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의 포연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노련의 오세철 교수가 7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노련의 다른 분들도 대략 5~7년형을 선고받았다는군요. 속칭 '사노련 사건'이란게 터진게 2008년 쯤으로 기억하니까, 장장 2년여 만에 '유죄'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말을 맞게 된 셈입니다.
관련해 박노자 교수는 '그들의 노림수를 잘 봐야 한다'는 칼럼을 레디앙(http://j.mp/e8Nt4b)에 게재했습니다. 이번 사건이 한동안 잠잠했던 공안정국을 재조성해 보기 위한 정권 측의 간보기에 해당하고, 만약 이게 성공한다면 더 많은 '내부의 적'들이 '생산될' 거란 이야기지요. 1차적인 해석에 불과한 '좌파 탄압설'이나, 2차적 해석에 해당하는 박노자 교수의 해설이나 둘 모두 넋놓고 바라만 보고 있기엔 매우 서글픈 현실입니다.
레디앙의 그 칼럼을 보고 나니, 이번에는 오마이뉴스의 글이 눈을 사로잡는군요. 사실 "손학규도, 이정희도 오지 않았다"라는 헤드라인에 혹해 보게 된 것입니다만, 어찌되었든 (그 글을 다 읽고나니) 오세철 교수의 구형 소식을 들었을 때 못잖게 뭔가 쿰쿰한 기분이 가슴 한 구석에서 듭니다.
반동들, 내지는 기층세력들은 사회변혁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타이르곤 합니다. "생각해봐, 네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아. 너희가 얼마나 되니? 그 쪽수론 아무것도 못해."라면서요.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채찍을 듭니다. 오세철 교수의 구형이나, 차가운 길바닥에 나앉은 해직 재능교사들이 그 채찍에 맞은 셈입니다. 한창 피바람이 불고나면, 다시 반동들은 이야기합니다. "봐, 어줍잖으니까 저렇게 맞잖아. 너도 맞을래? 차라리 굶더라도 맞지는 않는 지금이 낫지 않아?"라면서요.
이 때 주효하게 먹히는 전술로는 이른바 '프락치 전술'이 있습니다. 애초에 프락치라는건, 상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 쪽에서 일부러 집어넣는 일종의 요원이지만 이런 경우에는 '자발적 프락치'들이 큰 역할을 해냅니다. 이들은 단 한 번도 반동들/기층세력의 국가로부터 따로 특수한 교육은 받은 바는 없지만, 다년간 순차적으로 받은 제도교육 - 초등교육 6년, 고등교육 6년의 교육제도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 이 여기서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하는거죠. '성공한 사람'과 '돈 많이 버는 사람'을 등치시키고, 이상보다 현실이 더 소중하다고 믿게 만드는 그 내용들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 둘씩 '현실'을 찾아 떠나면 남는 것은 채찍을 맞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나마 틀을 넘지 못한 사람들 중 일부가 여전히 사회변혁의지 역시 버리지 못하고 반동과 기층세력에게 저항을 합니다. 하지만 이 저항들은 무척 타협적이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실을 매우 강조하기 때문이죠. 반동과 기층세력의 기득권이 존재하는 게 바로 '현실'인데, 이것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간파한 반동과 기층세력은 어느 정도 그들을 봐주곤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공화국이니까요.
그동안 이런 식으로 참 많은 사상의 자유들이 잘려나갔다는 생각을 문득 합니다. 전쟁을 빌미로 공산당이 자리할 수 없게 된게 그 시작이고, 이제는 사회주의를 말하는 사람들마저 '극단적'이라며 손가락질을 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회주의가 극단적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한 이야기지요. 하지만 어쨌든, 이제 여기에는 그나마 '극단적'이라던 사회주의자들까지 멸종되는 기이한 이념적 생태계를 갖추게 될 전망입니다.
아마도 이 생태계에선 길 건너에서 뻔히 불안정노동자들이 시위하는걸 알고 있음에도 여태껏 찾아보지 않는 어정쩡한 정치인들과, 자신들도 그들과 하나 다르지 않으면서 채찍을 맞을까봐 두려워 - 더러는 그들을 맹비난함으로써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지위를 저들과 구분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른바 '루저'라는 단어에는 그런 위안심리가 숨어있는거죠 - 그저 돈 몇 푼 쥐어주고 할 건 다 했다며 쓴웃음짓는 저 같은 사람들이 '현실적 사회변혁주체'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동들과 기층세력들에게는 그나마 '견딜만 한' 주장과 주체만이 남게되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은 무엇보다도 슬픕니다. 하지만 현실이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현실입니다.
