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학교가 자랑하는 수업 중에 '글쓰기의 기초와 실제'라는 과목이 있다. 말 그대로 글쓰기의 기초와 글을 실제로 써 보는 연습을 하는 수업이다. 과제가 하나 나왔는데, 아래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1200자 내외의 글을 쓰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나는 이런 글을 썼다.
태초에 말씀이 있으셨다. 그 말씀은 빛과 어둠을 가르시고, 이어 닷새 동안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만드셨다. 첫 사람이 등장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창세를 시작한지 엿새째에, 말씀은 점토로 자신의 모습과 꼭 닮은 형상을 빚어 숨을 불어넣었다. 흙이 눈을 뜨자, 말씀은 그것을 가리켜 사람이라 부르시고는 선과 악을 구별 지을 수 있는 지혜를 얻지 말라 사람에게 신신당부하시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말씀을 배신했다. 분노한 말씀은 사람에게 주었던 자비를 거두시고는 자손을 얻기 위해 여자는 열 달 동안 태중에 그것을 두어야 하고, 남자는 여자의 태에서 나온 그것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평생을 피와 땀을 흘려야 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말씀은 이루어졌다.
이것이 지난 날 인류가 ‘먹고 삶’의 고뇌를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였다.
2030년,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자본주의의 욕망과 결탁하여 새로운 삶의 방식을 현생인류에게 제안하였다. 그들의 제안은 ‘여성의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생산참여’를 골자로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인공적인 영아의 생산과 국가주도의 육아정책을 의미했다. 의아해 하는 사람들에게 자본이 내놓은 이유는 명쾌했다. 성인 남성의 생산참여로는 더 이상 높은 생산성을 달성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우리와 같은 ‘인도주의국가’에서 미성년자를 일터로 내모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니, 성인 여성들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때맞춰 일각에서는 ‘이번 제안은 여성의 지위를 한층 격상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 주장하고 나섰다. 그들의 주장 역시 명쾌했다.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동안 여성이 남성에 비해 발언권을 얻지 못했던 이유는 여성이 자본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한 바가 적었기 때문이라 그들은 말했다. 아무도 집안일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본을 비롯해 그 아래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본으로 책정되는 것만 노동의 대가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성을 남성과 같은 충직하고 성실한 노동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출산과 육아라는 두 가지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육아야 수십여 년 전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나라가 시행했던 공동탁아소를 시행하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었다. 문제는 출산이었다. 태초에 첫 사람이 말씀으로부터 짊어진 그 짐을 덜어내기 위해 수십 년간 기술과 자본은 노력해왔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다. 사람의 태(胎)만큼 또 다른 사람을 길러내기에 최적화된 곳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술은 달걀에서 힌트를 얻었다. 이제까지 진보해 온 인큐베이터 기술과 달걀의 안정성을 잘 융합하면 태를 대체할 만한 ‘생명생산’의 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이제 여성은 그 지긋지긋했던 출산과 육아의 짐을 덜어버리고 홀홀 생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2030년, 서울의 남산 한 자락에 위치한 그 곳에서는 수많은 달걀모양의 ‘생명생산의 터’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걸 그냥 내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으려나.
그러나저러나, 역시나 강마에는 까칠했다. 초반부터 꾸준하게 강마에답지 않은 따뜻함을 보여주었던 그는, 중요한 순간에 와서 토사구팽이라는 임팩트 강한 까칠함을 보여주셨다. 훗훗, 나는 그래도 강마에를 미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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