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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불교'란 수식어가 난 왜 이렇게 어색하지?

클라시커 2008. 9. 2. 17:10

  더위와 올림픽으로 인해 식었던 광장을 불교계가 다시 달구고 있다. MB정권의 막되먹은 종교 편향 행위[각주:1]에 인내심이 다한 불자들이 거리로 나서 '정교분리'와 '국교없음'을 명시한 헌법을 준수하라며 MB에게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누리꾼들은 소강상태로 접어든 촛불집회의 불씨를 불교계가 되살리고 있다고 칭찬하며, '역시 호국불교다'란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호국불교'란 수식어가 참 어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투쟁의 과정에서 한 명의 '내 편'을 얻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전쟁이란 것도 멀리서 바라보면 결국 세력싸움이기 때문에, 내 편을 더 많이 갖는 사람이 대부분 이기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내 적의 적은, 곧 나의 동지'라는 전쟁격언도 있을까. 그런데 이런 말도 있다. '동상이몽'. 한 침상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인데, 헐리우드판으로 이 말을 재개작하면 '적과의 동침'이다. 동침은 하고 있으나, 상대는 본질적으로 적[각주:2]이라는 거다.

  사태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불교계의 요구가 시민들이 촛불을 통해 보여준 정권에 대한 요구와 그 맥락을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민들과 불교계 모두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지만, 시민들은 시민의 대표로서의 사과를 요구하는 반면 불교계는 권력자로서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차이다. 전자와 후자가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전자가 시민의 대표로서 민주주의란 기본 이념에 충실하지 못한 점과 시민의 건강권을 쉽게 내어준 데에 대한 책임을 묻는데 반해 후자는 단순히 불교계라는 한 세력을 소홀히 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쉽게 말해, 시민들의 광장이 생활밀착형 정치가 실현되는 아고라라면, 불교계의 광장은 권력투쟁의 전쟁터인 것이다.

  중요한 점은, 시민들이 불교계에 '호국불교'라는 애칭까지 붙여가며 기대를 하는 이유가 앞서 말한 '내 편'이라는 데에 있다. 길게는 4년 4개월 동안 이루어질 '대정권 투쟁'에 불교라는 큰 세력이 든든한 지원군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지향점의 차이' 때문에 그 연대가 과연 이루어질지, 더 나아가서는 그것이 계속 유지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지금의 MB 상태로선 절대 그러지 못하겠지만 -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자체를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에 - 만약 MB가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개신교계를 멀리하고 불교계를 아우르려는 제스츄어를 취한다면 '연대' 전선은 곧 붕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범불교도대회에 참여한 대다수가 단순히 '종교 차별'에 한을 품고 MB에 비판을 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변혁은 의외로 단순한 데에서 비롯된다. 뜨거운 가슴으로 투쟁하되, 머리는 차갑게 유지해야 할 시점이다. 늘 그렇듯, 본 글에 대한 무한한 비판을 환영한다.
  1. MB의 1등 하수인인 어청수 경찰청장은 조직 내 게시판을 통해 자신이 참여하는 시국기도회를 홍보하였고,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와 자기과시를 위해 사진을 찍는 등 한 국가기관의 수장으로서의 자질이 의심되는 행위를 한 바 있다. 이후에도 경찰은 촛불집회 관련 수배자들이 조계사로 피신해 있다는 것을 이유로 조계사 내로 들어가는 조계종 총무원장의 차량을 강제 검문하여 또 한 번 파문을 일으켰다. [본문으로]
  2. '적'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너무 강해 다른 말로 바꿔보려고 했지만, 그럴 경우에는 원문의 기막힌 형용모순이 표현되지 않아 그냥 살려두기로 했다. 표면상 '적'이지만 사실은 '너'와 '나' 사이의 회색지점도 포함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