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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記/2015 이전

근현대 중국의 구미문화 수용과 사회주의 중국의 미래 - 2011년도 2학기 유교문화와 자본주의 중간고사 대체



● 서론

18세기의 중국은 ‘큰 시장’을 선점하려는 구미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이에 일본과 조선(남한)처럼 중국 역시도 강제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근대 체제로 편입된 이상 사회 진화론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 진화론이 가지고 있는 원천적인 이론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이 한계를 전통 사상의 저력을 활용하여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곳이 바로 중국이다.[각주:1]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자들의 저작을 검토하여 근현대 중국의 구미문화(서구문화) 수용 양상과 이 과정에서 보이는 중국 지식인들의 모습에 대해 서술하는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중국의 구미문화 수용 양상을 평가하고자 한다.

● 본론

1. 신해혁명 이전의 구미문화 수용 양상

1.1. 양무운동의 시기 – 아편전쟁부터 청일전쟁까지

당시 청나라는 바깥으로는 아편전쟁과 애로호 사건, 안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을 겪으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사상적으로 “서양의 장점을 배워 서양 오랑캐를 견제 또는 제압한다”는 입장에서 부국과 강병을 위한 새로운 모색이 지식인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것이 바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인데, 이를 바탕으로 초기의 서학은 정치적 사고와 결합된 자연과학 지식에 국한되어 수용되었다.
그러나 중체서용이란 ‘전통적인 유교관료의 통치나 왕조체제를 온존시켜[中體]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는 것[西用]’[각주:2]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를 배경으로 한 구미문화의 도입은 결국 봉건 통치의 동요를 막는다는 실용적인 정치적 목적을 충족하는 데서 그치고 말았다. 이에 따라 구미문화의 내용을 구성하는 철학이나 사회과학 분야는 도외시되어 자연과학을 제도적으로 응용할 인재나 사회 제도적 뒷받침도 마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수용된 자연과학도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

1.2. 변법유신

청프전쟁, 청일전쟁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인해, 단순히 기술의 도입만으로는 진정한 개혁이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등장한 것이 바로 변법유신이다. 이 시기에는 청일전쟁 패배에 대한 자각에서 서양 수용이 이루어진 만큼 우선 ‘구망’(救亡)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각주:3]

이 시기의 대표적 지식인으로는 캉유웨이[康有爲]를 들 수 있는데, 그를 중심으로 한 유신파는 변법유신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캉유웨이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공자개제고』를 저술하여 공자의 개혁가로서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한편으로,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옛 것에 의탁한 제도개혁’[托古改制]을 주장하며 공자와 중국의 전통적 요소가 서학과 완전히 들어맞고, 따라서 전통적 요소 중 개혁에 아주 적합한 것들이 수없이 존재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캉유웨이의 생각은 중학과 서학의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발견해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다.[각주:4]

한편 이 시기에는 옌푸[嚴復] 등이 영국의 인식론과 함께 사회진화론을 도입하여, 기존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순환적 역사관을 단선적이고 전진적인 역사관으로 바꾸는 문화충격을 선사하기도 하였다.[각주:5]


2. 신해혁명 이후의 구미문화 수용 양상

2.1. 신해혁명을 전후한 시기

이 당시는 청조의 분열과 열강의 이권 획득 경쟁으로 인해 중국내 모순이 정점을 달리던 시기였다. 따라서 사상가이자 정치가들은 사상보다는 정치 활동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비로소 이 시기에 이르러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가 중국에 소개되었다. 특히 이때에 도입된 사회주의는 이어 벌어지는 5․4 신문화 운동 이후 본격화되는 맑스주의 전파의 서막을 여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각주:6]


2.2. 5․4 신문화 운동과 북벌전쟁기

중국은 신해혁명 이후 표면적으로는 근대국가의 반열에 오른 것 같았으나 아직 봉건적인 경제, 정치 및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위안스카이가 정권을 탈취한 이후부터는 존공복고(尊孔復古)의 기운마저 감돌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과학과 민주의 구호 아래 거대한 규모의 신문화 운동을 벌였다.
이 시기 후스[胡適] 등에 의해 ‘실용주의’가 도입되었으며, 후스는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백화문운동을 제창, 이후 천두슈[陳獨秀]와 루쉰[魯迅]에 의해 문학혁명운동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또한 이와 더불어 등장한 후스의 ‘전반서화론’은 1916년, 천두슈가 ‘최후의 각오가 되는 각오’를 제기하면서 전통을 반대하고 계몽을 호소하는 흐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즉, 혁명의 분위기를 타고 옛 것을 전복하며 새 것을 추구하는 일련의 흐름이 폭발한 시점을 5․4 신문화 운동기라 볼 수 있을 텐데, 이 흐름을 가장 함축적으로 집약한 구호가 바로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이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는데, 량치차오[梁啓超]․량수밍[梁漱溟]․장쥔마이[張君勱] 등은 앞서 언급한 ‘중체서용론’의 창안자인 장즈둥[張之洞]의 학설을 계승하여 중국의 ‘정신문명’ 또는 ‘동방문명’의 우월성을 제기하였다. 이후 이들은 ‘현대 신유가’의 구성 배경이 된다.[각주:7]


