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을 걷다가 문득 내 경우에는 어떻게 해서 왜 중어중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는지 썰을 풀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딱히 누구에게 읽히기 위해서나, 혹은 어디 기고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그냥 내 자신을 위해서다. 이러한 일종의 '다짐'이 필요한 이유는 - 약간 순환논법 같지만 - 내가 전공을 선택하게 된 배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왜 중문과에 진입했나. 누가 그렇게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2학년 선배들에게 밥을 얻어먹기도 민망해,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던 1학년을 보낸 내게, 학기 말에 덩그러니 선택지가 주어졌다. 이제 계열생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전공에 입문해야 할텐데 어떤 전공을 선택하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1학기에 촛불집회다 뭐다 일이 많아 망했던 학점을, 2학기에는 꽤 좋은 성적으로 만회할 수 있었는데 그 덕에 나는 영문과 끝에서 중문과 안정권까지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영문과를 쓰자니 떨어질까 불안했고, 국문과를 쓰자니 중학생 때 들었던 중세국어의 암울함이 싫었던 나는 그나마 관심이 있으면서도 '상위학과'로 분류된 중문과를 1순위로 적어냈고 아주 적당히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중문과를 선택한 계기다.
사람들은 내가 중문과를 다닌다 하면 "중국이 이제 슈퍼파워를 갖는다는데 잘 선택했네.", "돈 많이 벌겠다, 야." 같은, 마치 짠 것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아마도 자신이 사고해서 조합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그저 몇몇 찌라시들에서 던져주는 이야기들을 미끼마냥 덮썩덮썩 문 데서 나오는 반응들일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건대, 중국어를 잘 한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건 없다. 자신이 어학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거나, 혹은 통번역으로 먹고 살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중국어 하나 가지고 할 수 있는 건 없다. 어학은 기능이다. 반드시 다른 능력과 조합되어야 큰 성과를 내는 기능. 그것을 알기 때문에 당장 중문과 인원의 상당수가 경영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는게 아니던가.
물론 경영학도 기능이다. 회계원리나 원가회계, 재고에 대해 아무리 배워봐야 당장 기업은 여러분들을 CEO나 혹은 그에 준하는 연봉의 - 이 세계의 가치척도는 오로지 화폐다. 시장평균보다 높은 화폐를 취득할 수록 우리의 가치는 높아진다. - 직위로 대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중국어일텐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화인민공화국이 단일 내수시장으로서는 최대 시장이라는 경제적 패권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패권까지 거머쥐게 될 전망이라 특히나 중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역시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어는 기능일 뿐이며 누구든 시간만 투자하면 모두 구사할 수 있다. (당장 내가 듣는 초급중국어 수업만 봐도 경영학과 친구가 실력 면에서 돋보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중국어를 공부하겠다고 생각할 때에, 단순히 '남들보다 낫기 위해'라 생각하고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중어중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했다면 반드시 어학원에 다니는 심정 말고 다른 것도 필요할텐데 뭐, 남조선과 같은 상황에서 그딴건 애당초 있지도 않고 별로 요구하지도 않는 것 같다. 우린 그냥 학기당 근 4백만원 씩이나 내고 '잘 만들어진 제품입니다'를 증명하기 위한 어학원에 다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여튼 간에, 내 경우에는 별로 한국의 경제사회에 발을 들여놓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는 이미 근 3년 동안 불필요한 경쟁에 노출되었고, 사실 앞으로도 그런 식의 치킨게임은 계속하고 싶지 않다. 따라서 나름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런 내게도 중국어는 역시 기능일 뿐이다. 하지만 필수적인 기능. 내게 중국어가 갖는 위치는 딱 거기까지다. 내가 하려는 일은, 영어는 기본이고 중국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역시 구사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도 모두 상당한 수준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근 10년은 하기 좋든 싫든, 어학원의 신세를 아니 질 수 없다는 거지.
이렇게 말하고 보니 중문과를 무슨 어학원 같이 서술한 느낌인데, (굳이 수습하자면) 그래도 성대 문과대에서 중문과 만한 학과는 없다. 어차피 다른 과들도 어학원인건 마찬가지니까. 게다가 여러분들이 '학문적 순수성'이나 '진리' 따위를 추구하며 철학과나 사학과같은, 돈 안되는 학과를 자원할 만한 배짱도 없을 것 아닌가. 수퍼파워에 대한 기대랄지, 구성원들의 열정을 보면 내 보기엔 중문과가 제일 낫다. 물론 가지 않은 길은 알 수가 없으니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찾아보시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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