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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도상에 관한 몇 가지 코멘트 - 영화 '브이 포 벤데타'를 보고 (시안)

클라시커 2008. 12. 4. 21:49

  한양대의 임지현 교수는 역사상 모든 독재 정권이 다 대중의 암묵적 동의하에 건설되었다는 ‘대중독재론’을 펼친 바 있다. 애초에 이 영화를 접하게 된 것은, 순전히 브이가 지니고 있는 대중관이 이 임지현의 대중독재론과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은 이런 시시껄렁한 나의 잡학적 호기심에서 발동했다.

줄거리

  미래,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2040년 영국. 규범을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거리 곳곳에 카메라와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모든 이들이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평온한 삶을 유지한다.

  어느 날, ‘이비’라는 소녀가 위험에 처하자 어디선가 한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다. 재빠른 칼놀림, 명석한 두뇌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가진 남자는 웃기게도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고전풍의 옷을 입고 있다. 그의 이름은 V. 정중히 이비를 데리고 한 건물의 옥상으로 간 V는 연방재판소의 장렬한 폭파장면을 이비에게 선보인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가이 포크스와 V

  가이 포크스는 1605년, 영국 의회 의사당을 폭파하려다 발각되어 사형당한 인물이다. 당시 엘리자베스 1세와 그의 후계자 제임스 1세는 성공회를 국교로 삼고, 가톨릭을 탄압하는 정책을 폈는데 가이 포크스가 의사당을 폭파하려 한 이유는 바로 이 정책에 반하여 혁명의 실마리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가톨릭을 믿는 귀족의 밀고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의 이 시도는 현대 영국에 이르러서도 하나의 축제로서 기억되고 있다. 그것이 단순한 테러 행위에 지나지 않았는지, 아니면 억압하는 정부를 전복하고 새 시대를 열려는 일종의 혁명 행위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영국 사학자들 또는 영국 인민들 간에 서로 다른 의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둘 모두 가이 포크스가 제 나름대로 옳다고 여기는 신념을 가지고 그 일을 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V는 이 신념을 2040년의 영국 인민들에게 일깨우고자 한다. 그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거사일을 가이 포크스가 의사당을 폭파하려 했던 11월 5일로 잡은 것은 그 때문이다. 가이 포크스는 단 하나의 가치만을 강요하는, 폭력적인 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그리고 그 시도가 거의 성공할 뻔했던 최초의 개인이었다. 그가 방송국을 장악하고, 비상 라인을 통해 전 영국 인민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면서 한 이야기들은 V가 가이 포크스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지를 잘 드러낸다.

…… (전략) 그 진실이란 이 나라가 단단히 잘못됐단 겁니다. 한때는 자유로운 비판과 사고, 의사표현이 가능했지만 이젠 온갖 감시 속에 침묵을 강요당하죠. 어쩌다 이렇게 됐죠? 누구 때문입니까? 물론 가장 큰 책임은 정부에 있고 정부는 그 대가를 치르겠지만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한건 바로 여러분입니다. (중략) 어젯밤 저는 침묵을 깼습니다. 재판소를 파괴해 조국에 잊힌 가치를 일깨워줬죠. 400여 년 전, 한 위대한 시민이 11월 5일을 우리 뇌리에 각인시켰습니다. 눈을 가리고 살았고 정부의 범죄를 알지 못한다면 11월 5일을 무시하고 지나가십시오. 하지만 저와 생각이 같고 내가 느끼고 추구하는 것에 공감한다면 들고 일어나십시오. (후략) ……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V

  ‘몽테크리스토 백작’,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에게는 ‘암굴왕’이란 제목으로 잘 알려진 이 소설은 1845년 알렉상드르 뒤마에 의해 창작된 소설이다. V는 이 소설을 토대로 한 영화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 영화 역시 단순히 언급된 수준을 넘어, 다양한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V는 현대적 의미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다. 그는 시민들에게 각성할 것을 촉구하는 한 편으로, 그를 수용소에 가두고 생체실험을 가한 5인의 사람을 찾아 차례차례 복수를 진행한다. 이를테면, 그에게 혁명이란 일종의 복수를 위한 수단이었다. 때문에 그의 신념은 종종 이비에게 의심을 받는다. 파시즘에 입각한 현 정권을 타도한다는 고결한 목적을 내세워, 자신의 개인적 복수를 정당화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마치 사랑을 잃은 복수를 하겠다며 그를 감옥으로 내보낸 세 사람을 괴롭히는 과정에서, 연인 메르세데스의 아이를 제물로 이용하는 에드몽 당테스처럼 말이다.

