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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주변사논고 2]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2) - 성균관대학교

클라시커 2011. 11. 22. 00:05
'성대주변사논고'는 간단히 말해 성대 주변의 건물, 길 등에 담긴 역사를 톺아보기 위한 연재물입니다. 오랫동안 준비하기는커녕, 11월 16일의 산책 과정에서 불쑥 튀어나온 프로젝트라 사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쓸거라고는 장담 못하겠습니다. 즉, 쓰기 싫으면 언제든 때려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야기입죠.

먼저 다룰 두 개의 주제, 성균관과 종로1가 사거리 일대는 주변인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정작 본인은 모를겁니다만, 여튼 좋은 주제를 정하도록 도와준 그 사람에게 앞 두 편은 헌정을 하도록 합니다.

이제 첫 발을 내디뎠으니,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봅시다.

▲ 성균관대학교의 늦가을.


아, 잘 쉬셨나요? 커피는 맛있으셨어요? 다른 서울시내 사립대학교에 비해 성균관대 앞 상권은 규모가 작은 편입니다. 아마도 더 큰 상권인 대학로가 인근이라, 그 쪽으로 집중되는 경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예전 법학관 자리에 새로 들어선 국제관.



지금 '청룡상' 앞에 계시죠? 이제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언덕 위로 찬찬히 걸음을 옮겨보시죠. 비천당을 지나면 최근에 신축한 건물인 국제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글로벌-'로 시작하는 학과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만, 이름과는 달리 애당초 별로 글로벌하지 않은 발상에서 생긴 학과들이니 뭐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갑니다.

▲ 원래 있던 석조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600주년 기념관. 비록 시설은 현대화 되었을지도 모르나, 그 운치는 예전 석조건물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그 위 쪽으로는 이름도 위엄찬 '600주년 기념관'이 있습니다.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 성균관은 고려 성균관이 아닌 조선 성균관의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역시 이 논리를 기반으로 하여, '우리는 1398년에 개교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거죠. 이를 두고 각 학교 훌리들 간 배틀이 왕왕 벌어지기도 합니다만, 정작 현재 국내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는 자기네들 역사를 60년으로 줄이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뭐... 그냥 재미로 이해해야죠. (경성제대가 참 좋은 대학교긴 했는데...)

근대화 바람 속에서의 성균관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성균관대학교 설립사를 돌아봅시다. 성균관대학교가 근대적 대학으로서의 틀을 형성한 계기는 1895년의 을미개혁입니다. 갑오개혁 이후 근대교육이 도입되며 기존의 교육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요구되었는데, 이 때 전통 유교교육기관의 최고학부였던 성균관은 고종과 개화세력에게 고민거리가 되었죠. 성균관을 폐지하거나 근대 학문 교육기관으로 전면적으로 탈바꿈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에 내부에 경학과를 설치하여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분적으로 도입하는 절충안이 등장하게 됩니다. 「성균관관제」(1895. 7. 2, 칙령136호)과 「성균관경학과규칙」(1895. 8. 9, 학부령2호)은 이러한 배경에서 제정된 것이며, 이후에도 성균관에 대한 절충적 정책은 지속됩니다. (이런 이유로, 성균관은 온건개화파의 '동도서기'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됩니다.)

「성균관관제」 에 의해 성균관은 학부대신의 관리 하에 운영되는 것이 명시되었고, 문묘의 봉사와 경학과 설치 · 운영이 규정되었어요. 직원으로는 성균관장(1인, 주임), 교수(2인 이하, 주임 혹은 판임), 직원(2인, 판임)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관제가 마련된 지 1달 후, 「성균관경학과규칙」이 발표되어 경학과의 운영에 대한 세부내용이 정해지게 됩니다.

▲ 중앙학술정보관에서 바라본 600주년 기념관.


