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아테네에서 만난 형과 델포이를 함께 간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국제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되었다. 그 형님 말씀이, 푸틴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다. 잠자던 불곰이었던 러시아를 다시 깨운 사람이기 때문에 대통령 임기 후에 총리직을 수행하게 되었으니, 그렇지 않냐는 거였다. 뭐, 따지고 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가관이었던 것은 그 말 뒤에 이어진 이야기였다.
"푸틴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본 러시아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푸틴을 총리에 옹립한거야. 교수님이 이야기 해 주신 건데, 실제로 푸틴 임기 전에 각 사회단체와 국민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푸틴에게 또다시 권력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생각한 묘안이 바로 총리 임명이라 하더라고. 역시 큰 나라는 뭐가 달라도 달라."
정말 간만에 만난 '나이브'한 사람이었다. 임기 말에 현 러시아 대통령인 메드베데프를 자신의 후계자로서 지목한 사람은 푸틴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가 왜 굳이 메드베데프를 지목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도 없다. 하다못해 민주정에 무식한 한나라당 의원들도, 정권 초에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참여를 놓고 '푸틴식 상왕정치'라 했으니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는거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런 사람이 있다. 그리고 문맥상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신화'를 믿는 교수란 자들도 여전히 있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1
푸틴의 총리 집권은 전형적인 독재의 메커니즘을 쫓고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독재자들은 취임 초에는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국민이란 사람들이 그에게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나의 처지를 국내적으로든, 세계적으로든 지금보다 높게 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아리아인의 영광'을 외치며 88.1%의 지지를 받고 총통에 집권했으며, 김일성은 죽을 때까지 찬성률 99%라는 경이적인 지지율로 주석 생활을 영위했다. 나폴레옹은 어땠는가.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며 진보의 최전선에 섰던 프랑스 인민들을 전쟁의 포화로서 속이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우리의 박정희 역시 유신헌법을 통해 영구총통에 집권할 때 거의 10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받았었다. 그 형은 말했다. 이들은 총칼로 위협했기 때문이지만 푸틴은 그렇지 않았다고, 정말 자발적이었다고. 그러나 비교적 성공하지 못한 독재자인 박정희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앞의 두 인물은 정말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지지를 통해 집권한 사람들이다. 히틀러와 김일성이 연설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물론 그들을 좋게 보지 않는 입장에서 '당시의 분위기가 사람들을 그렇게 이끌었다'고 평가절하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그것이 조작되었건 어쨌건 간에 분명히 그 당시에 그 사람들은 감동했다. 감동은 인위적일 수 없다. 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지만, 그럼에도 이런 판단 착오들이 계속되는 이유는 모든 인민들이 비판적 사고 능력을 가지고 못한 탓이 물론 크다. 그러나 그 책임을 그들에게 물을 수는 없다. 생산력을 극대화해야 살아남는 작금의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런 소양을 가질 수 없다. 우선 비판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상황의 모든 것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천재가 아니고서야 직면한 상황에 대해 그때그때 명민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과 깊은 사유가 동반되어야 하는데,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급급한 이 사회에서 그러한 느긋함을 갖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연병장 한 켠에서 수없이 벽을 쌓았다가 무너뜨리는 군인들과 동일한 지위에 서 있다. 생각하지 않아도 생명을 부지하는데 지장이 없으면서도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체제 하에서는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논의를 하다보면, 결론적으로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되는데 그건 판단 착오다. 지지하는 기층민중이 없는데, 어떻게 혁명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옆길로 새는데, 이 땅에서 진보정당이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지나치게 민중을 신성시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심하게 말하면 기득권 정당들은 민중을 본능적 존재로 상정하고 공략하는데, 오직 진보정당만이 그들을 '시민'으로 대하고 있다. 물론 모든 인민은 제 나름대로 위대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고쳐나간다. 이명박을 과반수 가까이 지지했던 사람들이 한순간 촛불을 들고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나 그것이 보다 높은 차원의 가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기적인 이유에서 나온 것인지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 본능은 나쁘지 않지만, 본능만을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푸틴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본 러시아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푸틴을 총리에 옹립한거야. 교수님이 이야기 해 주신 건데, 실제로 푸틴 임기 전에 각 사회단체와 국민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푸틴에게 또다시 권력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생각한 묘안이 바로 총리 임명이라 하더라고. 역시 큰 나라는 뭐가 달라도 달라."
