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전을 생각한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인천에서 두바이로, 두바이에서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를 빌려 로만틱가도로, 드레스덴으로, 베를린으로, 그리고 함부르크로 쏘다니다가 다시 함부르크에서 두바이로, 두바이에서 인천으로 왔던 여정. 베를린에서는 조성진의 공연을 봤고, 라이프치히에서는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프로그램을 보며,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 되는 2020년에 독일을 재방문하겠다고 말했었다. 제철이라는 슈파겔을 시장에서 사다가 에어비앤비로 빌린 집에서 이래저래 삶아도 먹어보고 볶아도 먹었었다. 함부르크로 가는 길에 있던 슈베린에서는 오래된 슈베린 궁에 들어가 튤립은 어떻게 심는지, 실제 현지인들은 슈파겔을 어떻게 먹는지 보려고 슈파겔 수프도 사서 먹었었다.
코로나 19가 지배하는 지금 떠올려 보면 정말 꿈만 같은 길이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는 동안 나도 변화가 많았다. 삐걱대던 여자친구와는 2020년 초에 헤어졌다. 헤어지기가 싫어서 여자친구가 근무하는 지방까지 퇴근 후에 내려가 무릎도 꿇어보고 싹싹도 빌어봤다. 냉담하게 돌아서는 그녀를 보며, 나도 아무렇지도 않을거라는 오기가 들기도 했다. 그리워할 틈도 없이 새롭게 짜인 조직에서 좌충우돌하며 보냈다. 떠나버린 사수가 남긴 빈 자리는 내가 떠나보낸 여자친구의 빈 자리를 느끼기 쉽지 않게 컸다. 해보지도 않았던 일들을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억지로 배워갔고, 졸지에 팀에서 가장 오래된 사람으로서의 역할도 해야했다. 아무 책임감도 없이 만년 신입사원으로 살 것 같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니 벌써 5년차였다.
회사 선배가 소개팅을 시켜줬다. 첫번째 만난 분은 좋은 분이었다. 활동적이었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두 번 만나고 '동네친구가 좋겠다'며 까였다. 두번째 만난 분도 좋은 분이었다. 이미 본인이 걸어본 길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고 이직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첫번째 만난 분과 같은 매력은 없었지만, 내가 기댈 수도 있겠다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분과도 한 번 만나고 까였다. 이후에 소개해 준 선배를 만나서 벼락같이 자학개그를 했던 거 같다. 운전해서 가느라 술도 못 마시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며 계속 이야기했지만 자학개그가 끊이지 않았던 거 보면 절대 아무렇지도 않았나보다.
문득 창 밖을 보다가 숨겨둔 위스키를 꺼내 한 잔 마셨다. 보통 때는, 큰맘 먹고 한 잔 마시려고 따랐다가도 첫 입에서 돌아오는 진한 오크향이 어색해서 코를 잔뜩 찡그리는 술이었는데 오늘은 왠지 달았다. 혼자가 싫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전 여자친구와 두 번의 소개팅 상대의 얼굴을 떠올렸다. 혼자가 싫어도 혼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도 했다. 혼자 지내는게 그렇게 싫다면 상대의 장점보다는 단점에 집중해야 했고, 내 단점보다는 장점을 살려야 했으며,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보다는 내가 마음에 드는 부분에 대해서 더 마음을 열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 하나도 하지 않았고, 그저 이기적으로만 생각했다.
그저 그런 시시껄렁한 자책을 하다 이내 혼자 잘 지내보기로 했다. 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아무와도 잘 지낼 수 없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 사회적인 사람도, 따뜻한 사람도 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내가 달랐기 때문에 어느 한 명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하고 그것을 인정해주길 바랐어야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를 만들기 위해 나는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전 여자친구는 그게 정말 싫었다고 했다. 아마 최근에 만난 두 분도 그것에 대해서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올 한 해를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말하기에는 벌써 반이 지나고 있다. 남은 반 년은 잘 지낼 수 있을까. 남은 반 년은 쓸데없는 데에 시간 낭비하지 않으며 오롯이 내 자신을 사랑하며 지낼 수 있을까. 그렇게 사랑하며 주변을 정리하고 그 빈 자리의 여유로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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