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지금 왜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얼마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주제라 그냥 끼적끼적 써본다. 사실 시리즈물로 구상은 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얼마나 연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느긋히 재밌게들 읽어주시라.
일본 자본의 침투로 인한 경제예속화와 조선의 저항
1876년, 조선과 일본이 맺은 조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에는 개항장 내에 일본의 조계를 설정하여 일본 상인들의 조선 진출을 가능케한 내용이 있었다. 이에 1978년, 부산에 지점을 설립한 제일은행을 필두로 하여 많은 일본계 금융자본 역시 조선으로 앞다투어 진출한다. 1
조선의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이 자칫 일본에 대한 조선의 경제예속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여겼다. 마침 대한제국이 설립이 선포되며 실시한 광무개혁(1897년) 중 은행 설립을 통한 식산흥업정책이 있었으므로 이때를 호기로 여겨 이들 중 몇몇이 민족자본의 기치를 들고 조선은행, 한성은행 2, 대한은행을 설립하였으나 개점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폐점하거나 휴업하였다. 3
그러나 이후에도 은행설립을 위한 시도는 이어졌고 마침내 1899년 1월 30일, 그 노력의 결과가 빛을 발하니 이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은행 대한천일은행이었다.
△ 대한천일은행 창립청원서 및 인가서 (사진=서울특별시청 보도자료)
'조선사람 이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 팔 수 없다'
심상훈, 민병석, 민영기, 이용익 등 31명의 발기인과 김두승, 김기영 등 15인의 투자자가 모여 설립한 대한천일은행은 상인 자본과 행정관료의 합자회사라는, 전형적인 초기 한국 근대은행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천일은행은 일반고객을 상대하는 일반은행의 역할 외에도 황실 및 주요 기관의 곳간노릇, 즉 중앙은행의 역할도 겸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당초 은행의 공칭 자본금 5만 6천원 중 3만원은 광무황제가 친히 내탕금에서 내어줬으며, 나중에 자본금 불입에 난항을 겪자 황실이 직접 자본금을 투입, 영친왕과 내탕금을 관리했던 이용익이 각각 은행장과 부행장이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그랬으리라 여겨진다.
'조선사람 이외에는 대한천일은행의 주식을 사고 팔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는 대한천일은행의 정관은 유명하다. 이에 이 은행을 민족자본은행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전국 각지에서 민족자본만을 이용한 은행설립이 많이 시도되었지만 모두 좌절되었고 당시에는 대한천일은행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은행이다보니 그런 영예를 얻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설립 당시나 이후의, 설립자들의 면모를 좇다보면 안타까운 점이 없지 않은 것 역시 현실이다.
대한천일은행의 인적 구성
『제국과 상인』(이승렬 저, 역사비평사, 2007)에서는 대한천일은행의 설립자들을 "경강상인+반 독립협회 인맥"이라 분류한 바 있다. 투자자 중 김두승이나 김기영의 경우에는 대대로 서울상권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 계층이었으니, 경강상인의 후예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김두승의 경우에는 이후 고종의 밀명을 받고 한성전기회사의 공동 경영인이 되기도 한다.
발기인들은 역시 민씨 척족을 비롯한 고급관료들로 채워져 있는데, 이들의 삶이 설립 당시에도 그닥 '민족적'이지 않았다는게 함정. 대표적으로 초대 행장을 지낸 민병석은 학정을 펼쳐 평안감사 재직시절 조병세의 탄핵을 받은 이력이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으로부터 경술국적의 한 사람으로서 자작 작위를 수여받는다. 이토 히로부미와도 친해서 하얼빈에서 이토가 안중근에게 저격을 받아 사망하자 조문 사절로 나서기도 했다.
심상훈의 경우에는 민영환, 조병세와 함께 을사조약의 체결을 반대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 삶의 궤적이 그닥 '민족적'이진 않았다. 임오군란 시절에는 장호원(長湖院)에 은거하고 있던 명성황후에게 대원군의 납치소식을 비롯, 왕궁의 근황과 청·일 양국의 출병사실 등 서울의 형세가 호전될 것을 전달해주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시절에는 고종 일행이 경우궁(景祐宮)에 임시 거처하고 있을 때, 경기도관찰사로서 경우궁에 들어와 개화당에 합세하는 척 가장하고 몰래 왕에게 정변의 기밀과 개화당의 진상 등을 알려주어 고종 부처와 밀통, 사대당 인물들과 모의하여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 등을 움직여 행동을 개시하도록 하여 독립당의 혁신정부가 무너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어 동학농민운동 시절에는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이를 탄압하는데 앞장섰고 탁지부대신으로 있을때는 악화인 보조화를 주조하여 독립협회로부터 탄핵대상에 오르기에 이르니, 이 사람의 인생은 반동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 후
자, 이제 정리하자. 처음에 공칭자본금 5만 6천원과 불입자본금 2만 8천원으로 출발한 대한천일은행은, 이후 자본금의 불입이 여의치 못하여 국고금 5만원을 5년 상환기간으로 대여받았다. 물주가 바뀌었으니 경영진 역시 바뀌는 것이 인지상정. 이로 인해 1902년(광무 6) 3월, 영친왕과 이용익이 각각 은행장과 부은행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은행의 성격도 황실과 깊이 연관된 정치색을 띠게 되어 특수은행의 성격으로 바뀌었다. 1905년에는 금융공황과 더불어 자본의 약소성과 자체 경영상의 실패로 1년 동안 휴업상태로 빠지기도 한다.
1906년 6월, 자본금을 15만원으로 증자하고 취체역에 김기영, 윤정석, 조진태, 백완혁을 선출하였는데 이로서 대한천일은행은 관료-국가중심의 경영체제에서 상인중심 체제로 바뀌게 된다. 이는 은행 측에서 황실의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기도 했지만, 당시 국내에 상주하고 있던 탁지부 고문 메가타 다로지로가 꾸민 일이기도 했다.
메가타의 주선으로 정부로부터 25만원이란 거액을 무이자로 받게 된 대한천일은행은, 이후 한국의 제일은행이 되는가 싶었지만 역시나 메가타, 이즈미 등이 상임감리자로서 경영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게 되었다. 1910년의 경술국치 이후에 일제는 구 황실과 은행 간에 맺어진 채권-채무 관계를 일시에 정리해버리고, '대한'이란 용어를 은행명에서 뗄 것을 지시하기에 이른다. 결국 1년 후인 1911년, 대한천일은행은 상호를 조선상업은행으로 바꾸고 완전히 일본의 지도 하에 놓이게 된다.
더 쓰다간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서 여기서 정리. 기약없는 다음 시간엔 대한천일은행의 후신인 상업은행에 대해 서술해볼까 한다.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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