트로 올라가고 있는 황우석 박사 관련 게시물들이다. 한 시점, 한 공간에 PD수첩으로 흥한 자와 PD수첩으로 망한 자가 공존하고 있는 이 웃지못할 현상은 황우석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가 설정한 '애국'의 프레임 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아고라 일부의 애국주의, 전체주의 분위기 속에서는 촛불집회건 황우석이건 그저 한일전 축구경기로 치환해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 2.0이 아고라의 대안인 것은 아니다. 물론 개략적으로 바라본 민주주의 2.0은 아고라에 비해 보다 순도높고 심도깊은 토론을 진행할 수 있는 곳이다. 현재 아고라의 운영을 맡고 있는 다음과 같이 종합포털이 아니라, 오로지 토론만을 위해 조성된 장소라는 점은 그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술집에서 친구들과 하는 난상토론과 100분토론의 진행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더욱이 민주주의 2.0은 덧글보다 게시글을 좋아하는 시스템이다. 각각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글에 '발제', '의견', '질문', '답변', '보론'의 말머리를 붙여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더욱 명확하게 다른 시민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늘 하드웨어가 좋다고 해서 시스템이 좋은 것은 아니다. 아고라에 비해 민주주의 2.0에 없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성'이다. 현재 민주주의 2.0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수의 논객들은 지난 정권에 꽤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지난 20일에 지면에 등장한 한겨레의 사설, '전직 대통령의 토론 웹사이트 개설 유감'에 대한 두 사이트의 반응을 보면 이러한 '낭설'이 근거없지만은 않아보인다. 아고라가 이 사설에 대한 반응 이외에도 여전히 촛불집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반면, 민주주의 2.0은 이 사설에 대한 게시글들로 채워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 2.0은 이 사설에 대해 '편향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물론 한겨레의 논설이 사실에 맞지 않다면 반드시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 2.0을 차지하고 있는 게시글들에서는 비판보다 성토의 소리가 더 많이 들린다. 한겨레의 '신중하자'는 의견에 '조중동과 같다'라는 반응을 보인다든지, '한겨레는 무능하니 닥치고 폐간해라', '한겨레 끊겠다'라는 식의 게시글이 올라오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환영사에서 밝힌 '자유로운 대화, 깊이있는 대화'와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오히려 '너와 나는 생각이 다르니 너를 배척하겠다'는 요지의 이러한 발언들은 '나는 너희가 시끄러우니 담 쌓겠다'는 MB의 명박산성에 깔린 논리에 더 가깝지 않은가. 더욱이 이들 중 상당수가 엊그제까지는 '한겨레, 경향=우리편=만세!'를 외쳤던 사람들임을 감안하면, 하루아침에 '언론의 중립성' 운운하는 그들이 우스워보이기도 한다.[각주:4]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누가봐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고, 이를 보고 마치 노무현 씨가 북유럽식 사민주의의 대변자인양 추앙받는 그로테스크한 현실이 민주주의 2.0에서는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그저 노무현이라는 개인에 매몰되어 앞뒤 정황과 팩트를 살펴보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터가 현재 민주주의 2.0의 수준이다. 이러한 '노무현 프레임'을 떨쳐낼 때야 말로 민주주의 2.0이 아고라의 경쟁자로 등장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 전까진, 지금 대문에 붙어있는 대로 어디까지나 베타(beta)일 것이다.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새로운 '진보 포털'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시민들이 활동하고 있는 '아고라' 역시 자본에 종속된 '다음'의 소유물인 만큼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는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자본을 통해 모든 것이 재단되는 현실에서 그러한 걱정은 타당하다. 그러나 기왕이면 갈려나갈 생각보다는 현재 있는 것을 정상화한 이후에 차선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현재 있는 것을 일종의 훈련장으로 삼아 더 많은 논객들을 키워낸 후에 진보포털의 번영을 생각해도 늦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욕 먹을 각오를 하고 쓰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내가 본 대로 이야기했을 뿐이고, 내 사상의 자유에 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 중 틀린 것들에 대한 지적을 바란다. 예컨대, 민주주의 2.0에 하얀설원님이 올리신 '당신은 아고라를 욕할 자격이 있는가?'란 글은 아고라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 일변도였던 내 생각을 조금이나마 수정해 주었다. 논리에는 논리로 맞서고, 원칙은 준수하자. 이것이 우리가 소위 '알밥'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지점이며, 현재의 정치활동을 통해 우리가 얻어갈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1. 데일리 서프라이즈, 2008년 9월 21일자 기명칼럼, '盧 문제만 나오면 한겨레신문과 한나라당은 같은 편?' [본문으로]
  2. 윗 링크 참조 [본문으로]
  3. 단결이 '올 포 원, 원 포 올(All for One, One for All)'의 군주정적 전체주의를 의미한다면, 연대는 '개개 단체의 의도가 반영된 단합'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4. 여담이지만, 이 현상은 하나의 발제에 가지를 쳐나가는 식의 논의를 통해 제대로 된 토론을 해보자는 민주주의 2.0의 기본설치목적과는 상이한 것이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환영사에서 밝힌 '덧글 놀이식의 토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사례다. 이는 아직까지 논객들이 민주주의 2.0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이 진정한 토론의 방법을 체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geodaran.com 커서 2008.09.22 03:56

