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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아트센터 - 용인, 정말로 '세계최고 선진용인'에 한 발짝 다가서다

클라시커 2008. 10. 18. 21:16



  백남준 아트센터가 문을 열었다. 백남준의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란 평 덕택에 완공 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듬뿍 받았던 프로젝트가 드디어 그 결실을 맺은 것이다. 아트센터를 짓겠다는 경기도청 측의 제안에 백남준은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의 작품 2000여점을 선뜻 내놓았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 이 기증은 백남준의 사후, 백남준의 유산 관리인이었던 장조카와 경기도청 간의 법적분쟁을 불러왔지만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백남준 아트센터에 대한 세간의 이목을 더욱 집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 아트센터가 위치한 용인은 백남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이와 같은 국보급 시설이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아트센터의 옆에 위치한 경기도박물관 때문이다. 인구 수로나 크기로나 국내 최고인 경기도청으로서는 도 시설물의 안배를 하면서, 두 시설의 시너지 효과를 이끌어내어 비교적 효율적인 결과를 내보겠다는 포석이었을테다. 더군다나 수원IC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비교적 타 시도에서 접근하기 쉽다는 점도 한몫했었을 테고.

  개관일부터 내년 2월까지 이 곳에서는 'Now JumP'란 제목으로 백남준 페스티벌이 열린다. 백남준 아트센터 측에서 제작한 유인물을 보면, 이솝우화 중의 한 구절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지금 뛰어라!"에서 따왔다고 한다. 나름 관념이 아니라 실행과 혁신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고 아트센터 측은 말하고 있는데, 이솝우화의 그 구절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말하는 건지 모르는 나같은 범인의 눈으로서는 그저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생각 뿐이다. (난 이솝우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사실보다, Now JumP 속에 백남준의 이니셜을 집어넣었다는 게 더 재미있었다.)


  여하간 용인시와 경기도청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개관 후에 이곳을 방문했던 것 같다. 블로그들에도 이 아트센터를 다녀온 이야기가 많고, 기사들도 꽤 많은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다녀온 후에 개인적으로 개관일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관일에 부랴부랴 대려다보니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아트센터는 공사중이다. 부대시설은 완공된 것이 하나도 없고, 심지어는 작품 몇개도 설치 중이었다. 이보다 관람객으로서 황당했던 일은, 관람을 방해하는 협력업체 직원들이었다. 비디오도 찍고 사진도 찍는 것으로 보아, 대충 아트센터 홍보물을 제작하거나 홈페이지에 올릴 VR를 만드는 작업을 하기 위한 것 같던데 이 사람들의 활동은 결론적으로 관람객들이 백남준의 작품을 그윽하게 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있었다. 홍보영상 만들러 와서 손님 떨어내는 일을 하고 있었던 건데, 개관일을 조금 늦추더라도 그런 그야말로 '사전 작업'은 개관 전에 마쳐주는게 좋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건강에 대한 문제도 있는데, 완공된 지 얼마 안 된 새 건물이라 실내에서는 온갖 화학약품의 냄새가 비교적 강렬하게 나고 있었다. 이것의 정점은 스테이션2에 있는 퍼포먼스 장이었는데, 일반 관람실과 달리 이곳은 밀폐되어 있는 곳이 많아 퍼포먼스를 구경하러 갔다가 눈이 따갑고 코가 매워 눈물을 흘릴 여건이 참으로 잘 되어 있었다. 이런 문제들도 개관 전에 해결할 방법이 꽤 많았을 텐데, 그저 성과를 내고자 하는 행정의 실수로 인해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문화란 것은 단지 성과를 통해 평가되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이 곳은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미디어 아티스트로서의 백남준이 아닌 다른 얼굴의 백남준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백남준의 대표작인 '달은 가장 오래된 TV'부터 시작해서 'Elephant Cart' 등 그의 미디어 아트들이 자리를 잡고 있긴 하지만, 그외에도 그의 글씨 · 그림과 같이 '유형의 예술'들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더불어 페스티벌 기간 중에는 생전에 그와 교류했던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자아로서의 백남준과 대상으로서의 백남준을 융합해서 만나볼 수 있다. 백남준에 대한 다양한 조합을 해 볼 수 있는 것인데, 그에 대해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 전시회를 다녀와서 함박웃음을 지을 것이다.


  이밖에도 건물 자체가 볼 만하다는 점도 이 곳을 꼭 찾아봐야 하는 점 중 하나다. 건축가 크리슈텐 쉐멜과 마리나 스탁코빅의 설계로 지어진 이 아트센터는 그랜드 피아노를 형상화했다고 알려진다. 백남준, 그의 전위예술의 시작이 음악가 존 케이지와 맞닿아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기막힌 설계가 아닐 수 없다.

  누군가는 백남준이 앙드레 김과 같이 국내용 '세계적인 아티스트'인 줄 알았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마음이 싹 바뀌었다는 말을 했다. 물론 우리나라의 언론들이 그런 플레이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의 경우에는 아니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와 교류했던 예술가들과 그의 예술적 고민이 그가 단순한 국내용 아티스트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한국인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세계에서 살았던' 코스모폴리탄의 생애를 우리 동네에서 기릴 수 있어 행복하다. 또한 한국이 미술의 불모지가 아님을 이야기할 수 있어 좋다. 백남준 아트센터는 본연의 임무말고도 이런 정치적 사명을 띄고 있어 어깨가 무거울 것 같다.


잡설
말로만 '세계최고 선진용인'을 불러대서 한참을 비웃고 다녔는데, 이번에 용인시는 한 건 제대로 해낸 것 같다. 지방세가 아깝지 않다.




수원IC에서 나와 용인방향으로 진행, 국도 42호선을 따라 가다보면 안내표지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