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記/2008, 유럽

7월 16-17일, 고대 그리스의 삶을 뒤쫓다 - 아끄로뽈리스와 고고학박물관, 제우스 신전

클라시커 2008. 7. 18. 07:39
  아테네에서의 본격적인 일정을 시작했다. 아마도 아테네에서 꼭 봐야 하는 것을 꼽아야 한다면, 반드시 '아끄로뽈리스'가 들어갈 것이다. 개인적으로 고대 헬라문명이 인류사에 우뚝 설 수 있는 이유가, 그 이상적 정치체제(직접민주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시민 각자가 주체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을때에 비로소 창조력이라는 것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복속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에 문명은 생겨나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닌데, 굳이 창조성을 발휘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신타그마 광장에서 메트로를 잡아 타고 아끄로뽈리 역으로 향했다. 한 정거장 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추후에 계속 걸을 것 - 원래 계획은 가이드북에 소개된 대로 아끄로뽈리스 관람 후 걸어서 신타그마로 걸어올 생각이었다 - 을 감안해서 처음은 가볍게 시작했다. 역에 내리니 사람들이 많다. 역시 죽기 전에 봐야 할 문화재란 명성에 걸맞은 분위기다.

  초입부터 극장이다. 디오뉘소스를 위해 지어진 극장. 바커스라고도 알려진 디오뉘소스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음주가무의 신이다. 때문에 상당히 많은 고대 헬라인들의 축제에서 디오뉘소스는 빠지지 않는 존재다. 아끄로뽈리스 일대가 한창 보수공사중이라 분위기는 좀 뒤숭숭하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블로그에 '튜닉을 입은 고대 그리스인들 사이에 현대 한국인이 카메라를 들고 서 있다'란 표현을 써놓은 것을 봤는데, 고대 그리스의 아우라 속에 푹 젖은 상황을 꽤 잘 설명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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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오르다보니, 어언 정상. 아끄로뽈리스의 맹주,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우리네 배흘림 양식과 유사한 엔타시스 양식[각주:1]의 기둥을 가진 것으로 더 관심을 끌게 된 그 곳. 그밖에도 바닥을 인위적으로 불룩하게 해서, 멀리서 보았을때 바닥이 평평하게 보이도록 한다든지 등의 다양한 미적 착시현상을 이용하고 있는데, 가히 최첨단 건축술의 산물이라 하겠다.

  완벽하게 보이는 건축물을 짓기 위한 이 노력은 아마도 이것 자체가 신께 바치는 제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량수전은 서방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여래를 위한 전각이고, 이것은 아테네의 주신(主神)인 아테나를 위한 신전이니까. 자신들이 사랑하는 신들을 위해 완벽한 것을 바치고 싶은 것은 '신앙인'으로서의 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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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교의 교회로 쓰였고, 투르크가 지배했을 때는 모스크로 쓰였으며, 베네치아 군에게 지배될 때는 탄약고로 쓰여 폭격을 받아 현재의 '폐허'가 되었다는 이야기 따윈 집어던지자. 우리는 원형 그대로의 파르테논도 사랑했겠지만, 지금의 '기둥들'도 사랑한다. 역사와 미학은 뗄레야 뗄 수 없지만, 굳이 비전문가인 우리가 건축물의 연혁을 줄줄이 꿸 필요는 없다. 나는 그래서 대영박물관에서도 이 모든 것을 다 봐야한다는 과욕을 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오늘 여기에서 그리스의 유물과 이집트의 유물, 아시리아의 유물, 페르시아의 유물을 구분할 줄만 알면 성공이다'라 생각하고 마음편하게 봤다. 그랬더니 더 많은게 보이더라. 마찬가지다. 욕심이 생기면 모를까. 그냥 지금은 단순히 아름다움만을 판단기준의 모든 것으로 삼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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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끄로뽈리스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보니, 올라서면 아테네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역시 '경외하라'는 통치자의 무언의 지시가 반영된 결과다. 늘 바라다보이는 높은 곳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경외감을 갖게 된다. 성당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신자들이 바라다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는 것, 그리고 히틀러가 '친애하는 아리아인들'이 우러러 볼 수 있도록 높은 연단에 올라섰던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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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르테논 신전 옆에는 에렉테이온이 자리잡고 있다. 아테네를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두고, 제우스는 아테나와 포세이돈에게 아테네 시민들 - 물론 그때는 아직 '아테네' 시민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테네란 이름이 아테나에게서 유래된 것이니까 - 에게 가장 유용한 것을 주는 내기를 하도록 시킨다. 물론 선택의 주체는 아테네 시민들이다.[각주:2] 포세이돈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삼지창을 휘둘러 샘을 솟게 했고, 아테나는 올리브나무를 길러 아테네 시민들에게 주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올리브 나무에 만족해했고, 그 올리브 나무를 아크로폴리스의 중앙에 심었다고 하는데 그 장소가 이 에렉테이온이다.