  하지만 끝까지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V가 같은 길을 걷지는 못한다. 이비가 그를 잠시 떠난 이후에, 브이는 ‘자신의 나무’가 없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영화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엔딩에서 에드몽 당테스는 연인과 함께 나무에 앉아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 나무에 올라갈 수 있느냐는 한 청년의 질문에, 에드몽 당테스는 ‘자네는 자네의 나무를 찾아가게’라 말하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V에게 여기서의 ‘나무’란 곧, 복수 후에 그에게 다가올 어떠한 만족감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는 괴물과도 같은 자신에 대한 자기증오를,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표출로 풀어헤치려고 했으니까. 그러나 최후의 다섯 번째 인물을 처치한 후에, 그는 문득 자신 역시 앞서 자신이 처리한 5명 그리고 그들이 창조한 이 전체주의 사회와 함께 사라져야 할 한 부분임을 깨닫는다. 복수가 자행되어도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의 체제를 파괴함으로서 더 이상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차이코프스키, ‘1812년 서곡’

  첫 장면에서 등장하는 연방재판소의 폭파장면,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의회 의사당의 폭파장면 모두 한 작곡가의 이 곡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

  차이코프스키의 창작 노트에는 이 곡을 작곡한 배경이 나와 있다. 프랑스의 제1차 제정 당시, 나폴레옹은 전 유럽을 제패하겠다는 꿈을 갖고 마침내 러시아로 진격한다. 이에 러시아 정부와 러시아 인민들은 프랑스 군에 맞대응을 하는 대신, 수도 모스크바를 버리고 다른 지역에서 농성하는 전략을 취한다. 이때 러시아 인민들은, 프랑스 군이 먹을 수 없도록 수도 내의 모든 식량들을 땅에 묻거나 가져가버리고 심지어 우물마저 흙으로 메우는 지독한 모습을 보인다. 이에 프랑스 군은 시베리아 대륙의 지독한 추위와 배고픔에 질려 퇴각하는데, 이때가 1812년이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승리를 기념하고자, 이 ‘1812년 서곡’을 작곡하였던 것이다.

  음악을 들어보면, 현악기로 연주되는 라르고의 성가, ‘신이 너의 백성을 보호하신다’로 시작되어 다섯 개의 주제가 번갈아가며 등장함을 알 수 있다. 계속 듣고 있다 보면, 뭔가 익숙한 멜로디가 지나감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다. 나머지 네 개의 주제는 러시아의 국가와 러시아의 민속음악인데, 차이코프스키는 이 다섯 개의 주제가 반복되는 가운데 네 개의 주제가 라 마르세예즈를 침묵시킴으로써 프랑스의 야욕을 러시아의 민중들이 깨부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 음악이 서틀러의 집권이 종말에 다다랐음을 상징하는 엔딩 장면에 나온 것은, V와 가이 포크스의 정신에 동감하여 트라팔가 광장에 나온 영국 시민들이 마침내 그들이 그들을 억압하던 모든 것들을 주체적으로 떨쳐냈음을 축하하는 의미가 아닐지.

그리고 여운, 2008년 대한민국의 촛불집회 - 혁명은 진행 중인가

  말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브이 포 벤데타’를 이야기하다보면 꼭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 2008년 5월부터 몇 개월간 광화문 일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집회가 그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영국과 지난 12월 이후의 한국은 많은 부분에서 유사점을 드러낸다. 거짓에 기반을 둔 불안 국면이 조성되어 극우적인 성격을 갖는 정당이 집권하고, 정권이 여러 가지 기술적 수단으로 언로를 차단하려 들며, 방송국을 장악하여 온갖 프로파간다를 생산해내는 일련의 과정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정말 비슷하다. 영화에서는 15년이나 걸려 시민들이 광장에 섰지만, 우리나라의 시민들은 단 수개월 사이에 섰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서 끝이다. 광장으로 시민들이 몰려나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영화는 ‘혁명이 성공했다’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는다. 이후 그 주체성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혁명은 더 진전을 보일 수도, 아니면 그냥 흐지부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현실은 후자를 택했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섰지만, 일이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하는 데 피로감을 느끼고 다들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그렇게 목 놓아 퇴진을 바라던 정권은 여전히 잘(?) 굴러가고 있고, 사람들은 다시 브이의 등장 이전의 런던처럼 평온하게 살고 있다. 아직 많은 활동가들이 저마다의 행동을 취하고 있지만, 광장의 시민들은 예전처럼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다시 사람들은 침묵하기 시작한 걸까.


- 성균관대학교 2008학년도 2학기 '글쓰기의 기초와 실제' 실습 중 '개성적 글쓰기', 4,291자(제목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