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記/2008, 유럽

8월 15일, 프랑스 베르사유 · 파리 - 8월 16일, 프랑스 보르도

클라시커 2008. 8. 17. 18:08
  8월 16일의 베르사유 궁전, 몽마르트르 언덕 방문기와 8월 17일의 보르도 메독 지방 와인투어 후기를 함께 올립니다.



- 8월 15일, 혁명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공간


  눈을 떠 보니, 날씨가 별로다. 베르사유 궁 가기로 해서리 날씨가 좋아야 하는데... 베르사유 궁은 궁전 구경도 재밌지만, 정원 구경이 핵심이기 때문에 날씨가 좋아야 한다. 어쨌거나 아침을 먹고 서둘로 RER C 선을 타러 나갔다. 현재 오스테를리츠 역부터 오르세 역까지의 구간이 공사중이다. 때문에 오스테를리츠 역에서 베르사유로 막바로 갈 수는 없고, 파리 교통국 측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앵발리드까지 이동해서야 갈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앵발리드 역에서 표를 사기 위해 장사진이 펼쳐지고 있는 바, 유레일 패스 소지자라면 그냥 곱게 오스테를리츠 역의 RER 매표소에서 표를 받고 버스를 탄 후 앵발리드 역으로 가서 타고 베르사유로 가길 추천해 본다.


  30분 쯤 기차를 타고 가니 오늘의 목적지 베르사유 리브 고슈 역이 나온다.[각주:1] 큰 길을 따라 걷다보면, 심상치 않은 가로수들이 질서정연하게 심어져 있는 길을 만나는 데 그 곳이 바로 베르사유 궁으로 들어가는 초입길이다. 들어가다 보면, 티켓 자동 판매기가 있는데 그것은 궁 내부로 들어가기 위한 티켓을 판매하는 곳이다. 뮤지엄 패스 소지자는 A 입구로 들어가면 되는데, 휴일에는 그 곳 역시 티켓 소지자들을 위한 창구만큼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참고로 국내 여행객 중 대다수가 뮤지엄 패스의 날짜를 고쳐서 사용하고 있는데, 베르사유를 방문하게 되면 직원이 아주 친절하게 '볼펜으로' 써주니 유념하시고 오시길...

  궁은 패스하고 무조건 정원으로 돌진. 8월 15일이 성모 승천대축일로서 전 유럽의 휴일이기 때문에 정원 입장료를 내야했다. (이 말은 평일에는 안 낸다는 이야기다.) 아름다운 매표원 마드모아젤에게 큰 웃음을 선사한 후 입장. 태양왕의 정원이기 때문일까. 구름도 질서정연하게 관광객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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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는 늪지대 + 사냥터였던 곳을 '자연 역시 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루이 14세의 신념에 따라 일일이 메워 오늘날의 정원을 조성한 곳이라고 한다. 루이 14세가 저런 망발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유럽 대륙을 휨쓸었던 강력한 절대 왕권의 바람때문이었다. 혁명 당시, 왕권신수설의 경제적 뒷받침이 되었던 부르주아들이 앞장서 부르봉 왕가를 타도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기 그지 없다.

  베르사유를 다녀와서는 몽마르뜨르를 올랐다. '원래는 피카소, 르누아르, 로뜨렉, 고흐 등이 모였던 예술가들의 언덕이었지만 지금은 돈벌이에 급급한 예술가들과 물랭 루즈와 같은 환락가가 즐비한 곳으로 타락했다.'고 가이드북에 써 있다. '돈벌이에 급급한 미술가'가 타락했다는 표현은 공감이 가긴 하지만, 글쎄... 예술만 해서는 먹고 살기 힘든 자본주의 체제에서 타락하지 않고 대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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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6일, 보르도

  전날의 여독이 풀리기도 전에 새벽부터 일어나 보르도 행 떼제베에 몸을 실었다. 보르도는 시속 300km로 달리는 떼제베로도 파리에서 4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이다. 보르도 행 떼제베가 출발하는 몽파르나스 역에 도착하니, 아차! 카메라를 민박집에 두고 왔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과 각 샤토가 가진 고유의 집 모양,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보르도의 시내를 찍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래도 어쩌랴, 이제 회군하면 기차를 놓치는 것을.