    잘 읽었습니다. 아고라의 방향성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방향도 없이 그냥 토론만 할 순 없죠. 너무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문제는 잘 조정해야할 겁니다.

    • Favicon of https://blog.philobiblic.com 클라시커 2008.09.22 09:00 신고

      제도권 내 학자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던 아고라답게 현명하게 현 위기를 대처해 나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나서서 조정하는 것보단, 시민들이 알아서 방향성을 설정해 주어야겠지요...

  2. 페일 2008.09.22 05:59

    저도 요즘 계속 생각하는 것과 거의 같은 논조의 글이군요 요즘 들어 확실히 알바로 보이는 증거가 명백한 사람들이 게시물을 조장하는게 보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아고라인 스스로 편가르고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부정하는 일이 자주 눈에 띄는듯 하더군요 참 안타까운일입니다.
    저도 민주주의 2.0 으로 가려고했는데 그곳은 글을 보고 쓰는게 아직 조잡한듯해서 활동은 안하고 있는..

    • Favicon of https://blog.philobiblic.com 클라시커 2008.09.22 09:02 신고

      확실히 아직까진 민주주의 2.0은 베타의 수준입니다. 하지만 그 체계성은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3. Favicon of http://blog.daum.net/ligase ^^ 2008.09.22 08:16

    민주주의 2.0의 경우 초반 시행 착오를 거쳐 몇번의 교통정리가 있을 듯 합니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일단 기대를 해 봅니다.
    최소한 그곳에서 '좌빨', '좀비' 어쩌는 사람들은 없었으면 하네요.

    • Favicon of https://blog.philobiblic.com 클라시커 2008.09.22 10:21 신고

      아직까진 '베타'니까요. 민주주의 2.0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운영한다는 상징성 때문에 아마 아고라보다 더 알밥들의 타겟이 될 겁니다. 민주주의 2.0이 아고라와 같은 알밥들의 분탕질을 피하려면, 스스로가 우선 '어려워져야' 할 겁니다.

  4. Favicon of https://nooegoch.tistory.com nooe 2008.09.22 11:02 신고

    안녕하세요.
    민주주의 2.0에 누가 핸드폰 없어도 가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글 하나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ㅠ.ㅠ 글을 남길 수가 없어요.

    • Favicon of https://blog.philobiblic.com 클라시커 2008.09.22 11:05 신고

      아, 손전화가 없으면 가입이 안되는 모양이군요. 아마도 프로그램을 이용한 알밥들의 악성댓글을 막아보고자 하는 취지에서 그러는 것 같은데... 목적은 옳지만 방법론은 그닥이군요.

  5. 장재혁 2008.09.22 14:57

    손전화가 없으면 집으로 확인전화라도 달라고 해야겠네요 ^^;;; 일단은 알바들의 가입을 제한하는 방법으로 손전화를 쓰는 모양인데, 아직 체계도 그렇고 버그도 많아서 이런 문제에 당장 손이 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던데요? 어느정도 안정화가 될때쯤 문의를 해보시는게 어떨까 하네요.

    • Favicon of https://blog.philobiblic.com 클라시커 2008.09.22 20:28 신고

      사실상 개인인증을 받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진보적 관점에서보면 나의 개인정보를 쓸데없이 요구하는 행위죠. 난수추출 후 그것을 입력해달라는 식으로 '머신'의 가입을 제한하는 방법도 있을텐데, 굳이 손전화 인증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지 궁금하네요. ㅎ.

