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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를 보다가, 삶에 대한 반성(?)을 하다

클라시커 2008. 9. 5. 23:29


  여전히 유럽 이야기를 한다는 게 우습지만, 그 인상은 마치 낙인과도 같아서 자자형(刺字刑)[각주:1]마냥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것 같다. 바람이 든 것처럼 보이겠지만, 돌아온 지 스무날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유럽을 부르짖는 것은 그만큼 나도 알게 모르게 얻어 온 것이 많다는 반증이리라. (어째 점점 글쓰기 스타일이 허세근석일세.)

  유럽에서 건져온 그 '수많은 것들' 중에 애착이 가는 것이 있다면, 카라얀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내놓은 음반과 1983년 새해 기념 콘서트 실황을 녹화한 DVD다. 고전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이렇게 앨범을 사가면서 찾아 듣는 이유는 단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나 자신이 악기를 연주하는 '허세'를 부려보고 싶어서일 거다. 정신과 육체가 해리된 정도가 심한 탓에, 정신의 발전속도만큼 육체가 따라가지 못해 - 쉽게 말해, 게으르다는 이야기다 - 나는 한 번도 상상했던 어떤 것을 실현해 본 적이 없다. 아마도 내가 지금 이렇게 방황을 하는 까닭도 거기에서 연유하는 것일 것이다. 스물두 해를 살면서 점점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는 조바심이 난다. 인생선배들이 보면 웃을 일이지만, 나는 진지하다. 가장 인생을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 때는, 길거리에서 연인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인데 솔직히 말해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없다. 이전에는 단순히 못난 외모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 그렇다, 나는 외모 컴플렉스가 있다 -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의지도 용기도 없었던 것이 주요인인 것 같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참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지금도 이렇게 '내 이야기'를 주절거리고는 있지만,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면 늘 언제나 '적정선'이 있다. 내 이야기를 하다가 사회문제로 치환해서, 마치 이것이 애초부터 내 속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자기의 이야기를 끌어넣은 것마냥 눈속임을 해대는 것이다.

  더 불행한 것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이야기를 할 만한 친구들도 없다는 거였다. 내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실상 온 힘을 다해 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도 그것을 느꼈기에 아마도 나와 그들의 유대는 친한 것처럼 보이는 유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가지 더 요새 고민하는 것은, 내가 그리 능동적이지 않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말 잘하고, 나서기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해다. 나는 받아치는 말은 잘 하지만, 대화를 이끌지는 못한다. 나와 끝없는 이야기가 하고 싶다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반드시 화제제시를 해야 한다. 나는 그의 스매싱을 늘 받아칠 뿐, 정작 내 서브로 경기를 끝맺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산적한 문제들 앞에서 나는 단지 그냥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다. 변화의 속도는 생각보다 행동이 빠르다고 했던가. 한 번에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면, 차근차근이라도 해 나가야겠다.






  그나저나 언제나 봐도 카라얀 옹의 카리스마는 늘 쩐다. 청장년 기의 카라얀에게서는 맹수같은 카리스마가 느껴진다면, 노년의 카라얀에게는 마법사와도 같은 카리스마가 느껴진다고 할까. 말하지 않고도 상대의 눈만 보고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마법사. 개인적으로 카라얀 지휘-베를린 필 연주의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블타바를 더 사랑한다. 블타바 강에 서서 그 멜로디를 떠올렸을 때, 나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 했었지.

  1. 물론 자자형은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이마에 바늘로 글자를 새긴 후, 그 위를 먹물로 칠하는 일종의 '문신형'이지만 말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