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記/2011, 유럽

6월 9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헤센)

클라시커 2011. 6. 10. 13:02

중세풍의 건물 아래로 첨단의 트램이 지나간다.

▲ 뢰머 광장의 한 켠



전 날 자정이 넘어 잠들었음에도 눈이 일찍 떠졌다. 시차 적응이 아직 제대로 안 된 탓인지, 엄마는 벌써 깨어 계신 상태. 동도 트기 전에 모자가 방을 휘저으며 외출준비를 했다. 내려오니 아직 아침상이 차려지기도 전이었고, 모자는 호스텔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는 모습을 하릴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다 한 직원과 눈이 마주쳤는데, 우리도 웃고 그도 웃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 부지런함은 예상 외의 경험을 하게 했는데, 그것은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의 출근 모습을 굉장히 여유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이었다. 학교 다닐 적에 종로를 휘젓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보며 '팔자 좋은 놈들... 부, 부럽다능!'이라 (속으로) 욕했던 그 일을 지금은 내가 하고 있는 것인데, 어찌나 깨소금 맛이던지.


길을 잘못 들어 한 두어시간을 헤매며 걸었지만, 별로 나쁘진 않았다. 하늘은 청명했고, 날씨는 선선했다. 멋진 수트를 차려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높은 마천루 숲 옆에는, 새가 울고 개와 함께 노인이 산책하는 오동나무 숲이 있었다. 게다가 풍채 좋게 서 있는 괴테와 실러, 베토벤의 모습도 간간히 만날 수 있었는데 나쁠게 뭐가 있었겠는가.



그렇게 걷다보니 하우프트바셰가 나왔고, 근처에 있는 괴테 생가에 방문했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 모양인지, 괴테 생가 바깥의 현수막에는 '괴테 생가'라고 한글로 버젓이 쓰여 있고 안에 들어가 매표를 하니 아저씨가 '가방, please'라고 말한다. 짐표를 주면서는 '가방 number'라 말하시는 센스도 잊지 않으시고. 아마도 한국 사람들이 매번 '가방'이라 말하는걸 알아들으시고 쓰시는 모양인데, 말이란게 새삼 참 신기하게 다가왔다. 역시 언어습득에는 반복학습이 갑이란 생각도 했고.


괴테 생가에는 한 때의 독일 청소년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요샛날이 독일 친구들의 수학여행이나 소풍 기간인 모양이었다. 이어 방문한 뢰머 광장에도, 코메르츠방크 빌딩 앞에도, 유럽중앙은행 앞에도 한 때의 친구들이 몰려있었다. 어찌나 발랄하게 뛰어 놀던지, 여행 온 나도 부러울 정도.


중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뢰머 광장에 다다르니 왠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웅성대고 있었다. 대충 "주 35시간 노동을 보장하라!", "좋은 임금, 양질의 서비스"라 피켓에 적혀있던데, 나중에 알아보니 독일 최대(세계 최대)의 산별노조인, 통합서비스노조 베르.디의 집회였다고 한다. 전단지를 나눠주시는 맘씨 좋게 생긴 할아버지와도 더듬더듬 이야기를 나눴지만, 서로 영어 실력이 부족해 나도 울고 할아버지도 울고. 그래도 마지막엔 "관심가져줘서 고맙다"며 어깨도 탁탁 쳐주셨다.


베르.디가 어떤 단체인지 더 알고 싶다면? (en) http://bit.ly/jCaR6T

독일 통합서비스노조 베르.디의 집회 모습. 주황색 점퍼를 입고 색색의 피켓을 든 모습이 이채롭다.

▲ 베르.디의 집회 모습. 중세의 모습과 은근히 잘 어울리는 기분이다.



나름 한국에서는 '말도 안 듣고, 돈도 안 되는 일'에 이래저래 관심이 많은 입장이었지만, 사실 연대에는 꽤 등한시 해 온 나였다. 솔직히 무서웠고, 적응되지 않았으며, 뭘 할 수 있을지 몰랐다. 아마도 '적응되지 않았다'는 부분만 강조하며, "한국의 집시 문화는 너무 남성적이에요. 오늘 본 베르.디의 집회처럼 축제같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겠는걸요!"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스스로를 매우 배반하는 일이며 변명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알려지진 않았지만 한국에도 얼마나 많은 '축제같은 집회'가 그간 있어 왔는가. 얕은 내가 기억하기에도 '총장실 프리덤'으로 히트친 서울대학교 구성원들의 본부 점거가 있었고, 두리반이 있었으며, 가장 최근의 등록금인하 집회가 있다. 문제는 나지, 그들이 아니라는 것. 나는 이것이 매우 건방지고 번지르르한 나를 추스를 수 있는 마음가짐이라고 본다.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뵈르제) 주변에 다다르니 여긴 또 다른 세계다. 주변은 온통 카페테리아와 넥타이부대들로 넘실댄다. 딱 한국의 여의도 같은 분위기였는데, 하다못해 '식후땡'을 위해 회사 정문 앞에 삼삼오오 모여있는 모습도 비슷했다.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뵈르제) 건물 전경. 이 일대는 한국의 여의도 주변과 흡사한 분위기다.

▲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뵈르제) 건물 전경.



오늘 하기로 했던 일 중에 못한 일은, 바로 데이타 심카드를 구입하지 못한 것이다. 검색해보니 O2가 그래도 좀 보다폰보다는 저렴하다 하던데, O2 매장이 몰려 있는 하우프트바셰 주변엔 사람이 어찌나 많든지 가는 곳마다 "매진됐다"며 말하기 바빴다. 좀 더 알아보니 Rossmann 같은 매장에서 파는 심카드도 사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아마도 MVNO로 추정된다.) 오늘은 이걸 시도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