  짧은 일생 동안 나는 당적을 두 번이나 바꾼 사람이다. 열린우리당에서 민주노동당, 그리고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으로. 열린우리당에서 민주노동당으로 당적을 바꾼 이유는, 열린우리당이 내가 생각한 것만큼 진보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왜 진보신당이 현재의 한국 상황에 가장 적합한 대안정당인지를 밝히는 내용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전에 왜 내가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을 버렸는지에 대해서 부족하나마 썰을 풀어본다.

  열린우리당의 창당 당시, 나는 그 당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거리에서 민주화와 사회주의적 변화를 부르짖었던 사람들이 구성원의 절대 다수였으며, 지역정당이 아니라 전국정당을 목표로 하였고, 무엇보다도 나름대로 '개혁성 짙은' 노무현이 속한 '여당'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당시에 민주노동당이 아닌 열린우리당을 선택한 까닭은 그들이 '여당'이었던 탓이 큰 것 같다. 적어도 밤낮 시장만능주의만을 고수하는 외곬 한나라당보다는 약간은 개량주의적이더라도 더욱 서민들에게 다가가는 정책을 내놓는 '거대 정당'이 나에게는 현실성 있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매판자본주의의 한나라당과 지역주의와 1인 보스정치의 민주당의 대안이 되지 못했다. 국보법 개정 실패나 사학법 재개정 용인,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들에 대한 기대 - 동시에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기대 - 를 아주 저버리게 된 한-미 FTA의 추진은 진중권 교수의 말마따나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하는 열린우리당의 양두구육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책면에서만 아니라 당의 운영과정에서도 점차 내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많았다. 여당 말고도 내가 열린우리당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그들의 '정치실험' 때문이었다. 기존의 정당이 고수하고 있던 하향식 운영제도를 철폐하고 당비를 6개월 이상 낸 진성당원들에게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대의원들 만큼이나 강력한 참여기회를 주어 하향식 운영체제를 확립하겠다던 그들의 기획 때문이었다. 사실 그것이 미친 영향력은 꽤 신선했다. 거대 정당으로는 처음으로 관료제적 정당운영의 핵심인 지구당을 폐지 - 물론 나중에 부활된 걸로 안다만... - 한다거나 하는 행위는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당비를 납입하고 6개월이 지나 진성당원의 지위를 얻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내게 주어진 건 별로 없었다. 여전히 중요한 정책들은 국회의원들이 결정하고 있었고, 당원들의 역할은 그저 지지 후보에 대한 거수기 역할이었다.

  순진했던 나는 여기서 현실을 직시하고 민주노동당으로 발길을 냉큼 돌렸다. 지나치게 격한 구호나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구좌파 - 물론 나는 작금의 신좌파vs구좌파 논란에서 구좌파를 지지한다. 적어도 뉴라이트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신좌파보다는 구좌파가 좌파라는 이념의 본질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구좌파가 이대로 좋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 들로 가득찬 동네였지만, 적어도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과 같은 두 보수정당보다는 서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민노당의 부유세 과세 추진이나 주요 생산수단의 국공유화는 비록 그것이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해 현실성이 없다는 세간의 평가에도 언젠가는 꼭 필요한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선택도 나이브했다. 앞서 말한 민주노동당에는 '구좌파'의 비율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당게에서는 연일 전체주의적이고 파쇼적인 냄새가 강하게 나는 글들이 넘쳐났다. 게다가 지난 대선 당시, 대선후보를 뽑기위한 경선과정에서 '더 이상' 참신하지 않은 권영길이 소위 NL들의 압도적 지지로 심상정을 밀어내고 선정되었다. 솔직히 민주노동당의 당선가능성을 낮게 보는 나로서는, 민노당에게는 참신함만이 살 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참신한 얼굴이 대선판에 나와 민노당의 현실에 대한 진단과 그 해법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 소위 말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권영길은 그가 이전에 나왔던 두 번의 대선에서 했던 이야기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 NL들의 희망인 '코리아 민주연방국'이라는, 그야말로 민노당이 친북정당임을 자인하는 공약을 들고 나왔다. 사회주의적 성향을 갈망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을 찬양하지는 않는 소심한 사민주의자인 나로서는 이 상황을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일이 났다. 권영길 후보의 대선 패배 이후에 설치된 비대위에서 민노당의 마케팅 전략 수정 과정에서 마찰이 빚어진 것이다. 앞서도 말했고, 지금도 느끼는 거지만 가끔은 대중의 호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구부릴 필요가 있다. 대중이 생각하는 마지노선과 우리가 생각하는 마지노선 간에 상당한 격차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대중을 이끌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마지노선 근처에 그들의 마지노선을 가져다 놓을 수 있느냐는 건데, 현실적으로 단기간에 그렇게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기에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이 급박하게 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꺼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정당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가끔 가식적으로나마 우리의 마지노선을 뒤로 후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민노당의 다수를 차지하는 NL은 이런 전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이 물론 한국전쟁 이후 남북 관계가 가장 급진전한 시기이긴 하지만, 여전히 대중 중 다수는 북한이 우리와 다른 '남'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나마 가지고 있어 단박에 하나로 융합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NL은 그런 한계를 무조건적으로 대중의 부족함으로 몰았다. 이를테면, 우리는 늘 옳은데 니들이 부족해서 우리를 이해 못한다는 식이었다. 내가 가장 혐오하면서도 동조하는 구좌파적 엘리뜨주의였다. 그들의 이러한 판단은 진작부터 민주노동당이 서민과 괴리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80년대의 운동권들이나 이해할만한 용어들이 당 논평에서 남발된다든지, 때지난 주체사상이 여전히 당 내에서 씨알이 먹힌다든지 하는 모습은 실제로 유약한 서민들이 민주노동당에 섣부르게 발을 디디기 힘든 상태로 당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미래를 부르짖어야 할 진보가 여전히 그들이 잘나가던 20년 전의 틀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에 터진 집단탈당 사태는 나로 하여금 또다시 탈당하게 만들었다.

