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記/2017

여전히 방황중

클라시커 2017. 1. 28. 02:19

작년 중순에서 말까지, 엄청나게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다. 회사 가기가 끔찍하게 싫었고, 누구도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정말 유치하기가 짝이 없다. 고작 내 편이 없는 것 같다는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했으니까. 하긴 꼭 그 '편'이라는게 사람이라는 법은 없다. 나는 내 마음을 어딘가에 두고 싶었다. 미치도록 지루하게 떠다녀야 하는 상황이 싫었고, 어딘가에 안정적으로 두 발을 디딘 채 서고 싶었다. 연말에는 그럴 일이 좀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줄 알았다.


물론 그건 착각이다. 여전히 멍청하게도, 나는 회사가 나에게 무엇을 많이 해줄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우스꽝스러운 인용이지만, 이 시점에 곱씹어 볼만한 인용이 있다. 바로 케네디의 취임연설 중 '국가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를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십시오'라는 부분[각주:1]이 그것이다. 회사가 나의 목표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내 목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는게 여러모로 더 합리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정말 게으르게도 늘 환경이 나에게 맞게 변화해주기를 바라왔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어떠한 형태로든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목표를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틀을 깨부수기 위한 노력. 아웃사이더로 포지셔닝을 해 놓고, 인사이더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낭비를 계속해 왔지 않았는가 싶다. 대니 콜린스가 자작곡을 부르고 싶었지만 결국 '헬로 베이비 돌'을 부르는 것처럼, 익숙함 - 그리고 '다른 이로부터의 사랑' - 에서 떠나려는게 두려웠던게 아닐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상욱씨도 이제 뭔가 하고 싶은 걸 찾아야 하지 않아요?'라고 물었다.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단편적으로, 회사와 나의 목표를 일치시킬 수 있다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편한 선택이다. 근데 그러기는 싫다. 그러면 다른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 아니면 회사에 끼워맞춰 살 수 있는가?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고 살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고민하길 미뤄도 언젠가는 다시 이 고민을 하게 될 것이라면, 빨리 결정하는게 낫지 않을까?


  1. 사실 나는 케네디가 '국가'를 운운하는 것에 의문이 있었다. 이 사람이 애국주의자일 수는 있어도, 국가주의자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궁금해만 하다가 연설문 전체를 보니, 이 문구 뒤에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하자'는 내용이 덧붙여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래야 내 케네디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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