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L과 몇 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거의 내 이야기를 하느라 잠을 못 재워서 일단 L에게 미안하다.
L은 이 근래에 내 복잡한 심리 상태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가장 거지같던 시절을 함께 한 사람이고, 그 이후에 내가 어떻게 회복되었는지도 눈으로 본 사람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회복을 바라며, 이 이후에 내가 다시 어떻게 망가질지 걱정하며 보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L은 내게 우선 일상으로 돌아가 보라고 조언했다. 그러면 내가 여행 막바지에 얻은 고민이 좀 없어지지 않겠냐고. 그러나 계속 그 고민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벌써 돌아온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고 있다. 돌아온 직후인 월화 이틀 간은 L의 조언대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죽어라고 일만 했다. 어찌나 집중해서 일했는지 월요일은 회사에서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 역시 퇴근하자마자 골아떨어져 잠들 정도였다.
그러나 보이던 그 곡선과 그 색깔. 그 뒤로 펼쳐지는, 조명을 켠 듯한 따뜻함은 여전히 잊혀지지 않고 있다. L은 그것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정말 잘 알고 있기에 무척이나 걱정했지만, 지금 내게는 그것들은 현실과 별개로 그 자체로서 오롯이 존재할 뿐이다. 마치 나만 그걸 알고 있다는 근거없는 자부심과 함께 말이다. 물론 더 긴 시간의 검증이 필요할 것이지만, 나는 왠지 L의 바람처럼 일이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든다.
아마도 이 조합의 여행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서로에게 화가 나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조합이 특별히 주는 느낌도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그건 누구를 뭐라고 할 것이 아니라 아무 준비없이, 안이하게 생각했던 내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부분이다. 동시에 의심을 품는 것과 별개로 기회가 주어졌을때 그 기회를 의심에게 내어주지 않으려 했는지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제 추억에 점을 찍는다. 앨범을 덮고 다시 현실로 나간다. 중요한 것은 추억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 추억을 현실화하고 현체화하는 것이다. 기억 속의 관계는 늘 아름답다.
그렇지만 늘 아름다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재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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