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일생 동안 나는 당적을 두 번이나 바꾼 사람이다. 열린우리당에서 민주노동당, 그리고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으로. 열린우리당에서 민주노동당으로 당적을 바꾼 이유는, 열린우리당이 내가 생각한 것만큼 진보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왜 진보신당이 현재의 한국 상황에 가장 적합한 대안정당인지를 밝히는 내용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전에 왜 내가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을 버렸는지에 대해서 부족하나마 썰을 풀어본다.
열린우리당의 창당 당시, 나는 그 당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거리에서 민주화와 사회주의적 변화를 부르짖었던 사람들이 구성원의 절대 다수였으며, 지역정당이 아니라 전국정당을 목표로 하였고, 무엇보다도 나름대로 '개혁성 짙은' 노무현이 속한 '여당'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당시에 민주노동당이 아닌 열린우리당을 선택한 까닭은 그들이 '여당'이었던 탓이 큰 것 같다. 적어도 밤낮 시장만능주의만을 고수하는 외곬 한나라당보다는 약간은 개량주의적이더라도 더욱 서민들에게 다가가는 정책을 내놓는 '거대 정당'이 나에게는 현실성 있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매판자본주의의 한나라당과 지역주의와 1인 보스정치의 민주당의 대안이 되지 못했다. 국보법 개정 실패나 사학법 재개정 용인,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들에 대한 기대 - 동시에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기대 - 를 아주 저버리게 된 한-미 FTA의 추진은 진중권 교수의 말마따나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하는 열린우리당의 양두구육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책면에서만 아니라 당의 운영과정에서도 점차 내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많았다. 여당 말고도 내가 열린우리당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그들의 '정치실험' 때문이었다. 기존의 정당이 고수하고 있던 하향식 운영제도를 철폐하고 당비를 6개월 이상 낸 진성당원들에게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대의원들 만큼이나 강력한 참여기회를 주어 하향식 운영체제를 확립하겠다던 그들의 기획 때문이었다. 사실 그것이 미친 영향력은 꽤 신선했다. 거대 정당으로는 처음으로 관료제적 정당운영의 핵심인 지구당을 폐지 - 물론 나중에 부활된 걸로 안다만... - 한다거나 하는 행위는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당비를 납입하고 6개월이 지나 진성당원의 지위를 얻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만큼 내게 주어진 건 별로 없었다. 여전히 중요한 정책들은 국회의원들이 결정하고 있었고, 당원들의 역할은 그저 지지 후보에 대한 거수기 역할이었다.
순진했던 나는 여기서 현실을 직시하고 민주노동당으로 발길을 냉큼 돌렸다. 지나치게 격한 구호나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구좌파 - 물론 나는 작금의 신좌파vs구좌파 논란에서 구좌파를 지지한다. 적어도 뉴라이트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신좌파보다는 구좌파가 좌파라는 이념의 본질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구좌파가 이대로 좋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 들로 가득찬 동네였지만, 적어도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과 같은 두 보수정당보다는 서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민노당의 부유세 과세 추진이나 주요 생산수단의 국공유화는 비록 그것이 사회주의적 색채가 강해 현실성이 없다는 세간의 평가에도 언젠가는 꼭 필요한 정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선택도 나이브했다. 앞서 말한 민주노동당에는 '구좌파'의 비율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당게에서는 연일 전체주의적이고 파쇼적인 냄새가 강하게 나는 글들이 넘쳐났다. 게다가 지난 대선 당시, 대선후보를 뽑기위한 경선과정에서 '더 이상' 참신하지 않은 권영길이 소위 NL들의 압도적 지지로 심상정을 밀어내고 선정되었다. 솔직히 민주노동당의 당선가능성을 낮게 보는 나로서는, 민노당에게는 참신함만이 살 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참신한 얼굴이 대선판에 나와 민노당의 현실에 대한 진단과 그 해법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이 소위 말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권영길은 그가 이전에 나왔던 두 번의 대선에서 했던 이야기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술 더 떠 NL들의 희망인 '코리아 민주연방국'이라는, 그야말로 민노당이 친북정당임을 자인하는 공약을 들고 나왔다. 사회주의적 성향을 갈망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을 찬양하지는 않는 소심한 사민주의자인 나로서는 이 상황을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일이 났다. 권영길 후보의 대선 패배 이후에 설치된 비대위에서 민노당의 마케팅 전략 수정 과정에서 마찰이 빚어진 것이다. 앞서도 말했고, 지금도 느끼는 거지만 가끔은 대중의 호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구부릴 필요가 있다. 대중이 생각하는 마지노선과 우리가 생각하는 마지노선 간에 상당한 격차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대중을 이끌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마지노선 근처에 그들의 마지노선을 가져다 놓을 수 있느냐는 건데, 현실적으로 단기간에 그렇게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기에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이 급박하게 변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꺼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정당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가끔 가식적으로나마 우리의 마지노선을 뒤로 후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민노당의 다수를 차지하는 NL은 이런 전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이 물론 한국전쟁 이후 남북 관계가 가장 급진전한 시기이긴 하지만, 여전히 대중 중 다수는 북한이 우리와 다른 '남'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나마 가지고 있어 단박에 하나로 융합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NL은 그런 한계를 무조건적으로 대중의 부족함으로 몰았다. 이를테면, 우리는 늘 옳은데 니들이 부족해서 우리를 이해 못한다는 식이었다. 내가 가장 혐오하면서도 동조하는 구좌파적 엘리뜨주의였다. 그들의 이러한 판단은 진작부터 민주노동당이 서민과 괴리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80년대의 운동권들이나 이해할만한 용어들이 당 논평에서 남발된다든지, 때지난 주체사상이 여전히 당 내에서 씨알이 먹힌다든지 하는 모습은 실제로 유약한 서민들이 민주노동당에 섣부르게 발을 디디기 힘든 상태로 당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미래를 부르짖어야 할 진보가 여전히 그들이 잘나가던 20년 전의 틀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에 터진 집단탈당 사태는 나로 하여금 또다시 탈당하게 만들었다.
2월 탈당 이후 나는 당적을 갖지 않았다. 사실 당 활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박한 내 지갑사정이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지원하는 당비를 낼 여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총선 전 진보신당이 창당되었을 때에도 나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뭔가 다르긴 하겠지만 여전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가 진보신당에 가입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총선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무척 '의미있는 패배'였지만, 여튼 새로운 진보를 이끌어보겠다던 그들이 다시 '구닥다리 진보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세 번째로 당원가입서를 썼다. 민노당때보다 당비도 두배로 내고, 특별당비도 냈다. 나같은 사람을 가리켜 창당때부터 함께한 당원들은 '지못미 당원'이라 불렀다.
그렇게 들어온 진보신당의 세계는 가히 신세계였다. 왜 신세계였을까. 나는 이에 대해 다음번 포스팅에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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