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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님들은 스스로부터 진보적으로 변하세요

클라시커 2010. 12. 27. 23:31
제목만 보면 사뭇 진지한 얘기를 할 것 같지만, 그럴 일은 없다. 조국의 운명[각주:1]이 친일매국노 세력에 의해 - 나는 사실 그보단 유사 파시스트들이 더 무섭긴 하던데 - 풍전등화인 상황이라 여기고 계시든지, 아니면 스스로 혁명의 주체가 되기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그냥 상큼하게 뒤로가기를 누르면 된다. 왜냐하면 조국을 구하거나, 혁명을 하셔야 할 분들에게 이 글은, 읽기엔 시간만 낭비하는 글이니까.



모두들 해프닝으로 끝났다고 여기는 일 중 하나. 싸이월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SK컴즈가 돌연 약관 및 개인정보보호방침(이하 '개인정보 관련 규정')을 개정했었습니다. 새롭게 바뀐 개인정보 관련 규정에는 MAC어드레스를 수집한다는 조항이 반영되었었지요. 이 일로 한창 여론이 들끓었었어요. MAC어드레스는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식별정보와는 달리 영구적인게 아니어서 괜찮다는 주장도 있었고, 여튼 뭐든 수집한다는건 기분나쁘다는 주장도 있었어요. 또 공인인증서의 경우에는 발급할 때 MAC어드레스 뿐만 아니라 HDD의 하드웨어ID도 수집하는데, 이거면 양호한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었지요. 여튼 뭐 사람들이 막 탈퇴도 하고, 개인정보 보호 담당자에게 직접 전화도 걸어 성질도 내고 하니까 SK컴즈가 일단 개인정보 관련 규정의 개정을 보류하는 것으로 일단락은 되었더랍니다.

모두들 해프닝으로 끝났다고 여기는 일 중 다른 하나. 싸이월드 일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카카오톡을 서비스하는 IWLAB에서 문제가 났어요. 여기도 개인정보 관련 규정을 개정했는데, 글쎄 IMEI 등의 기기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 주민등록번호같은 개인식별정보도 수집하겠다고 선언한 거였어요. 싸이월드 사건에서 학습효과를 얻은 사람들이 이번엔 IWLAB에 전화를 했지요. 이번에도 논란이 일었어요. IMEI 같은거 가져가봐도 별 소용 없다. 주민등록번호 입력도 안했는데 무슨 개인정보 유출이냐. 막 와글와글했죠. 그래도 어쨌든 IWLAB 쪽이 사과문은 올렸어요. 대신 개정을 보류한 SK컴즈와는 달리,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성격이었죠. 뭐 그러니까 또 조용해졌어요. 내가 보기엔 별로 그렇게 납득할 만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모두들 해프닝으로 끝났다고 여길 일 중 하나. 제가 이번에 운이 좋아서 어떻게어떻게 동네 도서관 계약직이 되었어요. 전화를 받았는데, 내일 도장을 가져오래요. 그걸 왜 가져가냐고 물었더니, '그냥 막도장도 괜찮으니 가져와라'며 얼버무리더라고요.[각주:2] 솔직히 개인정보인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잖아요? 특히 동양권 국가의 경우엔 인감이 법적효력을 갖는 문화권이라 함부로 인감을 남에게 맡겨서는 안되는거거든요.[각주:3] 그렇다고 을 주제에 막 따지긴 뭐하니까, 일단 제가 쓰는 인감을 동사무소에 가서 신고하고 대신 막도장을 하나 파서 갖다주기로 했어요. 그럼 나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을때, 저 도장은 내 도장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니까요. 더불어 인감보호신청도 하기로 했어요.[각주:4] 근데 인감보호신청서에 보니까 '우무인'이 떡하니 있더라고요? 우무인이 뭐냐면, 오른쪽 엄지손가락 도장입니다. 갑자기 주민등록증 신청할 때가 생각나서 기분이 참 거시기해졌어요. 뭐, 그래도 전 아마 내일이 되면 우무인을 찍고 제 인감을 - 그것이 비록 신고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 남에게 주겠지요. 그렇게 안하면 귀찮고, 또 그게 '관행이니까요.'





아마 여러분들은 위 세 사례에서 노예를 발견했을거에요. 별다른 이유없이 내 개인정보를 요구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편하다는 이유로 또는 관행이라는 이유로 또는 다른 데서도 이미 하고 있다는 이유로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냥 자발적 노예인 셈이죠. 별로 문제는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근데 이런 사람들보다 더 열받는건 편하다는 이유로 저게 부당함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군소리 없이 내놓는 저같은 사람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의 대다수는 자칭 진보돌이들이 차지하고 있죠.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사실 영향권 내에서 거주하는 모든 개인에게 식별번호를 달아 '게토화'[각주:5]시키려는 시도는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거거든요. 사실 우파들 - 여기엔 자칭 우파 외에도 이견을 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 은 이런 데에 잘 안 나서려고 해요. 국가가 알아서 잘 관리할텐데, 그리고 이까짓거쯤 내가 포기한다고 해서 죽는게 아닌데 이 따위 일 때문에 내가 국가와 대적할 필요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죠.

