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記/2008, 유럽

8월 9일, 독일 포츠담 - 그 해에도 정원은 아름다웠을까

클라시커 2008. 8. 10. 06:45

  베를린을 가면 꼭 끼워서 가기 마련이라는 포츠담을 방문했다. 포츠담, 왠지 친숙한 이름이라면 그것은 ‘포츠담 선언’이라는 용어 때문일 것이다. 역사상 한국이란 나라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 딱 세 번 있다. 첫번째는 앞서 이야기한 제2차 세계대전 후 조선의 처리 문제, 두번째는 한국전쟁 당시의 UN군 파견 문제, 세번째는 반기문 씨의 UN 사무총장 취임 문제다. (글쎄, 올림픽과 월드컵 개최지 선정 문제까지 합치면 5번은 될지도.)


  어쨌거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연합군 수뇌 간 세 번의 회의가 열린다. 카이로 회담,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이것인데 포츠담 회담이 앞서의 두 회담에 비해 의의가 깊은 이유는 이탈리아와 독일이 차례로 패망한 후, 마지막 남은 일본에게 항복권고를 함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는 회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의 주도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 중국 총통 장 제스가 일제에 대해 즉각 항복권고를 하는 한편, 전후 일본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한 것이 이 회담의 내용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일본 영토에 대한 이들 연합국 쪽의 정의인데, 이들은 제8항에서 '일본의 영토는 홋카이도, 규슈, 혼슈,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에 국한될 것이다'라 명시함으로서 카이로선언에서 규정된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거부하였으며, 이를 이유로 미국은 당시 실험중이던 원자탄을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하였다. 이 다음은 우리가 아는 그런 스토리.


  이렇게 우리에게는 꽤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는 곳이지만, 우리나라의 관광객들은 이보다는 ‘상수시 궁전’의 매력에 푹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신다. 물론 그것은 관광객들의 자유의지라기 보다는, 소위 ‘잘 팔리는’ 여행가이드북들이 조장한 결과다. 여행이 끝날 때 즈음에, 현지에 나왔을때 느끼는 이 ‘잘 팔리는 책들의 쓰잘데기 없음’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시발시발 거리는건 잠시 키핑해 두자.


  포츠담 중앙역에 내리면 정원 건너편에 자전거를 빌려주는 업체가 있다. 한 대를 빌리는데 11유로다. 포츠담의 관광지들이 B+W(버스, 걷기)를 사용해도 충분히 다닐 수 있음을 감안하면 결코 싸지 않은 대여료지만,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잇점을 고려하면 자전거는 꽤 매력있는 교통수단이 분명하다.


  첫번째 들른 곳은 상수시 궁전. 예전에 어떤 블로그에서 여름의 상수시와 겨울의 상수시를 비교한 사진을 올려놓은 것을 보았는데, 겨울의 상수시는 정말 황량하기 이를데 없다고 한다. 정문에서 관광객을 맞는 분수는 작동하지도 않을 뿐더러, 꽃과 나무들은 모두 겨울채비를 했다고 하니 분명히 여름에 맞는 이 기분과는 정말 다를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전거를 타고 상수시 공원을 한 바퀴 달리다 보면, 정말 얼마나 이 나라가 자전거를 배려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어지간한 곳은 모두 자전거가 달릴 수 있도록 해놓았고, 자전거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는 반드시 자전거 주차대가 설치되어 있다. 비단 상수시 공원 뿐만 아니다. 뮌헨이나 베를린과 같은 대도시도 마찬가지여서 인도와 자전거도로가 분명히 구분되고, 자전거만을 위한 횡단보도도 존재한다. 게다가 어지간한 지하철과 시내를 달리는 기차 모두 자전거를 가지고 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간혹 인도가 좁아 자전거가 달릴 수 없을 때는 차도를 이용하게 하는데, 자동차 운전자들의 자전거에 대한 배려심이 얼마나 높은지 자전거와 자동차의 진행방향이 엇갈리게 될 구간에서는 전방 몇십미터 앞에서부터 서행을 함으로서 자전거가 우선적으로 통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버스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자전거보다 더 큰 오토바이를 탄 사람에게도 버스가 위협을 가하고는 한다는데, 한국의 사례와 독일의 사례를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선진적’인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 ‘선진화’란 말에 꺼뻑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그저 잘 먹고 잘 사는게 선진국이 아니다. 그럼 때되면 밥 나오고, 생활환경 쾌적한 우리 속 짐승들이 선진적이라는 건데, 솔직히 그건 아니잖나. 시민 대다수가 이제는 좀 '이밥에 괴기국 먹는 게' 킹왕짱이었던 시대의 선진화 개념을 버릴 때도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공원을 한참 달리다보니, 어언 체칠리엔호프 궁. 노이어 가르텐 안에 있는 이 궁은 45년에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머물렀으며, 포츠담 선언을 한 곳이다. 궁 내부에는 당시의 사진을 크게 인화해 전시해놓고 있다고는 하는데, 들어가보지는 않았다. 체칠리엔호프 궁의 뒷편은 영국 스타일로 조성된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데, 처칠이 여기에 머물던 그 때에도 이 곳은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문득 궁금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녁에 프랑크푸르트로 가야하는 기차를 타야하기 때문에, 얼추 이 정도로 포츠담 유람은 정리하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집에다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베를린 초역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노래가 들린다. 쳐다보니 베를린의 번화가 한 복판에 왠 힌두교인들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나라같으면 일렬로 서서 폴리스라인을 만들었을 법도 한데, 얘넨 그냥 딸랑 경찰차 몇 대와 저 경찰 몇 명으로 행진을 인솔하고 있었다. 반면에 중앙역으로 가는 길에는 맥주를 손에 든 한 떼의 네오나치들을 봤는데, 그들 옆에는 우리나라 전의경들처럼 완벽하게 진압도구로 무장한 경찰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종교 행진과 네오 나치들에 대한 독일 경찰의 대응이 사뭇 다른 점이 흥미롭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되, 인정할 수 없는 것에는 불관용을 펴겠다는 걸까. 힌두교인들이 행진한 거리가 우리나라의 명동에 비견될 수 있을 만큼 큰 도심지였음을 감안하면 ‘신속하게, 그러나 평화롭게’ 행진을 제어하던 경찰과 그 뒤를 묵묵히 따라주던 운전자들이 참 멋지고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게 부러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 길에 중앙역에서 시간이 좀 남아 들린 버진에서 구입한 도이체 그라모폰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골드' 앨범. 20유로나 주고 지른게 되어버렸지만, ICE를 타고 달리는 지금 듣는 카라얀의 섬세하면서도 박력있는 지휘를 듣노라니 20유로라는 거금이 아깝지 않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