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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점 정부 구성은 가능한가

클라시커 2011. 3. 11. 01:17
며칠 전 한겨레 '왜냐면'에 실린 글 중에는 각료 배정을 통한 행정권의 공유와 정치 의제의 합의를 통해 중도-진보 간 분점 정부 구성[각주:1]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주장을 담은 게 있었다. 이전부터 이런 주장들이 있어왔다고는 들어왔으나, 난데없이 그 구체적인 실현가능성이 궁금해졌다.

우선 각료 배정을 통해 행정권을 공유하는 방법으로 분립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가능한가. 장관직 임명과 관련해 몇 가지 사실만 알아보자.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장관은 국무위원인 사람 중에서 국무총리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한다. (헌법 제94조) 국무위원/장관[각주:2]의 임명 과정에서, 국회는 인사청문회를 개최하지만 경과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할 뿐 임명에 대한 동의/부동의를 결의할 권한은 없다. 따라서 국회가 부정적인 내용의 경과보고서를 채택하여 제출하더라도 대통령은 국무위원을 임명할 수 있다. (단, 국무총리 · 대법원장 · 헌법재판소장 · 감사원장 · 대법관 · 국회 몫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등은 국회의 임명동의 절차가 필수적이다.[각주:3]) 다만 국회는 국무위원/장관에 대한 탄핵소추권을 갖는다. (헌법 제65조) 국무총리 역시 대통령에게 국무위원의 해임을 건의할 수 있다. (헌법 제87조3항)

위의 내용을 사례를 들어 적용해 보자. 2012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포함한 보수우파가 승리하고, 대선에서는 중도-진보 연립전선이 승리한다고 가정해보자. 위에서 읽은대로, 이 경우라도 여당과 대통령이 합의대로 진보 인사를 국무위원 등에 임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국회에서 진보 인사에 대해 부정적인 경과보고서를 채택해 대통령에게 제출한다고 할지라도,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각료배정에 있어 적당한 배분을 통해 행정권력을 공유하여 분점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가능하다. (노파심에 첨언하자면, 이 글에서는 중도가 세가 강하고 진보가 세가 약한 현실을 당연한 전제로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중도적인(?) 여당과 대통령이 의지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가령 당장의 선거승리를 위해 2% 모자란 중도 측에서 일단 합의를 해주고 나중에 모른채 하면 분점 정부 구성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론을 의식해 정부 초기에는 한 두명 정도 의미없는 자리에 진보인사를 합류시켰다가, 나중에 제 식구를 챙기기 위해 이들을 팽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국무위원의 임명 만큼이나, 해임에 있어서도 대통령과 여당의 의지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가 중도에게 '팽'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각료 임명은 물론이거니와 원내의석을 통한 제2의 대비책을 세워둬야 한다. 아마도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원내교섭단체 구성'도 말하는 것 같다. 현행 법령상, 원내교섭단체는 20인 이상의 소속의원을 가지고 있어야 구성 가능한데 (국회법 제33조) 현재 대한민국 국회의 정원은 299명이다. 299명 중 20명은 6.67%에 해당한다. 6.67%. 몇몇 중요한 의안의 발의를 위해서는 최소 33%(재적의원 3분의 1)가 필요하며 가결을 위해서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이 필요하고, 평범한 의안의 결의를 위해서도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50% 이상)과 출석의원 과반수의 찬성이 필요한 현실을 생각해보면 아주 의미가 없다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큰 의미가 있는 숫자라 보이지도 않는다.

결론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분점 정부, 그 정부에 참여하는 각 주체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분할하여 점유하는 형식의 정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허울 좋은 각료 나눠먹기나 생색내기 수준의 교섭단체 구성이 필요한게 아니라 진짜로 권력을 분할하여 점유하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되어야겠다. 예를 들면, 소수 정당의 목소리를 키울 수 있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의 전면적인 실시 등이 있겠다.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단순히 선거연합을 통해 분점 정부를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일각의 주장은 지나치게 나이브해 보인다. 더욱이 우리네 정가에서 정치 세력 간의 합의란 것이 제대로 이행된 전력이 없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더불어 위와 같이 현실을 점검해 본 바, 연립 정부의 구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재 강력한 정치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자칭 중도 세력의 결심이 필수적이다. 사실 중도 세력에게는 현재도 나쁘지 않다. 아무리 공공의 적인 한나라당이 원내 의석 중 다수를 차지하더라도 민주당이나 국참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형편없이 쪼그라들지는 않았잖은가? 그런데 일부 대통합론자들은 매번 진보정당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 같아 무척 아쉽다. 기득권 중 일부를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과 그동안 걸어온 길 모두를 맞바꿔야 하는 사람들이 앉는 협상장에서, 당신들이 좋아하는 그 '상식'이란 것에 기반해 누구에게 양보를 요구해야 할지를 잘 생각해보라. 나는 이 점에서 선거연합은 진보의 산화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에 신비지론이 아니라는 진보대통합 뭐시기 정책위원의 저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덧 : 두서없이 쓰느라 미처 끼워넣지 못했는데, 분점 정부가 구성되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대통령제 국가가 아니라 내각제 국가거나 적어도 의회가 행정부가 서로 견제하는 것이 매우 자유로운 체제(이원집정부제 등)를 채택한 국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승자독식의 구조가 일반화된 이 나라의 의회구조(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에서 분점 정부의 구성이란 가히 판타지에 가깝다는 것. 선거승리에 취해 무조건 합치는게 능사라는 식의 궤변만 늘어놓을게 아니라, 기본부터 따져보았으면 좋겠다. 남한테 B급, C급 운운할 시간에 제 눈의 들보나 먼저 보란 이야기다. 뭐 그런게 가당키나 하겠느냐마는.

덧2 : 하고 싶은 말을 더하자면, 분점 정부론을 근거로 통합을 추진하는 자칭 진보 인사들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냐고 묻고 싶다. 이를테면, 거칠게는 의석을 중도들로부터 빼앗아 오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분점 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일텐데, 이것에 대한 방법은 있는가? 마냥 '합의만 하면 된다'는 식의 순진한 소리는 집어치우고 말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산화하지 않으니 이건 비지론이 아니다'란 식의 멍청한 소리를 그냥 참고 듣고만 있을건가.

덧3 : 쌍시옷. 개요를 안 쓰고 끄적끄적 쓰니 뱀발이 뱀처럼 길어진다. 근데 뭐 저것들은 진보더러 노동부 장관이나 맡으라고 해? 솔직히 말해 노동부가 대통령 궐위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순번 중에 몇 번째일 것 같냐? 모름지기 분점 정부라 분칠하려면 좀 무게 있는 자리를 내놓으란 말야. 행안부 주면 주민등록제와 지문날인제는 확실히 철폐해줄게.
  1. 여기서는 연립 정부, 연합 정부 등과 동일한 의미로 본다. [본문으로]
  2. 헌법기관으로서의 국무위원과 각 부처의 장관은 다른 의미지만, 일반적으로 국무위원 중 다수가 장관이 되므로 여기서는 편의상 국무위원과 장관을 동일한 의미로 본다. [본문으로]
  3. 헌법 제86조1항, 제98조2항, 제104조1항, 제104조2항, 제111조3항, 제111조4항, 제114조2항, 국회법 제46조의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