성균관의 근대화된 모습을 본격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은 「성균관경학과규칙」입니다. 이것의 주요내용은 교육과정, 수업연한, 학년, 입학, 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교육과정은 전통적인 경학교육을 유지하면서도, 본국 및 만국역사, 지리, 산술을 부가함으로써 근대적인 교과교육을 도입하려 했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수업연한은 3년으로 하고, 1년을 2학기로 나누어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1년의 수업시수를 42주, 매주 28시간 이내로 규정하는 등 학교운영 면에서도 현재의 대학교들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이죠. 입학지원자는 20세 이상 40세 이하인 자로 하고, 입학시험을 보는 경우와 성균관장의 추천으로 입학하는 경우로 구분하였습니다. 시험은 임시시험, 정기시험, 졸업시험의 3종류로 하였는데, 임시 및 정기 시험은 이전의 성균관에서도 시행하던 것이었으나 졸업시험은 이제까지 시행되지 않았던 새로운 성격의 시험이었어요. 즉 이전에는 성균관에 학적을 두면서 과거에 합격하면 자동적으로 졸업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과거시험제도가 폐지된 당시로서는 졸업시험이라는 별도의 단계를 두고 이들의 자격을 공인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졸업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문묘관리 직원 가운데 결원이 생기면 우선적으로 충원되는 자격이 주어졌었다고 하니, 그래도 성균관을 나오면 입신양명은 하지 못해도 준정부기관에 취업은 해서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하하.

성균관, 과거의 영화와 이별하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너울대기 시작하면서, 국립대학인 성균관 역시 세파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1908년 11월에 통감부는 「성균관학칙」을 제정하여 경학 이외에 수신, 국어, 일어, 역사지리, 수학, 이과, 도화, 법제경제, 체조 등을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며 실질적으로 일제에 의한 고등보통교육기관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명실상부 국립 최고학부로서의 성균관은 이쯤에서 막을 내렸다고 보아야겠죠.

이어 식민지기인 1911년 6월 조선총독부는 「경학원규정」을 제정함으로써, 직제 및 운영에 관한 내용을 새롭게 정비하였습니다. 이 규정은 전문 17조로 된 것으로서, 경학원을 총독의 감독 하에 둔다는 것, 경학의 강의와 연구, 그리고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한) 교화를 돕는 일[敎化裨補]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 대제학 · 부제학 · 제주 등의 직원을 두어 운영한다는 것 등을 제시하였습니다. 경학원의 소속과 설립 목적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 시기의 경학원은 이미 교육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되었으며 다만 유림의 저항을 무마하거나 일제 강점기 동안 유교를 총독부 체제에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존립했다고나 할까요.

이러한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강연회와 순회 강사 파견입니다. 일례로 1915년에 경학원 사성 이인직('혈의 누' 작가)은 이원군 순회강연에서 '일선동화'를 주장하기도 하였었죠. 총독부 정책을 유교적 언어로 홍보하는 역할을 맡은 계간 《경학원잡지》도 발행하였는데, 이 잡지는 경학에 대한 논설 외에 일본인의 논설, 정책 해설과 법령, 시국에 대한 성명을 게재했으니 할 말은 다 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이후 1930년에 경학원 안에 '명륜학원'이 설치되었다가 다시 '명륜전문학원'으로 개편되었고, 1939년에는 '명륜연성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42년 3월 17일에 '명륜전문학교'란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에서 인가를 받았으나, 2년이 채 되지 못한 1943년 12월 31일자로 폐교되기에 이릅니다.

▲ 1942-43년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 <명륜전문학교 건축평면도>. 본관과 강당, 도서관, 교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관과 뒤쪽의 교사는 ㄷ자 모양의 건물이다. 학교는 본관과 교사가 병렬 배치되고 강당과 도서관은 본관의 옆쪽으로 배치되는 전형적인 관학교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뒤쪽 교사의 평면도에는 중앙과 좌측에 계단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어 이층 건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 : 국가기록원)


성균관, 광복과 함께 과거의 찬란했던 역사와 조우하다

1945년 8월 15일, 독일 · 이탈리아와 함께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일본이 패망선언을 하며 식민지 조선에도 광복이 닥칩니다. 물론 잘 아시겠다시피, 일본을 접수한 미 태평양 방면 육군사령부가 식민지 조선에도 들어와 3년간 군정을 실시하게 되죠. 군정은 조선인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한정적으로 일제강점 이전의 모습을 찾는 작업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에 1945년 10월 17일, 군정법령 제15호 「제국대학명칭변경」[각주:1]이 발효되며 경학원은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 전인 9월에는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게 되죠.