하지만 진보돌이들은 다르죠. 얘네는 국가란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니까요. 이들에게 있어 개인정보의 무단수집에 저항하는 행위는 일종의 거룩한 의식과도 같습니다. 사실 일부 진보돌이들은 규정화하려는 국가의 시도 뒤에 자본이 있을거라 생각해요. 사실 자본이나 국가나, '게토화'를 통해 개인을 객체화하고 관리하고 분류하려는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막 더 저항하는거죠. '이건 국가란 허상과 맞서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자본과도 싸우는 일종의 성전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요.



아, 근데. 속칭 이 진보돌이들은 자신들의 아지트를 싸이월드에 만듭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이미 다들 싸이월드 아이디를 가지고 있으니, 모이기 편하다는 이유에서요. 게다가 문자요금/전화요금이 많이 나오니까 카카오톡을 이용해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그 뿐인가요? 주민등록증을 만드는 것도 아주 자연스럽죠. 물론 나름 진보라 해야 하니까, 주민등록증 만들러 가서 인장 찍은 이야기를 - 지금 저처럼 - 막 트위터나 블로그에 씨부려요. 그럼 좀 생각있는 사람인 것처럼 인증되니까요. 사실 주민등록증 안 만들면 불편하거든요. 편해야 하니까 만드는거죠.


물론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아 겪는 불편함을 모두가 수용할 수는 없어요. 여권같은 대체신분증이 있지만, 여권에는 유효기간이 있고 그 유효기간을 연장하기 위해선 '내 여권의 주인이 나'라는걸 인증하기 위해 또다른 신분증이 필요합니다. 근데 대부분의 기관에서는 신분증으로 보는 범위를 매우 좁게 잡거든요. 그런식으로 결국 주민증이 신분증 종결자 자리를 꿰차게 되죠. 그나마 이렇게 불편함을 겪는건 만 17세가 된 해에 지문날인거부를 한 분들에게만 해당되는거고요.

근데 싸이월드, 카카오톡 이딴 건 좀 의식적으로 안 쓸 수 있잖아요? 비정규직만 고용하는 악덕 기업, 동희오토가 만드는 모닝은 불매할 정신이 있는데 왜 불합리하게 내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업체의 서비스는 거부하지 못하나요? 위에서 남조선에서 아무 생각없이 개인정보 관련 규정에 동의를 아주 친절하게도 누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노예'라는 아주 몰상식하고 극단적인 칭호를 사용했지만, 사실 이 사람들은 봐줄 수 있어요. 얘넨 평소에 '그게 나쁘다'라고 말하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니들은 말하잖아요? 그게 나쁘다고, 그래선 안된다고, 바꿔야 한다고. 근데 왜 그냥 계속 써요?


모르면 공부하고, 노력하고, 의도할 일입니다. 니들부터 좀 진보하세요.
  1. 사실 조국의 운명은 조국 교수의 것이고, 서민의 운명 역시 서민 교수의 것입니다. 나는 왜 많은 사람들이 굳이 할 필요없는 걱정들을 저렇게 쓸데없이 심각하게 하는지 모르겠는 때가 많아요. [본문으로]
  2. 저녁에 아빠랑 이야기하다 안 사실인데, 인건비 지출을 위해서는 서류에 인건비를 지급받은 사람의 인감날인을 해야한다는군요. 근데 왜 내 시급 지급내역에 내가 날인하겠다는데 그 서류에 대신 날인을 하겠다는걸까요? 뭘 그런 친절까지야! [본문으로]
  3. 실제로 많은 고용주들이 이런 요구를 한다고 합니다. 때문에 이를 악용한 범죄 - 개인정보만 빼돌려 인터넷이나 휴대폰을 개통한다든지, 대포통장을 만든다든지 - 가 기승을 부린다고 하네요. 이건 누구 책임이게요? 이것도 이명박 책임이려나? [본문으로]
  4. 원래 어지간하면 동사무소에서 발급해주는 서류는 본인이 아니어도 대리발급이 되거든요. 인감증명성의 타인발급을 막는게 바로 인감보호신청입니다. 발급대상을 본인 및 본인이 허가한 사람으로 제한할 수 있죠. [본문으로]
  5. 사실 다수의 문헌들에서, '게토화'란 단어는 폭력적으로 고립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을 의미해요. 하지만 여기서 내가 쓰는 '게토화'는 일종의 교회 찌라시와도 같은 의미입니다. '머리에 666을 받으면 지옥간다'는 이야기, 많이 들어봤죠? 게토 내에서 모든 유대인들은 가슴에 다윗의 별을 달아야 했잖아요? 그런 상황 - 거대 주체에 의해 개인이 나열되고 분류되며 낙인찍히는 시도들 - 을 적절히 표현할만한 적당한 단어가 순간적으로 생각이 안 나서 이렇게 맘대로 차용해 씁니다. 좋은 단어 있으면 덧글로 알려주세요.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