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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4일, 봉평 허브나라-이효석 생가

클라시커 2009. 4. 17. 00:40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중



  며칠 전, 한 포털사이트의 메인에 오른 '상수 허브랜드' 포스팅을 보고 봄나들이가 가고 싶어졌다. 마침 화요일이 생일이고 해서, 바람도 쐬고 또 이번에 새로 산 네비게이션의 성능도 시험해볼겸 엄마를 졸라 나들이길을 나섰다. 여기저기에 물어보니 허브랜드보다는 봉평이 낫다는 이야기를 듣고, 목적지를 그곳으로 전했다. 결정과정에 허브나라가 '국내 최초'라는 데서 오는 아우라도 한몫했지만, 그보다는 허브랜드의 '강의' - 설립자께서 관람객을 모아두고 3-40분 정도 강의를 하신단다 - 이야기를 듣고 지레 질겁한 탓이 더 컸다. 들을만 하다는 세간의 평도 있었으나, 학교에서 듣는 강의도 지겨운 판에 봄나들이에 나선 내가 어째서 거기 앉아 남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말인가?

  간단히 아점에 준하는 식사를 마치고 11시 경에나 출발한 우리는, 영동고속도로를 달림과 동시에 허기에 시달려야 했다. 애초 허브나라에서 파는 꽃밥 이런 류의 식사를 하려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는 '메밀의 고장' 봉평으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가던 길에 우선목표를 이효석 생가로 돌리고 그대로 직행.

  장평에서 빠져나와 5분여를 달려가니, 이효석 생가를 가리키는 팻말이 보인다. 차를 돌려 길 아래로 내려가니 아뿔싸, 휑뎅그레한 공터 위에 집 몇 채가 있을 뿐이다. 여기가 정말 낭만주의 문학인의 생가가 맞는가 하고 한참을 살피니, 으리으리하게 지은 음식점 뒤로 조그마한 기와집 한 채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 처마 밑에 걸린 표지판을 보니, 이곳이 이효석의 생가가 맞단다. 사적 소유물인지라 국가가 관리하는 것은 아니라 하는데, 사적 정도는 아니더라도 지방문화재 정도로 지정하여 관리해줄 정도는 되지 않을까.

△ 허허벌판 위에 휑뎅그레 선 이효석 생가.
앞뒤로 메밀을 파종하여 꽃이 피는 9월 즈음엔 좀 낫다는 이야기도 있더라지만.
지방에서라도 유례없이 서정적인 글을 써주었던 작가 대접을 좀 해주었으면 한다.
아니면 교과서에서 메밀꽃 필 무렵을 빼든지.


  약간의 허탈함을 뒤로 하고 옆에 있는 음식점에 들어가본다. 생가는 지방문화재가 아니었지만, 음식점은 강원도 지정 향토음식점이었다. 들어가 얼핏 내부를 보니 아귀를 맞춰 잘 지은 것이 꽤 공을 들였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렇게나 지은게 아니라 도편수께서 지으신 집이란다.

  집 모냥새와 맞게 음식맛도 있을까 싶어 막국수를 시켰는데, 한 그릇 먹고 혀를 끌끌 찼다. 육수가 조미료를 베이스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 근처에 단골 막국수 집은 조금 슴슴하더라도 꼭 동치미 국물에 국수를 말아준다. 먹을 때는 닝닝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몇 번이고 먹어도 질리지 않는게 그 집 막국수의 매력이다. 근데 이 집은... 봉평에 왔다는 이유만으로 먹기엔 이것저것 부족하다. 그래도 젊은 주인이 평일이라고 시키지 않은 사리며 메밀전병이며 이것저것 내주어 배부르게 먹었다. 주인의 인심이나 집 모냥새만큼만 맛도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혹여나 이 집 주인께서 이 누추한 블로그에 들어와 우연찮게 보신다면 조금만 더 노력해주길 바라본다.

△ 이효석 생가 옆의 메밀음식점, '메밀꽃 향기'. 맛에 대해 조금만 더 신경써주었으면 한다.


  배가 불렀으니 이제 본 목적지인 허브나라로 가보자. 이효석 생가 앞에서 본 '봉평 관광지도'에 의하면, 이곳과 저곳은 끝과 끝이다. 가는 길에 산 곳곳에서 보이는 산벚이 아름답다.

  도착해보니, 입구부터 펜션이 즐비하다. 앞에 흥정계곡이라는 맑은물이 흘러 그런 모양이다. 예전엔 맑은물에서 뛰노는게 전국민 여름 스포츠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경제재가 됐다는 것도 뭐 그냥 재밌고. 허브나라 앞에서 거대한 메밀 음식점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 전국에서 제일 맛없는 음식점이 관광지 앞 음식점이다. (그 뒤는 터미널 앞 음식점이 잇는다.)

  허브나라에 들어가니 성수기를 대비한 작업이 한창이다. 덕분에 거름냄새가 진동했지만 어쩌랴, 좋은 식물기르기를 위해선 화학비료보다는 자연비료가 더 나은걸. 꽃을 심고, 밭을 가는 직원들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일하는데 방해가 될까 사진은 못찍었지만, 돌연 삼성을 그만둔 남편과 이 곳을 일군 사람. 이두이 씨였다.

  농사로 사업을 일구려면, 근본적으로 이들 원장 부부처럼 자기 손에 흙을 묻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농사 뿐이랴.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 추워서인지 아직 허브들은 움이 트지 않았다.


△ 대온실 안에 아기자기한 마을이 펼쳐져 있다. 기차가 원래는 움직인다는데, 내 앞에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 허브나라 입구


△ 표지판이 앙증맞다. 원장 내외의 영애가 그렸다는 설이 있다.


  허브나라에 대해 몇 자 쓰려고 이리저리 찾다보니 입장료에 대해 꽤 왈가왈부하는 것을 보았다. 5천원이 비싸다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여길 들어올 자격이 없다 생각한다. 움트는 새싹을 옮겨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애정을 쏟고 있었다. 비싸다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밭 일구기, 거름주기, 새흙 덮기 등이 쉬운 일이라 생각하는가? 철마다 끝없이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과 그 결과를 보는데 5천원은 오히려 싸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할 게 아니라 노력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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