이어 11월에는 전국유림대회가 열려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 대학 기성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 그 이름도 찬란한 심산 김창숙 선생님이 대표로 취임하기에 이릅니다.

▲ 심산 김창숙 선생님의 동상.


이러던 중에 1946년 9월, 재단법인 학린사의 이사장이던 학봉 이석구 선생님이 거대한 토지자산[각주:2]을 포함한 재단 전체를 희사하고 거기에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꾸려졌으며, 드디어 문교부로부터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받기에 이릅니다. 당시 성균관대학은 전문부(철정과 · 경사과)와 예과로 편성되었으며 초대 학장과 재단이사장으로 각각 김창숙 선생님과 조동식 선생님[각주:3]이 취임합니다. 이후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김창숙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며 늘상 이승만과 반대되는 길을 걸어왔고 이런 관계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며 국가교육정책의 수립에 있어 김창숙 선생이 학장으로 있던 성균관대학이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후 권력과 유착하던 유도회 인사 몇이 나서 유도회로부터 김창숙 선생을 비롯한 정통파를 축출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 학봉 이석구 선생 기념비. 현재는 600주년 기념관 앞에 있다.


이후 1947년 9월에는 학부 승격을 전제로 전문부와 예과 신입생 모집을 중지하였으며, 1948년 7월에 문학부와 정경학부의 2개학부가 설치됩니다. 당시 동양철학과 · 문학과(국문학전공, 영문학전공, 불문학전공) · 사학과가 문학부에 속해 있었고, 법률학과 · 정치학과 · 경제학과가 정경학부에 속해 있었습니다. (문과대학의 몇 개 학과 친구들이 콧대가 높길래, 뭘 믿고 저러나 싶었는데 이래서 그랬군요.)

1950년의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연합군의 수도탈환 즈음에 학교에 화재가 발생하여 1,500명을 수용하던 교사 전체와 7세기에 걸쳐 소장해온 7만여 권의 서적들이 회진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이에 성균관대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고등학교 안에 임시 천막교사를 설치하여 강학하다가 다시 부산시 동대신동의 임시교사로 전전하게 됩니다.

▲ 중앙학술정보관 내부.


휴전 직전인 1953년 2월에, 성균관대는 문리과대학과 법정대학, 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대학원을 신설하고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의 승격 인가를 얻습니다. 문리과대학에는 기존의 문학부에 속해 있던 동양철학과 · 국문학과 · 영문학과 · 불문학과 · 사학과와 함께 교육학과와 생물학과 · 화학과가 새로 속하게 되었고, 법정대학은 기존의 정경학부에 속해 있던 3개 학과가 속하게 됩니다.[각주:4] 이렇게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성균관대의 초대 총장에는 이전부터 성균관대를 이끌어온 심산 선생님이 다시 취임(1953년 4월)하게 되죠. 이어 1953년 6월에는 미군정법령 제194호에 의거, 각도 향교재단의 재산을 갹출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재단법인 성균관과 병합, 재단이 확충되기에 이릅니다.

1953년 9월, 휴전과 함께 환도하여 폐허가 된 교사를 정리하고 가교사를 세워 일단 개강하였다가 1954년 4월에 석조본관 건축공사를 재착공하고 가교사 185평을 준공하는 등 본격적인 캠퍼스의 모양새를 갖춰나가게 됩니다. 건물 뿐만 아니라, 다루는 학문의 영역에서도 점차 대학의 모습을 찾아가는데 1954년 2월에는 문리과대학에 수학과 · 심리학과 · 물리학과가, 55년에는 중어중문학과가, 58년에는 법정대학에 상학과가, 59년에는 문리과대학에 독어독문학과와 법정대학에 경영학과가 개설됩니다. (중요한 것은 중어중문학과가 55년에 개설되었다는 겁니다.)

