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티은행이 있다는 쿠담 거리의 KaDeWa 백화점 앞으로 아침부터 달려갔다. 돈이 있어야 뭘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나 할까나. 돈을 찾고 사람 적은 베를린의 중심가를 배회하다보니 역사적 기념물과 마주쳤다. 그 이름, '카이저 빌헬름 교회'.
베를린 초 역 앞에 있는 이 교회는 영국군의 베를린 폭격 당시 저렇게 앙상한 모습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벽에는 여전히 총탄에 맞은 자국이 있고, 탑 하나는 무너지고 다른 하나는 반쯤 무너진채 저렇게 서 있다. 이것을 허물지 않는 이유는 독일 국민들이 스스로가 전범이었음을 기억하고 사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어떤 나라의 사람들은 '부역한 게 무슨 죄냐'고 하면서 더 떳떳해하는데, 이런 사람들도 있는걸 보면 참... 뭐라 말해야 할지 답답하다.
초 역의 S-bahn을 타고 운터 덴 린덴으로 직행. 운터 덴 린덴은 본디 동독의 중심지였다고 하는데, 통일이 된 덕분에 이렇게 거닐어 볼 수도 있게 되었다. 실제로 운터 덴 린덴의 끝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 장벽과 함께 동독과 서독을 나누는 문이었다고 한다. 일종의 국경이었던 셈인데, 그런 이유에선지 문 앞에서는 소련 군과 미국 군의 옷을 입고 각자의 깃발을 들고서 관광객과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는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 옆에 있는 제국의회 의사당은 바이마르 헌법이 가결되고 히틀러가 수상에 오르는 등 여러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있는 곳이다. 특히나 독일 통일에 대한 안건이 가결되는 등 다사다난한 독일사의 중심에 있다고나 할까. 이 곳이 유명한 이유는 99년에 설치된 유리돔 때문이다. 이 유리돔에 서면 베를린의 주요 건물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그 광경이 일품이다. 더불어 1층에 설치된 사진들은 제국의회 의사당에서 벌어졌던 여러 사건들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이유에선지 대지미술가 장 클로드와 크리스토는 <베를린 제국의사당 프로젝트>란 포장미술을 95년에 선보였다. KBS 창사 8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미술'에서는 이 작품에 대한 스토리들을 설명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봐도 좋을듯. 물론 이 프로젝트가 중심주제가 아니라 워홀로 대표되는 현대미술의 흐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제국의회 의사당 구경을 마치고는 운터 덴 린덴을 걸어봤다. 걷다가 눈에 들어온 도이체 구겐하임 미술관. 도이체 방크와 구겐하임 재단이 설립한 곳으로서 연중 다양한 현대미술을 전시한다고 했다. 베네치아에 갔을때, 하필 휴관일에 가는 바람에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 가지 못한게 아쉬웠는데 이 곳에라도 갈 수 있어 좋았다.
미술관을 몇 개 다니다보니, 요새 유럽에서 유행하는 미술 사조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초현실주의와 '젠더의 장을 깨고 성을 전면에 드러내는 그런 주제'가 유행하는 것 같은데, 그 중에서도 여성주의적인 이 미술사조가 꽤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과 뮌헨의 모던 피나코텍, 그리고 여기 베를린의 도이체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동일한 작가의 동일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다는 건 그런 사실을 반증하는게 아닐지.
강변을 따라 걷다 만난 훔볼트 대학. 독일 물 좀 드셨다는 국내 교수님들이 한 번씩 말씀하시는 그 대학이다. 나치에 저항하다가 대부분의 교수들이 총살당하거나 쫓겨나고, 그것도 모자라 나치에 의해 도서관의 장서가 모조리 불타버린 그런 투쟁의 역사를 가진 대학이다. 그러나저러나 역사적으로 독재정권은 공통점을 갖는데, 바로 이 '분서갱유'다. 책을 불사르고 지식인을 잡아넣는 것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서양 애들의 옛말이 얼마나 맞는지를 이야기한다고 하겠다. 어쩜 방통위가 포털을 옥죄려고 하는 지금의 현실은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봤을때 매우 당연한 일인지도.
사실 현 정부가 스스로를 민주적 절차에 의해 구성된 '민주정부'라 하면서 타도를 외치는 것은 반민주적이라 이야기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치도 정상적인 총선에 의해 다수당이 되었고 히틀러 역시 제국의회 의사당에서 독일인의 99%의 지지를 얻고 수상에 취임했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해주면, 이북에 있는 김씨 부자의 정권도 사실은 인민의 '렬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 세뇌되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면, 밑도 끝도 없이 '경제를 살리겠다'는 한 마디로 지지를 얻은 당신들도 별반 차이가 없다는 거. 사실은 당신들의 그 허접한 선거용 멘트에 꺼뻑 넘어간 사람들도 문제지만.
훔볼트 대학 너머 저 편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지역인 '박물관 섬'이 있다. 여러 개의 박물관이 있지만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 곳 페르가몬 박물관. 터키의 페르가몬 신전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유럽에서 가장 가볼 만한 박물관이라 이야기하는 가이드북도 있던데, 생각해 봐라. 경복궁 뜯어다가 미국에 옮겨놔서 '볼 만 하다'라 이야기하는게 과연 정상적인 건지. 이건 그야말로 제국주의의 산물일 뿐이다.
참, 바빌론 전때문에 목요일 저녁에 있는 무료 입장은 당분간 없다고 한다. 근데 뭐 돈 내고 가볼만 하다. 이번 전시회에는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박물관의 협조가 있었다고 하니, 제국주의가 침탈한 주변부의 문화재가 어떻게 잘 보존되고 있는지 보고 싶으면 꼭 가봐도 좋을듯. 흐흐.
포츠담 광장에서 본 빌딩들. 베를린의 매력은 이런게 아닌가 싶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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