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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記/2015 이전

탈'연애'선언

하나의 유령이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다, '탈연애주의'라는 유령이.
―― 카를 맑스와는 전혀 상관없음


'사랑'이라는 것은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묘한 감정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가 원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잘 믿지 않는터라, 사회적으로 이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기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연애'라는 것이다. '연애'의 한자를 풀어보면 그리워할 연(戀)에 사랑 애(愛)를 사용하여 '사랑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반영된 소산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이지 않아도 믿는 자는 행복하다'고 하시었다지만 사실 사랑이란 것은 꾸준히 확인하는 것이 도리어 행복감을 준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연애라는 사회적 교감기제는 그 시행 빈도수가 늘면 늘수록, 그리고 그 깊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서로에게 만족감과 기쁨을 준다. 단지 '함께 있는 것', 그 간단한 것이 모든 '사랑하는 자들'이 최우선에 두는 목표였기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을 '아름답다'고 말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그 양태가 사뭇 달라진 것 같다. 사랑의 목표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 이상이 되었다는 이야기, 사랑 그 자체가 목적이기보다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더 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게 되었다. 성적 쾌락에 탐닉해 '몸'만을 원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 혹은 상대의 '재력'만을 원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 때로는 '몸'이 '재력'과의 물물교환 매개가 되고 있다는 것 역시도 이제 더는 이상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위처럼 급속히 세속화되고 자본화된 '사랑'에 대해 개탄하려거든 애당초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현대 연애'의 또다른 문제는 '계량화'이다. 즉 연애를 해보고 안 해 보고가 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연애의 내용보다도 횟수가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 연애를 하고 못하고가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인가? 특히나 한국과 같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끝없는 전쟁터에서 살아나가야 하는 구조에서, 연애란 것이 때로는 사치품과 같게 여겨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많은 사람들은 으레 연애라면 당연히 한 두 번 정도는 해야 하는 것으로 쉽게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이러한 경제적 이유 외에도, 단순히 자신의 소신 때문에 많은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빈번한 만남보다는 적게 만나더라도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을 만나 '마음이 움직이는 연애'를 하고 싶은 사람들 말이다. 이렇게 각자의 사정과 개성과 취향에 따라 연애를 단 한 번도 안 해 봤을 수도, 나이에 비해 적은 연애경험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획일화되고 자신들의 마음 속에서 이미 계량화된 연애의 정석을 타인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연애를 해보지 못한 것이, 마치 어디가 좀 '부족해서' 못한 것인 마냥 희화화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요구와 희화화를 이미 몇 번 받은 한 사람으로서, 오늘 이 시간을 기해 그러한 '당신들의 시선'은 모두 옳지 않다고 이 자리에서 선언한다. 동시에 그러한 편견과 시선에 한편으로는 마음고생을 했던 지난 날들에게도 심심한 유감의 뜻을 담아 고별을 고하는 바이다.

나는 나로서, 내 취향대로, 내가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연애를 할 것이다. 당신들이 요구하는 뻔한 연애 말고, 진짜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연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