관련해 박노자 교수는 '그들의 노림수를 잘 봐야 한다'는 칼럼을 레디앙(http://j.mp/e8Nt4b)에 게재했습니다. 이번 사건이 한동안 잠잠했던 공안정국을 재조성해 보기 위한 정권 측의 간보기에 해당하고, 만약 이게 성공한다면 더 많은 '내부의 적'들이 '생산될' 거란 이야기지요. 1차적인 해석에 불과한 '좌파 탄압설'이나, 2차적 해석에 해당하는 박노자 교수의 해설이나 둘 모두 넋놓고 바라만 보고 있기엔 매우 서글픈 현실입니다.
레디앙의 그 칼럼을 보고 나니, 이번에는 오마이뉴스의 글이 눈을 사로잡는군요. 사실 "손학규도, 이정희도 오지 않았다"라는 헤드라인에 혹해 보게 된 것입니다만, 어찌되었든 (그 글을 다 읽고나니) 오세철 교수의 구형 소식을 들었을 때 못잖게 뭔가 쿰쿰한 기분이 가슴 한 구석에서 듭니다.
반동들, 내지는 기층세력들은 사회변혁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타이르곤 합니다. "생각해봐, 네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아. 너희가 얼마나 되니? 그 쪽수론 아무것도 못해."라면서요.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채찍을 듭니다. 오세철 교수의 구형이나, 차가운 길바닥에 나앉은 해직 재능교사들이 그 채찍에 맞은 셈입니다. 한창 피바람이 불고나면, 다시 반동들은 이야기합니다. "봐, 어줍잖으니까 저렇게 맞잖아. 너도 맞을래? 차라리 굶더라도 맞지는 않는 지금이 낫지 않아?"라면서요.
이 때 주효하게 먹히는 전술로는 이른바 '프락치 전술'이 있습니다. 애초에 프락치라는건, 상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 쪽에서 일부러 집어넣는 일종의 요원이지만 이런 경우에는 '자발적 프락치'들이 큰 역할을 해냅니다. 이들은 단 한 번도 반동들/기층세력의 국가로부터 따로 특수한 교육은 받은 바는 없지만, 다년간 순차적으로 받은 제도교육 - 초등교육 6년, 고등교육 6년의 교육제도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 이 여기서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하는거죠. '성공한 사람'과 '돈 많이 버는 사람'을 등치시키고, 이상보다 현실이 더 소중하다고 믿게 만드는 그 내용들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 둘씩 '현실'을 찾아 떠나면 남는 것은 채찍을 맞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나마 틀을 넘지 못한 사람들 중 일부가 여전히 사회변혁의지 역시 버리지 못하고 반동과 기층세력에게 저항을 합니다. 하지만 이 저항들은 무척 타협적이기 일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실을 매우 강조하기 때문이죠. 반동과 기층세력의 기득권이 존재하는 게 바로 '현실'인데, 이것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간파한 반동과 기층세력은 어느 정도 그들을 봐주곤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공화국이니까요.
그동안 이런 식으로 참 많은 사상의 자유들이 잘려나갔다는 생각을 문득 합니다. 전쟁을 빌미로 공산당이 자리할 수 없게 된게 그 시작이고, 이제는 사회주의를 말하는 사람들마저 '극단적'이라며 손가락질을 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회주의가 극단적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한 이야기지요. 하지만 어쨌든, 이제 여기에는 그나마 '극단적'이라던 사회주의자들까지 멸종되는 기이한 이념적 생태계를 갖추게 될 전망입니다.
아마도 이 생태계에선 길 건너에서 뻔히 불안정노동자들이 시위하는걸 알고 있음에도 여태껏 찾아보지 않는 어정쩡한 정치인들과, 자신들도 그들과 하나 다르지 않으면서 채찍을 맞을까봐 두려워 - 더러는 그들을 맹비난함으로써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지위를 저들과 구분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른바 '루저'라는 단어에는 그런 위안심리가 숨어있는거죠 - 그저 돈 몇 푼 쥐어주고 할 건 다 했다며 쓴웃음짓는 저 같은 사람들이 '현실적 사회변혁주체'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동들과 기층세력들에게는 그나마 '견딜만 한' 주장과 주체만이 남게되는 겁니다.
이러한 상황은 무엇보다도 슬픕니다. 하지만 현실이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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