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리에 들려고 누웠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됐다.
"내가 며칠 전까지 정말 유럽대륙을 헤매고 있었던 걸까? 설마 꿈은 아닐까?"
무거운 짐을 매고 낑낑거리며 기차를 탄 일이나 교과서 속에서만 보던 고대의 유적 · 유물들을 실제로 본 일, 그리고 다른 나라나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 술 한 잔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일들이 정말 꿈 속 일처럼 여겨진다. 수없이 드나드는 기차와 거기서 내리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크지는 않지만 현대적이면서도 실용적인 건축물들, 거리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공산당이 버젓이 활동하는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 이건 나에게는 꿈이었다. 내 국적지(國籍地)의 현실은 냉혹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느낀 것은 선진국과 선진도약준비국 간의 문화적 · 정치적 수준의 괴리일 것이다. 물론 경제력에도 차이가 있겠지만, 사실상 인프라 스트럭쳐의 수준이나 그 나라의 인민들이 사는 수준은 한국이나 내가 방문했던 유럽 국가들이나 별 차이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들은 정치나 문화와 같은 무형의 것들이었다. 보행자 중심의 교통체계나 하나의 토론법으로 유형화될 정도로 체계적이면서도 치열하게 진행되는 의회의 토론, 섹스와 선혈이 낭자하는 선정적인 방송이 존재하는 한 편으로는 전문적이고 심도깊은 주제를 다루는 TV 프로그램의 존재들, 자국의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을 뛰어넘어 그것을 제대로 팔아먹을 줄 아는 사람들... 이게 선진국의 저력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는 전형적인 '탈아입구' 사상의 노예일지도 모른다. 이웃나라 일본의 근대화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1 물론 그들에게도 인류사적으로 씻을 수 없는 과거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과거'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냈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유럽인들은 과거 자체를 부정하고, 합리화하기에 급급하기 보다는 과거를 인정하고 그것을 사과하는 한 편, 과오를 책임지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앞서의 포스팅에서 소개한 카이제 빌헬름 교회의 존재나 유럽 전역에 위치한 유대인 관련 사적들의 존재는 이러한 유럽인들의 노력의 산물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르다. 과거 일제에 부역했던 자들 중에 현재 사회 지도층인 사람들 중 누구도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생존권을 들먹이며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부끄러운 과거를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남겨야 할 일제시대의 건축물들 상당수는 국가정기를 바로세운다는 미명 하에 대부분 파괴되었고, 그나마 남은 건물들도 '일제시대의 건축물이기 때문에 파괴해야 한다'는 해괴한 서울시장의 논리로 점차 없어지고 있다. 물증이 없어도 과거는 기억된다. 과거를 잊는 방법은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과거를 곱씹어야 과거는 사라진다.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없애는 작업을 해봐야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오기와 독선, 독단을 나을 뿐. 이 정부가 집권 초부터 선진화를 부르짖고 있는데, 선진국의 사례들을 보면서 과연 자신들이 추진하고 있는 그 선진화란 것이 제대로 된 것인가에 대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럴 뇌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2
- 脫 - 벗을 탈, 亞 - 아시아, 入 - 들 입, 歐 - 유럽 :: 亞는 영어 Asia의 '아'를 음차한 것이고 歐는 영어 Europe의 음차인 '구라파(歐羅巴)'에서 연유다. 번역하면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편입하자'는 뜻이다. [본문으로]
- 알고 있겠지만,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나 이토 히로부미 등 상당수의 일본 근대화론자들은 '탈아입구'를 부르짖었다. 스스로가 유럽인이 되고자 한다는 의식 때문에 그들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자신들을 다르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아시아에서 유일한 근대 제국주의 국가의 건설의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의 유독 광적인 식민지 지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그들이 근대화의 모델로 삼은 것은 영국이었다. 내각 중심의 정치체제나 우핸들 차량 중심의 교통체제들은 모두 영국의 시스템을 모방한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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