정말 간만에 만난 '나이브'한 사람이었다. 임기 말에 현 러시아 대통령인 메드베데프를 자신의 후계자로서 지목한 사람은 푸틴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가 왜 굳이 메드베데프를 지목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도 없다. 하다못해 민주정에 무식한 한나라당 의원들도, 정권 초에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참여를 놓고 '푸틴식 상왕정치'라 했으니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는거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런 사람이 있다. 그리고 문맥상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신화'를 믿는 교수란 자들도 여전히 있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1
푸틴의 총리 집권은 전형적인 독재의 메커니즘을 쫓고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독재자들은 취임 초에는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국민이란 사람들이 그에게 지지를 보내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나의 처지를 국내적으로든, 세계적으로든 지금보다 높게 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아리아인의 영광'을 외치며 88.1%의 지지를 받고 총통에 집권했으며, 김일성은 죽을 때까지 찬성률 99%라는 경이적인 지지율로 주석 생활을 영위했다. 나폴레옹은 어땠는가.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며 진보의 최전선에 섰던 프랑스 인민들을 전쟁의 포화로서 속이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우리의 박정희 역시 유신헌법을 통해 영구총통에 집권할 때 거의 10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받았었다. 그 형은 말했다. 이들은 총칼로 위협했기 때문이지만 푸틴은 그렇지 않았다고, 정말 자발적이었다고. 그러나 비교적 성공하지 못한 독재자인 박정희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앞의 두 인물은 정말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지지를 통해 집권한 사람들이다. 히틀러와 김일성이 연설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물론 그들을 좋게 보지 않는 입장에서 '당시의 분위기가 사람들을 그렇게 이끌었다'고 평가절하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그것이 조작되었건 어쨌건 간에 분명히 그 당시에 그 사람들은 감동했다. 감동은 인위적일 수 없다. 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지만, 그럼에도 이런 판단 착오들이 계속되는 이유는 모든 인민들이 비판적 사고 능력을 가지고 못한 탓이 물론 크다. 그러나 그 책임을 그들에게 물을 수는 없다. 생산력을 극대화해야 살아남는 작금의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런 소양을 가질 수 없다. 우선 비판적으로 사고하기 위해서는, 상황의 모든 것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천재가 아니고서야 직면한 상황에 대해 그때그때 명민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과 깊은 사유가 동반되어야 하는데,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급급한 이 사회에서 그러한 느긋함을 갖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연병장 한 켠에서 수없이 벽을 쌓았다가 무너뜨리는 군인들과 동일한 지위에 서 있다. 생각하지 않아도 생명을 부지하는데 지장이 없으면서도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체제 하에서는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논의를 하다보면, 결론적으로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되는데 그건 판단 착오다. 지지하는 기층민중이 없는데, 어떻게 혁명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옆길로 새는데, 이 땅에서 진보정당이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지나치게 민중을 신성시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심하게 말하면 기득권 정당들은 민중을 본능적 존재로 상정하고 공략하는데, 오직 진보정당만이 그들을 '시민'으로 대하고 있다. 물론 모든 인민은 제 나름대로 위대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고쳐나간다. 이명박을 과반수 가까이 지지했던 사람들이 한순간 촛불을 들고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나 그것이 보다 높은 차원의 가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기적인 이유에서 나온 것인지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 본능은 나쁘지 않지만, 본능만을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 이전 글에서 나는 이 '나이브naive'를 내 나름의 조작적 정의를 통해 사용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두지만, 내가 쓰는 나이브함이란 절대 순수하다는 뜻이 아니며 오히려 멍청하다는 뜻에 가깝다. 그나마도 이것은 그 '멍청하다'를 더 비꼬아 말하고 싶은 뉘앙스가 들어간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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