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6일 화요일.
이 날은 아침부터 징징대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난 며칠간 계속 징징댔더니 모든게 다 망가져 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왕 휴가를 온거라면 즐겁게 보내다 가는 것이 내게 큰 도움이 되리라는, 다소 익숙한 생각을 했다.
목적지도 괜찮아 보였다. 동티베트를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딴빠의 자쥐짱짜이(또는 '갑거장채')를 꼭 가곤 했다. L은 만들어진 관광지라면 일단 기함을 하며 피하려고 애썼지만, 나는 만들어진 관광지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여기를 개발했을 때 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행정적 판단이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나와 L이 참 다르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한 회사, 한 팀에서 인턴을 하면서도 익히 알려진 바긴 했지만, 나와 L은 성향이 정말 달랐다. 까지기는 커녕 완전 쑥맥인 나와 달리, L은 경험도 많고 제대로 운영할 줄 알았다. 완전함을 바라며 기획에 기획을 거듭하는 나와 달리, L은 확신만 있으면 불확실성에도 과감하게 베팅할 줄 알았다. 나는 정돈되고 조용하며 체계적인 것을 좋아했지만, L은 정돈되지 않고 조용하지 않으며 체계적이지 않은 날것을 더욱 선호했다. 이 둘이 한 자리에 모여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둘 중 하나를 의미했다. 내가 참거나, 아니면 L이 참거나. 나는 전자라고 생각하지만, L은 후자라고 생각하겠지.
딴빠를 가는 길에 또다시 야라설산 풍경구를 지났다. 오늘은 아예 풍경구 안까지 들어가봤다. 엊그제 블로깅 중에서 야라설산 풍경구 내에 설산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는 것을 언뜻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마주치는 건 그저 돌밭 뿐이었다. 심지어 고도도 내려가는 느낌이라 어느 정도 가다가 멈췄다.
차가 선 곳 옆에는 야크 떼가 있었다. L과 J, K는 야크 떼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저 뒤에서 야크를 보는 그들을 보며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고양이와 심각하게 귀여운 것으로 판명된 소수의 동물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대체 저 무식하게 털 날리는 소가 뭐가 저렇게 좋은지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들을 뒤로 하고 나는 더 깊은 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조금이라도 더 설산에 가까이 갈 수 있을까봐. 그리고 울창한 침엽수림이 마치 북방 유럽에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아직 북유럽은 가보지 못했지만 피오르드라도 있을성하면 이곳이 바로 노르웨이가 아닐까 할 정도로 깊은 숲이 눈 앞에 펼쳐졌다. 아마도 이때부터, 조금은 이 동네에 대한 내 평가가 바뀌었던 것 같다. 이 종잡을 수 없는, 한없이 얕은 감정의 동요라니.
딴빠까지 가려면 좀 더 가야했다. 서둘러 차에 타서 딴빠로 향했다. 야라설산에서 딴빠로 가는 길에는, 우리가 빠메이 인근에서 보았던 시커먼 기암괴석이 줄을 지어 있었다. 서양에도 좀 알려졌는지, 해당 구간을 비박 가능한 장비를 싣고 자전거로 질주하는 소수의 서양인들도 목격했다. 그들을 보며, 인간에게 과연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해 문득 생각했다. 인간이 쟁취하는 보람이란 것에 공인(共認)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과연 이들의 행위가 그 공인받은 보람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쓸모없는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 어차피 내가 이 생각을 입밖에 내놓은 것은 오늘이 처음인데.
사상의 자유는 강요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며, 어차피 나는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든 큰 관심이 없다. 그들이 내게 관여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들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런 내가 너무 개인주의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타인의 삶에 쓸데없이 관여하는 것보다 - 그리고 그것에 대해 지적이라도 당하면 '섭섭하다'며 되려 징징대는 것보다 -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렇기 때문에 혼자인가 싶긴 하지만, 누가 뭐라겠는가?
딴빠에 도착해서는 점심을 먹고, 다시 인근의 자쥐짱짜이로 향했다. 입장료는 50원. 여기 와서 처음 내는 입장료였다. J와 K는 뭐가 이렇게 비싸냐며 툴툴댔지만, 사정을 아는 L은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라며 다독였다. 나는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같은 말을 두 번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입장료에 대한 평가는, 이후 갑거장채 전망대에 올랐을 때에 반전되었다. 날씨도 좋았다. J는 기분이 좋았는지 덩실덩실 춤을 췄다.
중국 역사에 관심이 많은 L은 여기가 바로 그 '다두허 전투'가 일어난 곳이 아니냐며 근처에서 홍군 관련 유적지를 발견하고는 무척 신나했다. 나는 L의 이런 면 때문에 흠칫 놀랄 때가 많다. 가끔보면 정말 쓰레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신나게 살지만, 자신이 관심있는 것에 관련해서는 정말 해박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거기에 그의 훈훈한 외모와 말솜씨까지 더해지면 그것을 듣는 누구나 그의 말에 경청한다. 벌써 J와 K, 그리고 나까지. 그의 신도들이 이 여행을 감행한 것을 보면 틀린 평가는 아닐 것이다. 1
이제 여행의 최종 목적지라 할 수 있는 써다[色達]로 향한다. 바이두로 찍어보니 위로 올라가는 것보다 온 길로 되돌아가다가 빠메이에서 따오푸로 가는 것이 3시간이나 절약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다. (근데 지금 생각하면 그냥 위로 갔어도 될 것 같다.) 따오푸에서 1박을 결정하고 다시 땅거미가 지는 길을 달려갔다. 나는 오늘도 역시나 조수석에서 잘 수가 없었다.
이제 내일이면 사진에서 본 그 곳을 볼 것이었다. 나는 이 날을 위해 이 여행을 결행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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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알고보니 여기가 아니라 루딩이었다. 괜히 '다두허의 루딩 교'가 아니었던 셈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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