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記/2016, 쓰촨-동티베트

[3일차] 9월 4일, 상목거-즈메이야커우, 그리고 북망산(...)

클라시커 2016. 9. 13. 17:57

9월 4일 일요일.


이 날은 아침부터 비가 많이 왔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전날 민가 주인은, 우리가 애초 가려 했던 즈메이야커우까지 길이 험해 차량 접근이 어려우므로 오토바이를 타고 갈 것을 권했다. 그리고 즈메이야커우 외에 두 곳의 여행지를 추가로 추천해주었다. 즈메이야커우는 새벽에 올라가야 공가산[貢嘎山]의 전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밤늦게 미리 와서 자고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었다.


출발하기로 한 시간이 임박했으나,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역시, 전날의 여정이 힘들었는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기다렸다, 비가 그치기를. 비가 그치면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딱히 그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전 9시가 되었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다. 플랜B가 가동되었다. 다른 곳을 가려고 했던 차를 타고 우선 즈메이야커우로 올랐다. 어제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길은 험했다. 가는 길에 좌우로 간간히 공가산의 만년설이 눈에 보였다. 평소에도 잘 보여주지 않는 자태였기에, 비가 오는데도 보이는 것을 두고 '신이 허락했다'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때는 정말 그런 줄 알았다.



즈메이야커우에 도달할 즈음, 비는 그쳤다. 그러나 하늘은 구름 투성이였다. 사진으로만 보던 설산이 눈 앞에 있지 않다는 것에 - 나는 이때는 우기라 그러기 쉽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구태여 나중에 더 이야기하지 않을 것 같아 미리 적자면, 우리는 이번 여행 내내 설산 관망에 실패했다. 나중에 계속되는 설산 관망 실패에 J가 농담처럼 이야기한 것처럼, 스위스만 가도 널린 것이 설산이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섭섭한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오르다보니 절벽을 깎아 만든 집이 한 채 보였다. 아마도 야크 방목을 위해 만들어 둔 임시 거처 같았다. 오르는 길이 있길래 올랐다. 정말 대책없이, 아무런 계획없이 온 것 때문일까 하는 자책이 한 켠에서 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계단을 올라 집 뒤로 난 구릉을 따라 걸어 올랐을때, 넓게 펼쳐진 초원과 그 위에 드문드문 피어있는 에델바이스를 보고는 그 자책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날씨가 좋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그 순간의 만족할 부분을 찾아 즐거워 할 줄 알아야 했다.


초원에서 숨을 돌릴 때 저 멀리서 구름이 걷히며 만년설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의 카메라로는 잡히지 않는 그 먼거리를 애써 잡았다.



K가 산 끝자락을 보더니 능선을 따라 올라보자고 말했다. K는 씩씩하다. 아니,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유베날리스의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말. 나는 한때 이 말을 비웃었지만, 요즘 들어 날이 가면 갈수록 망가지는 스스로를 보며 다시금 해당 경구를 떠올리곤 했다. K는 이 경구에 걸맞는 사람이었다. 그의 무한긍정주의는 결코 막연한 것이 아니었다.


능선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아래쪽으로 호수가 그려졌다. 석회암 호수였다. 사진으로 본 구채구와 같은 석회암 호수. 다만 물빛이 파랗거나 빨갛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특정 미네랄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만족할만한 풍경이었다.



내려올 즈음에 내 이마에는 두 대의 대못이 박혀 있었다.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이 이후에 차로 한 곳을 더 갔는데 기억이 없다. 설산을 관망할 수 있다는 어딘가에 또 올랐지만 내게는 그저 북망산일 뿐이었다. 문득 고산병은 저지대로 내려가는 것 외에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내고, 스스로 다시 청두로 내려가야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문득 '쓸쓸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으레 어디서든 드는 생각이었다. 한국이었어도 별반 차이없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누구와 함께 하는 것에서 큰 만족감을 느껴본 일이 없다. 특히 또래집단에서 더 크게 드는 생각이었다. 나는 그들에 비해 즐길 줄 몰랐다. 그들이 신나하는 것에 나는 큰 의미를 둘 수 없었다. 언제나, 나는 어떤 현상을 보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느낌과 생각을 되먹임하며 다시 그것을 이미지로 만드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그 풍경 너머의 의미를 찾고 싶어했다.


내가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나는 내 묘비조차도 적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묘비에 들어갈 수 있는 글자는 고작 현상을 묘사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 즐겨야 할 때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배회하며 내게 맞게 재정의할 방법을 찾지 못해 좌절하고 슬퍼하는 것이 이제까지의 내 인생이었다.


우울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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