▲ 최근 리모델링으로 새단장한 중앙학술정보관.


성균관대의 역사는 여기까지입니다. 1965년부터 삼성문화재단이 본교의 운영을 맡으면서는 사실 '삼성재단의 역사'인지라 더 이상 서술하지 않겠습니다. 간략히 말씀드리면 수원으로의 캠퍼스 이전설[각주:5]과 함께 삼성 특유의 '자기만 선진적'인 운영행태 등으로 잠깐 삼성과 결별(1977년 삼성문화재단 운영 포기)을 했다가, 도투락 만두 만들던 봉명재단과 붙었다가 다시 삼성과 붙었다가 뭐 하는 역사가 이후에 펼쳐집니다만 그다지 뭐 이 당시의 역사는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그냥 넘깁니다. 삼성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빼놓고 싶지 않은 역사겠지만, 비전 2020이다 뭐다 때문에 강제로 없어지게 생긴 문과대학 학생으로서 '삼성재단의 역사'에는 별 흥미가 없는지라 말입니다. 졸업생들이 모인 성대사랑이라는 데에 가면 삼성재단을 찬양하는 글들이 많으니, 구글에서 검색해 들어가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 되겠습니다.

아스라이 흩어져버린 성균의 기개

마지막으로 지난번 성균관 편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성균(成均)'의 뜻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끝을 맺으려 합니다.[각주:6] 성균관의 '성균'을 풀어쓰면 아래와 같습니다.[각주:7]

人材之未就(성인재지미취)[각주:8], 風俗之不齊(균풍속지부제)[각주:9]

"인재로서 아직 성취되지 못한 것을 완성하게 하고, 민중의 생활이나 문화가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이를 요즘 식으로 풀어 말하면, "전인교육"과  "대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옛날에, 교육과 교육받은 자(well-educated people)의 책임을 강조하는 이념은 시대를 앞선 선진적인 발상이라고, 그리고 세계 역사 속에서도 흔치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성균(成均)의 '成'은 인재를 완성시킨다[成人材]는 '수기(修己)'의 목표를, '均'은 풍속을 고르게 한다[均風俗]는 '치인(治人)'의 목표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잘 아시겠다시피, '수기'와 '치인'은 성균관대의 건학이념이기도 하지요.

이에 대한 설명은 1954년 심산 선생님이 성균 제5호에 쓰신 원고의 말미에도 잘 드러납니다.

"우리 성균의 건아들이 성균의 유래인 '성진재지미취 균풍속지부제'의 진의를 파악하여 전통에 빛나는 우리 학원에서 굳세고 참되게 자아 완성을 면려(힘쓰게)하여 국가 민족의 부흥과 인류복지의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

성대사랑에 올라온 이야기들을 보니, 80년대에 대학에 입학을 하면 선배들이 바로 이 내용들을 말해주며 성균관의 의미를 새기라는 말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80년대 총장실에 저 내용(成人材之未就 均風俗之不齊 館 = '성균관')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고 하죠. 검색을 하다보니, 어떤 어르신께서 "50년대 말에 귀교(성균관대 - 옮긴이 주)를 찾았을 때, 정문 뒤 양 옆으로 장승같은 두 개의 기둥이 서 있었고 그 기둥에 각각 '성인재지미취, 균풍속지부제'란 글귀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는 이야기[각주:10]를 남겨두셨네요. 이 분은 이것이 '대학'이란 것의 사명을 간명하게 압축한 글귀라고 하셨던데,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학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찾아보기는 크게 어렵다는 사실입니다.[각주:11]

조금 슬픈 이야기입니다만, 이 사상과의 단절이 성균관대의 변화를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더 이상 600년 전통의 성균관을 다니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단순히 숫자 '600'을 자랑스러워 하는 찌질한 숫자놀음에나 낄 것이 아니라 그 '600'이란 숫자가 주는 역사와 철학의 무게를 고민하고 계승할 일입니다. 물론 지금의 학교에게는 그 모든 것이 버겁겠지만 말입니다.