  아끄로뽈리스를 걸어내려와 고대 아고라를 구경했다. 아고라는 광장이다. 광장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넓은 장소'란 뜻이고 하나는 '열린 공간'이란 뜻이다. 고대 아고라는 이 두 가지 의미를 충족하기에 마땅한 곳이었다. 아탈로스 주랑과 몇 개의 신전을 거느릴 만큼 넓은 장소인 동시에, 수많은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한국의 광화문 역시 광장이다. 아니, 광화문은 이미 그 자체가 광장이었다. 광화문 앞에는 육의전이 들어서 자생적 자본주의의 가능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시장에서 비단 돈만 거래되던가. 말(言)도 거래된다. 백성들이 거래의 주체가 될 때에, 정치적 사안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은 커진다. 돈을 벌기 위해선 시류를 옳게 짚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많은 투자서적들을 보면, 반드시 경제신문을 읽을 것을 권유한다. 흐름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런 광장을 시민들보다는 국민을 선호했던 어떤 정치군인이 그 곳을 길로 바꿔놓고 권위의 상징인 세종문화회관을 지어놓아 폐쇄된 공간으로 바꿔놓았었을 뿐이다. 시민들이 5월에 그 곳을 '수복'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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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끄로뽈리스 관람을 마치고는 그냥 걸었다. 똑같은 길을 두 번이나 헤매서 지친 나머지 숙소로 들어와 빈둥댔다. 오늘 오신 분들이 야경을 보고 싶다해서 도미지기가 루트를 소개해줬다. 나보고도 가란다.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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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출이 과했던 모양이다. 보정을 했는데도 사진이 타들어간다. 뭐,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사진을 잘 찍지 못했을 때 느끼는 아쉬움은 '남에게 제대로 보여주지 못해서 느끼는 아쉬움'이다. 솔직히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진까지 들이대며 약올려야 할 이유는 없다.



  아테네에서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고고학 박물관으로 향했다. 문화재를 봤으니, 이제 관련 지식을 섭취해야 한다. 만두를 먹는데 껍질만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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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학박물관에서 걸어나와 국립정원을 걸었다. 도심에 이렇게 큰 정원이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다. 런던 역시 큰 도시답지 않게 녹지비율이 상당히 높다는데, 아테네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관광사업이 성공할 수 있는 원동력은 이런 자연자원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고 본다. 조경은 인위적이지만, 자연에 의존한다. 하지만 대운하는 자연을 만드는 작업이다. 둘 중 어떤게 더 친근감 있고 어떤게 더 위화감이 들지는 무척 자명하다.

  국립정원 앞에는 자페이온이 있다. 그리스 입법부가 고대 올림픽을 재건하자는 의미에서 처음으로 선택된 건물[각주:3]이라고 한다. 원래는 누군가의 궁이었다는데, 복잡한건 치워버리자. 건물 자체도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정원 또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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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페이온 앞에는 제우스 신전이 있다. 모든 신들의 아버지인 제우스가 아테나를 모시는 신전보다 아래에 있다니. 역시 아테네는 아테나의 도시가 맞긴 한 모양이다. 뭐, 역시나 장고의 세월을 겪은 덕에 원형은 보존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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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 신전에서 바라본 아끄로뽈리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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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제 중 하나인 하드리아누스는 제우스 신전을 통해 통치자의 권위를 한껏 세우고는 북서쪽에 '하드리아누스 문'을 세웠다. 아끄로뽈리스 방향에는 '여기는 테세우스의 도시, 아테네'라 써 있지만, 그 반대편인 제우스 신전 방향으로는 '그러나 이제는 하드리아누스의 도시'라 적혀있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광화문에 '여기는 조선인의 나라'라 써 있는 반대편에 '그러나 이제는 일본인의 나라'라 써 있는 셈인데 식민지의 아픔이야 뭐 다를게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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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어디서 많이 본 여인네가 있다싶어 곰곰히 따져보니, 산토리니를 가는 페리에 함께 탔던 여인네다. 엄마랑 함께 다니는 것 같더라. 예뻐서 찍어봤다. 뭐, 그 외에 딱히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1. 기둥이 아래서부터 얇아지는 경우에 멀리서 보면 흡사 가운데 기둥이 얇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기둥의 일정 지점을 불룩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 우리 건축에서 배흘림 양식이 적용된 대표적 사례는 부석사 무량수전이다. [본문으로]
  2. 그리스 신화가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이 올륌포스 산에서 거주하는 신들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리스 신화에는 다른 나라의 신화들에 비해 인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요소가 많다. 시도때도없이 바람일 피우는 올륌포스의 남신들을 기억하라! [본문으로]
  3. http://en.wikipedia.org/wiki/Zappeion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