  보르도 관광청에서는 성수기 동안 매일 시내의 주요 와인 산지를 반나절동안 둘러보는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오늘 내가 참가하는 투어 역시, 그 프로그램의 일환. 보르도 관광청(http://www.bordeaux-tourisme.com)에 들어가서 예약하거나, 전화를 통해 예약할 수 있다.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경우 참가비를 지불해야 하지만, 전화를 통해 하면 출발 15분 전까지 가서 결제를 마치면 되므로 어쩌면 전화를 통해 예약하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영어도 잘 한다. ㅎ) 일별로 다른 곳을 가는데, 토요일인 오늘은 보르도의 꽃 메독 지방을 간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가니, 넓은 포도밭이 이어진다. 첫번째 샤토인 샤토 키원에 내려 예쁜 마드모아젤의 설명을 들었다. 그냥 일반적으로 샤토를 둘러볼 거란 내 생각과 달리, 샤토의 역사는 기본이고 포도 품종에 따른 재배 환경, 포도 선별 과정, 숙성과정, 블렌딩 과정 등 포도밭부터 병입과정까지 와인 제작 과정의 전 과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때문에 단순한 흥미만 가진 사람은 자칫 지겨울 수도 있다. 반면에 와인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가보면 좋을듯. (불행히도 나는 후자보다 전자에 가까웠다. 시음 때만 눈이 반짝였;;;)

  맨 마지막엔 언제나 그렇듯, 테이스팅을 해 볼 수 있다. 어려운 설명에 지루해하던 서양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이 때만은 눈이 반짝였다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음행사'는 늘 인기가 킹왕짱이다. 샤또 키원에서는 한 병을, 샤또 페하봉에서는 무려 네 병을 맛보여줬는데 샤또 키원과 샤또 페하봉은 그 지역에서 나름의 명성을 고수하고 있는 샤또들이라고.

  와인 맛도 맛이었지만, 인상깊었던 건 관광청에서 나온 무슈의 한 마디였다.

  'Wine is not intellectual, it is emotional. (와인은 지식이 아닙니다. 와인은 느낌이죠.)'[각주:2]

  한국 사람이 꼭 들어야 할 한 마디라고 생각된다. 여기저기 검색해보면, 포도가 어쩌니 그 해 작황이 어쩌니 하면서 꽤 유식한 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가만 보면 아는 것을 보여주려는 지식장사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다. 그들에게는 단순히 외운 것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와인 애호가 중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매료시킨 단 한 병의 와인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내 기억에, '신의 물방울'을 그린 아기 다다시 남매는 샤토 탈보에 매료되어 와인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이런 저런 와인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고, 남매끼리 와인을 마시면서 느낀 이미지를 나열한 것이 '신의 물방울'의 창작 배경이었다고 아기 다다시는 말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나라의 수많은 와인 애호가중 이런 와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궁금하다. 이들에게 와인은 '친숙한 술'로서 공부하게 되는 것이라면, 우리나라에서의 와인은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술로서 단순히 계급 간 구분짓기의 수단으로밖에 통용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조사에서, CEO들의 골칫거리 중 하나가 이 와인에 대한 공부 문제라고 하는데 이런 건 모두 '잰 체 하기 위해' 공부하기 때문이다. 보여주기 위해 공부를 하니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고, 힘들 수밖에 없다.

  1. RER C 선 노선도를 보면 양 끝으로 두 개의 베르사유 역이 나오는데, 베르사유 궁에 가기 위해서는 리브 고슈 역으로 가야한다. 여행자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베르사유 리브 고슈 역의 밑에는 샤토 드 베르사유라는 갈색 바탕의 글씨가 적혀 있다. (리브 고슈는 '강의 서안(西岸)'이라는 뜻이라고...) [본문으로]
  2. 프랑스 사람이기 때문에 이 문장이 어법에 부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