▲ 학교 뒤로는 창덕궁 후원이 보인다. '예전에 저기 많이 넘어갔다'는 교수님의 말을, 누군가에게 전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사람이 '저기가 어디냐?'고 묻길래 얼버무렸었는데, 지도를 보니 창덕궁 후원 어디메쯤 되는 모양이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주변사논고 주제 2. '종로1가 사거리' 편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날씨가 다시 추워졌는데 몸 관리 잘하셔서 건강하게 지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변사논고 주제 1.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편 끝.>

[어디까지 왔나?]
성균관 - 성균관대학교


  1.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겸 미국육군소장 A. B. 아놀드의 명의로 발표된 군정법령. 제1조는 경성제대를 서울대학으로 변경한다는 내용을, 제2조는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번경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2. 1940년 3월 3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석구 선생은 1940년 2월 12일 “환갑잔치보다는 사업이 중하다.”고 아들 능우(能雨 : 문학박사, 숙명여자대학교 총장서리 역임)에게 훈계하고 환갑잔치까지 거두면서 30만 평의 논을 매각, 환갑기념사업으로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를 설립하였다고 전합니다. [본문으로]
  3. 재밌는건 이 조동식 선생과 앞서 언급했던 이석구 선생의 후손들이 동덕여대의 '주인' 자리를 놓고 최근까지 법정싸움을 했다는 겁니다. 2003년 비리로 동덕여대 재단에서 퇴출된 조 선생의 후손들이 정이사 추천을 통해 재단복귀를 꾀하던 과정에서, 조동식 선생이 동덕여대의 설립자라고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를 알게 된 이석구 선생의 손자가 법원에 '설립자는 이석구 선생이니 동덕여대의 모든 문서에서 설립자를 조동식 선생에서 이석구 선생으로 바꿔달라'는 소를 제기했던 거죠. 이 소는 2011년 7월, 재판부가 '이석구가 설립자임!'이라 판결을 내리며 일단락 되긴 했습니다. 어쨌거나 현세의 복 못지 않게 내세의 복도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본문으로]
  4. 1951년 12월, 개정된 교육법령에 따라 기존의 문학부와 정경학부가 폐지되고 학과제로 변경되었으나 서술상 편의를 위해 개념적으로 차용합니다. [본문으로]
  5. 삼성재단이 77년에 성균관대의 운영을 포기하면서 수원으로의 캠퍼스 이전 계획 역시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대신 자연과학캠퍼스와 인문사회캠퍼스가 각각 수원 율전동과 서울 명륜동에 위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이 자주 묻는 왜 '성균관대가 두 개냐'에 대한 답이 되겠군요. [본문으로]
  6. 지난 편의 글에 덧글로 여러 중요한 지점을 꼬집어 주신 'ㅁㄷ'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본문으로]
  7. 어딘가를 보니 음을 조율한다는 뜻이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본문으로]
  8. 구글에서 검색하다보니, 중국 쪽에서는 재목 재(材) 대신 재주 재(才)를 쓰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본문으로]
  9. 사실 이 뜻을 어렵게 생각했는데, 이미 '성균관 스캔들'에서 금등지사를 찾는 암호로서 김윤희의 아비인 김승헌이 정조에게 남긴 사직상소문에도 등장했다더군요. [본문으로]
  10. 서동오, '감동의 편지한장', 네이버 블로그, 2010년 9월 12일 작성. 2011년 11월 20일 확인. http://blog.naver.com/wind0631/150093735308 [본문으로]
  11. 졸지에 심산 선생의 동상도 호젓한 곳(!)으로 밀려 있는데, 무얼 더 말하겠습니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