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記/2008, 유럽

7월 18일, 그리스 아테네 - 차분했던 하루

클라시커 2008. 7. 19. 06:18

  오늘 하루는 사진이 없습니다. 일부러 안 찍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몇 군데를 돌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사진 찍는걸 깜빡하고 있었더군요. 그래서 그냥 말았습니다.

  하루의 시작은 국립미술관 관람이었습니다. 영국 여행부터 곰곰히 생각해보니, 제가 은근히 박물관-미술관 오타쿠더군요. 뭐, 사람마다 여행의 지향점이 다릅니다만 저같은 경우에는 좀 '남는 것'들을 보려고 하다보니 은근히 그런 쪽으로 기울어버린 듯 합니다. 쇼핑하는 것, 먹어보는 것도 물론 '남는 일'들입니다만 그건 어느때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계화가 가져온 좋은 일 중 하나죠. 뭐, 물론 '종주국'에 가서 먹어보고 사보는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국립미술관에서는 고야의 특별전시회를 하더군요. 물론 상설전시는 하고 있었습니다. 'Los Caprichos'의 첫번째 판을 페이지 별로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고야는 이 그림첩을 통해 당대의 주둥이만 까진 지식인들과 권력자들을 우화를 통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동판화로 세밀하게 표현된 당나귀들의 표정이 어찌나 통렬하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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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드 고야, '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



  미술관을 나와서는 전쟁 박물관에 갔는데, 돌다보니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을 위해 보낸 대한민국 무공훈장이 전시되어 있더군요. 수여장에는 대통령 윤보선과 내각수반 장도영의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아마도 5.16 쿠데타 이후에 수여된 모양입니다. 쿠데타 정권으로선 뭐 당연한 일이지요. 이런 식으로 대내외에 자신들의 정권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를 순방하며 정상들을 만난 일이나, 노태우가 북방외교랍시고 구 공산권에서 탈피한 나라들의 정상들을 만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국내에서의 취약한 정권의 정당성을 국외에서 찾아보겠다는 심산에서이지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어떤 놈 하나가 생각나긴 합니다. 그나저나 간만에 한국 신문 읽어보니, 국무총리란 작자가 참 우스운 인간이더군요. 노무현 때는 노무현 하나만 꼴통이었는데, 이 정권은 전체가 다 꼴통입니다. 박기완이란 자의 '쇠고기 문제 종결선언'이나 한승수의 국회발언은 진짜 이들이 얼마나 정치적 감각이 떨어지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딱 지들 주군만큼이나 삽질이나 해야 어울릴 대가리를 그것도 멋으로 달고 다니더군요.


  두 시에 문을 닫는다는 멋진 그리스 군인의 이야기를 듣고 향한 곳은 비잔틴-기독교 박물관입니다. 이지 지중해에는 무료라 되어 있는데, 성인은 4유로 학생은 2유로를 내고 들어가야 합니다. 겉에서 보기엔 조금 작습니다만, 지하를 통해 확장공사를 해서 꽤 멋진 컬렉션들을 자랑합니다. 개인적으로 비잔틴의 신비스러움에 매력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가보길 추천합니다. 가끔 그리스정교 사제들이 와서 즉석 강연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헬라어지만요.





  사진을 잘 찍는 형을 만났습니다. 저에게 자기의 사진을 찍어달라며 카메라를 내미는데, 그닥 내키지 않았습니다. 스스로가 인물사진은 별로 잘 찍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은 찍어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 찍어준 사진은 절대 성에 차지 않습니다. 물론 부탁을 하면 들어주는 것이 예의입니다만, 자기 성에 찰 때까지 들어달라고 하는 건 어떤 의미에서 보면 폭력이 아닌가 합니다.

  여행을 다니다 보니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혼자서 인도를 다녀온 사람도 만나보고, 이미 한 번 유럽을 돌아본 사람도 만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상하게도 권위적입니다. 아, 좋게 표현하면 '자신감 있다'겠지요. 이렇다 저렇다, 여기가 좋다 저기가 좋다라고 추천해주는 것... 물론 그것은 '정보'라는 이름의 가치있는 자산이 되곤 합니다. 사실 포털이라는 것도 그런 정보, 내지는 지식들이 모여 이루어진 하나의 네트워크 아니던가요. 그러나 여행의 참맛은 자기가 알아가는 것입니다. 부딪혀 보는 것도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자께서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선경험자들은 아는 것은 안다고 확실히 말하지만, 모르는 것은 모른다 말하지 못하고 끝을 흐립니다. 앞서 자기가 말한 '아는 것'이 빛이 바랄까 두려운 마음에서지요.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델피의 신탁소에서 자신이 가장 현명한 자라는 신탁을 받았을때 내뱉었던 말처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입니다. 저도 종종 경험할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간섭을 하고자 하는데, 이제부터는 팁과 자기과시의 틈에서 중용을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내일은 소크라테스에게 신탁을 내린 그 델피로 갑니다. 사진을 찍어올 것인지, 아니면 그냥 감상만을 가지고 올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자나 후자나 저에게는 모두 중요한 경험이며 자산입니다. 사진이 없는 것은 당신들을 실망시킬 뿐이지요.




  사진을 싣는 개인매체의 등장은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과 거리가 멀지 않습니다. 내가 본 것, 내가 겪은 것을 사진을 통해 자랑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기술과 결합하여 내놓은 새로운 과시체계지요. 싸이월드나 이 블로그와 같은 개인매체 중 다수는 졸부들이 고급차를 몰면서 돈을 뿌려대며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는 것을 세련되게 재탕한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모두가 쓸만한 정보를 생산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강박증에 시달려야 할 이유가 물론 없지요. 그러나 그 반대로 지나치게 많은 정보쓰레기들이 네트워크 상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