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記/2008, 유럽

8월 2일, 오스트리아 빈 - 한 잔의 멜랑게에 아쉬움을 달래다

클라시커 2008. 8. 4. 01:33

빈에서의 이틀째, 웜뱃 더 라운지(http://www.wombat.eu)에서의 아침은 상쾌했다. 웜뱃 자체가 워낙 이름난 곳인지라 스탭들의 서비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시설 역시도 수준급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다른데에 비해 가격이 크게 비싸거나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얘네들이 기본적으로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동방예의지국의 쓰잘데기없는 규칙을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사람이 많은데 설마 뻘짓이라도 하겠느냐고 생각하는지 대체적으로 유럽의 도미토리들은 혼성방mixed room을 준다. 물론 민감한 여성들을 위해 여성전용방이 있긴 하다. 남성전용방은 없는데, 그것은 미학적인 관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어쨌거나 아침에 일찌감치 체크인을 해두고 돌아와보니 글쎄, 정원 6명중 나까지 포함해서 4명이 한국인이다. 바티칸, 인터라켄, 프랑스가 요새 거의 한국이라더니 빈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하기사 케른트너 거리나 슈테판 광장에 가보니 한국사람들이 꽤 되긴 하더라니... 어쨌거나 이것도 인연인지라 체크인시에 준 웰컴 드링크 쿠폰을 가지고 바에 내려가 한 잔씩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웜뱃 호스텔은 오전 10시가 체크아웃 시간이다. 다른 데에 비하면 비교적 이르긴 한데, 그런건 서양애들한테나 적용될 뿐 부지런하기 이루말할 데 없는 한국인들에게는 일도 아니다. 가만보면 서양애들은 참 느긋하게 여행한다. 우리네 사람들이 오전에 후딱후딱 짐 챙겨서 한정된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이 보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면, 얘네들은 그냥 시간 되는 대로 움직인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때 아니면 언제 보겠어’란 급박함에 시달릴 때, ‘이번에 못 보면 다음에 또 오지, 뭐’란 여유로운 생각을 갖는 애들이 서양애들 - 특히나 유럽애들 - 인 것 같다. 현실적으로 보면,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우리가 걔네들보다 불리할 수 밖에 없는 게 사실 아닌가. 얘네들이야 주말에 기차 좀 길게 타면 이런저런 데 가볼 수 있지만, 우리는 방학기간이나 휴가기간에 작정을 하고 나서야 한다. 미국애들만 하더라도 이지젯과 같은 저가항공이 쉴새없이 두 대륙을 넘나들고 있어 비교적 쉽고 저렴하게 유럽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지만, 우리는 비싼 돈을 내고 오든지 아니면 타국의 공항에서 수시간을 기다리는 고생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눈에 불을 켜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한국분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서둘러 짐을 꾸려 호스텔을 나섰다. 짐을 맡겨둘 수도 있지만, 어차피 저녁에 프라하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선 남역Südbahnhof으로 가야했기 때문에[각주:1] 그냥 챙겨 나와 코인라커[각주:2]에 맡기기로 했다. 서역 앞에서 18번 트램을 타고, 남역에 내리니 시간은 930. 빈의 박물관들이 대체적으로 10시에 문을 열기 때문에, 가까이 있는 벨베데레 궁전에서 시작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벨베데레 궁전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이 궁전이 유명관광지가 된 것은 예쁜 정원 탓도 있긴 하지만, 다 ‘키스’ 탓이다.


  실제로 본 ‘키스’는 생각보다 크고 아름다웠다. 많은 사람들이 명화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가 실제로 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루브르가 소장한 모나리자가 그런데, 생각보다 작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피치가 소장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도 그러한 경우인데, 생각보다 작고 어두침침해서 - 사실 이건 색감이 어두침침하다기 보다, 우피치 미술관의 조명 자체가 어두침침하다 - 실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그런데 ‘키스’는 꽤 크다. 내가 미술에는 문외한인지라, ‘몇 호[각주:3]짜리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얼추 워홀의 ‘권총’ 연작과 크기가 비슷하거나 아니면 그것보다 작다. 게다가 두 연인이 입은 금박 의상은 어찌나 화려하던지, 클림트 특유의 그 몽환적이고 에로틱한 표정과 어우러져 일종의 황홀경을 자아냈다.