2.3.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문화대혁명기, 그리고 문화열

1949년 중국 본토에 맑스-레닌주의를 근본으로 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창설되면서 기존의 중국 본연의 사상이던 유학은 쇠락기를 맞게 된다. 특히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유교는 타도해야 할 봉건시대의 유물로 지목되어 다시 한 번 혹독하게 비판받는다. 그러나[각주:8] 바깥에서는 현대 신유가들에 의해 꾸준히 연구되었으며, 내부적으로도 마오쩌둥의 사후, 문화대혁명이 종결되고 개혁개방의 기치가 들리면서 리쩌허우[李澤厚] 등에 의해 유교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중공 정부 역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의 보인 중국의 낙후한 현실에 대해 각성하며 사회주의 현대화를 위한 이념적 기반을 찾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안팎의 이러한 움직임이 맞아 떨어지며 1984년경부터 유교문화와 사회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를 한데 아울러 본격적으로 논의해 보려는 움직임이 일게 되는데 이를 ‘문화열’이라 한다.
이 논의의 중심주제들은 전통, 서방을 향한 학습, 민족과 사회주의 등이며 이 주제들에 대한 관점, 방법 등의 차이에서 여러 유파가 갈라진다.[각주:9] 그 유파들은 유학부흥론, 비판계승론, 서체중용론, 철저재건론으로 나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주장들 중 사회주의와 민족을 축으로 중국적 전통과 현대화를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키려 하던 중국공산당의 마음에 든 것은 비판계승론이었다.[각주:10] 그러나 비판계승론이 학술적 입장과 논리체계를 통해 주장을 전개하는 것과 달리 당은 정치사회적 요구라는 현실인식을 기준틀로 삼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즉, 당의 문화전략은 개방을 계속해가면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을 최선의 목표로 하고 있는 바, 상황에 따라 문화열의 여러 유파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일례로 그들은 개방의 부작용의 책임을 철저재건론이나 서체중용론과 같은 전반서화론자들의 몫으로 돌린다. 그리고 유학부흥론이나 비판계승론의 주장을 완충장치로 사용하고 있다.[각주:11] 하지만 전반서화론이 꼭 당의 입장에서 비판대상만은 아닌 것이, 역사의 동력이 생산력에 있음을 강조하는 서체중용론이나 서양으로부터 배울 것을 강조하는 철저재건론의 입장이 어느 부분에서는 당내 개혁론자들의 주장과 맞아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각주:12] 따라서 당은 특정 유파의 손을 완전히 들어주고 있다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 결론

이상의 서술을 통해, 중국의 구미문화 수용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의 근대화 과정은 동일한 유교문화권이었던 조선(남한)과 일본과 다르게 지속적으로 전통 사상의 저력을 활용하여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근대화의 초기에 자체적인 근대화를 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살리지 못하고 오롯이 타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근대화된 사회에서 현실을 사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중국의 저력은, 중국 사회주의의 미래가 그렇게 어둡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급속도로 진행된 개혁과 개방으로 비록 공산당이 계급정당으로서의 이미지를 상당부분 실추하였으며, 동시에 자본주의화가 고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중국 사회주의의 미래를 어둡게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중국인들에게는 오랜 기간의 혁명전쟁을 거치며 얻은 많은 투쟁경험이 있으며, 오늘날의 중국은 그로부터 얻어낸 소중한 성과라는 생각을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맑스-레닌주의를 중국전통 및 중국현실과 결합시킨 중국식 사회주의는 전통문화의 연장선 위에 있기 때문에 단순한 옮겨심기 차원을 넘어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레포트의 말미에서도 볼 수 있듯 당이, 그리고 중국인들이 문제의 초점이 되는 논의를 최대한 증폭시켜 충분한 검토를 통해 현실에 적용하고 있는 점 등은 중국이 소련이나 동유럽과는 달리 자본주의와의 대결에서 그렇게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 정확히 이야기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거주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 현대의 중국이 자본주의와 같은 구미문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유교문화를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즉, 이미 중국문화에 어느 정도 녹아 있는 유교문화를 활용해 당이 자신들의 의도를 저항 없이 전달하려 한다든가, 혹은 질서와 조화와 같은 유교문화의 보수적인 측면만을 강조해 인민들에게 사회에 복무할 것을 강권한다든가 하는 의심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저자명 가나다 순)

◆ 김예호, 유교문화와 자본주의 수업자료
◆ 김교빈(1992), 문화열과 현대중국, 『현대 중국의 모색 – 문화전통과 현대화 그리고 문화열』,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논전사분과(편), 서울: 동녘
◆ 리쩌허우(1987), 『중국현대사상사론』, 김형종(역), 서울: 한길 그레이트북스, 2005
◆ 조경란(2003),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 – 캉유웨이에서 덩샤오핑까지』, 서울: 삼인
  1. 조경란(2003),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 – 캉유웨이에서 덩샤오핑까지』 (서울: 삼인), p.11 [본문으로]
  2. 김예호, 유교문화와 자본주의 수업자료, p.3 [본문으로]
  3. 조경란(2003), p.36 [본문으로]
  4. 김예호, pp.3-4 [본문으로]
  5. 김예호, p.4 [본문으로]
  6. 조경란(2003), p.41 [본문으로]
  7. 김예호, p.4 [본문으로]
  8. 중공 중화인민공화국을 말한다. [본문으로]
  9. 김교빈(1992), 문화열과 현대중국, 『현대 중국의 모색 – 문화전통과 현대화 그리고 문화열』,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논전사분과(편), (서울: 동녘), p.11 [본문으로]
  10. 김교빈, 앞 글, p.19 [본문으로]
  11. 김교빈, 앞 글, p.19 [본문으로]
  12. 김교빈, 앞 글, p.2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