  2월 탈당 이후 나는 당적을 갖지 않았다. 사실 당 활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박한 내 지갑사정이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지원하는 당비를 낼 여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총선 전 진보신당이 창당되었을 때에도 나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뭔가 다르긴 하겠지만 여전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가 진보신당에 가입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총선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무척 '의미있는 패배'였지만, 여튼 새로운 진보를 이끌어보겠다던 그들이 다시 '구닥다리 진보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세 번째로 당원가입서를 썼다. 민노당때보다 당비도 두배로 내고, 특별당비도 냈다. 나같은 사람을 가리켜 창당때부터 함께한 당원들은 '지못미 당원'이라 불렀다.

  그렇게 들어온 진보신당의 세계는 가히 신세계였다. 왜 신세계였을까. 나는 이에 대해 다음번 포스팅에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 Favicon of https://youth.sisain.co.kr 겨울녹두 2008.06.15 01:19 신고

    민주노동당도 지금 혁신을 위해 뜁니다. 다만 진정추와 98 국민승리21 이후 2004총선을 거치면서 비대해진 당 조직, 관료화 패권화 되어 당파 논리에 휘둘리는것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진보신당으로 건나가신 분들의 우려와 걱정 좌절도 모두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변화가 없는것이 아니라 느린것이지요. 그런 부분에서 진보신당으로 건너가신 분들께는 섭섭한 부분이 많습니다만 그분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진보신당이 진보정치에 대한 거부감을 갖던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총선에서 당당히 공당으로 인정받는 것을 보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사실 민노당을 탈당하지 못하는 것도 그 반성에 대한 책임으로 쉽게 떠날수가 없어서 입니다. 저도 당의 일원으로서 일정부분 책임이 있기때문에 무작정 떠난다는 것이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할수는 없기 때문이죠... 아무튼 진보신당이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Favicon of https://gonghyun.tistory.com 공현 2008.06.22 20:45 신고

    한국에서 '뉴라이트' '뉴레프트' 그러면서 구좌파 신좌파 하는 이야기와,
    노동계급 중심성의 문제 등에서 갈리는 구좌파/신좌파의 용어는 다르게 표현해주시오 ~_~

    / 나는 지금도 기억나는 게 네가 책상에 열린우리당 원내제1정당을 축하합니다 라고 낙서한 거에 누군가가 민주노동당 원내입성을 축하합니다 라고 밑에 써놨던 거였나

    • Favicon of https://blog.philobiblic.com 클라시커 2008.06.23 11:13 신고

      ㅋㅋㅋ '민주노동당 원내입성 축하합니다' 그거 누가 써놨을지 짐작은 간다. 구좌파-신좌파 관련해서는... 난 둘 모두를 혼합한 개념으로 쓰고 있구나. 사실 명확하게 구분짓고 있지 못해서리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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