  ‘키스’의 옆에는 ‘유디트’가 있었다. 바티칸 박물관에서 이미 다른 작가들의 ‘유디트’ 그림을 몇 번 보았는데, 클림트의 ‘유디트’는 어쩜 이렇게 색기가 철철 흘러넘치는지. 이 정도의 관능미라면 수백 번이고 적장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켜낼 수 있을 것만 같더라.




  벨베데레 궁전에서 나와서는 레오폴드 미술관으로 향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이번 여행의 주목표는 ‘미술관 섭렵’이 되어버렸다. 유럽 3대 미술관 중 이미 두 개의 미술관(영국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와 이딸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은 섬렵한 상태고,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 뮌헨의 모던 피나코텍과 같은 떠오르는 미술관들도 이미 다녀온 상태다. 아쉬운 게 있다면, 이전 중인 사치 갤러리를 가보지 못했다는 것? 데미언의 상어와 조우를 했어야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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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거나, 몇 군데를 다니다보면 반복되는 컬렉션이 눈에 띄게 된다. 고전 미술계를 대표하는 카라바지오, 귀도 레니, 렘브란트, 라파엘로, 다 빈치, 보티첼리는 물론이거니와 근대 미술계의 거장들인 모네, 마네, 뭉크, 르누아르의 컬렉션은 각 국 내지는 각 도시의 내로라 하는 미술관은 거의 한 점 이상씩 보유하고 있다. 물론 좋은 화가의 그림은 자꾸 볼 수록 좋다. 딱히 미술공부를 하지 않아도 일단 많이 보면, 각 화가의 화풍을 익힐 수 있게 되고 설명판을 보기 이전에 멀리서부터 저 그림이 어떤 화가의 그림인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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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베데레 궁전을 나와서는 레오폴드 미술관으로 향했다. 벨베데레 궁전이 클림트의 컬렉션으로 유명하다면, 레오폴드 미술관은 에곤 쉴레의 컬렉션으로 유명하다. 28살로 유명을 달리한, 그야말로 '가인박명'이란 말을 실감케 하는 사람이다. 비가 많이 와서 사진은 없다.


  다음으로는 훈데르트 바서가 설계한 훈데르트 바서 하우스를 방문했다. 반문명주의자로서, 직선을 거부하는 경향을 띤 그는 '이상적인 주거공간'을 설계해 달라는 빈 시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어린이 놀이터와 윈터가든과 같은 공공공간을 지닌 이 곳을 설계했다. 그의 소신답게 그는 각 주거공간은 일반 공공주택처럼 직육면체의 형태를 만든 것이 아니라, 계단이나 복도에서도 직선을 찾아볼 수 없고 창틀도 다 다르게 생겼을 정도로 다양한 공간을 창조해냈다. 바르셀로나에 가우디가 있다면, 빈에는 훈데르트바서가 있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건축가라 한다.


"혼자 꾸는 꿈은 몽상에 지나지 않지만, 함께 꾸는 꿈은 또 다른 현실의 시작이다." - 훈데르트 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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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웜뱃 더 라운지는 서역Westbahnhof 근처에 있다. [본문으로]
  2. 남역의 경우에는 24시간에 2(작은 칸), €3.5(큰 칸) [본문으로]
  3. 엽서 한 장의 크기를 기준으로 그림의 크기를 표현하는 단위. 대다수의 그림들이 ‘호 당 얼마’ 이런 식으로 팔려나간다. 고기로 치면, ‘근’ 정도 되려나?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