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記/2015 이전

요샛날 글이라는걸 쓰다보면 말이다. 점차 유리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유독 내 글에는 그렇다. 별로 인간적 향취가 나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관심없는 이야기만 하고 있어 그런건지 사람들이 통 반응이 없다. 덧글도 없고, 좋아요도 없고... 뭐 그렇다.

글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말은 누군가에게 들리기 위해 존재한다. 아무리 지조 있는 연사나 글쟁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도 듣지도, 읽지도 않으면 어느 순간 말이나 글 모두 하고 싶어하지 않게 된다. 나도 지금 그렇다.

논쟁적 글쓰기를 해도 그랬고, 뭐 나름 '트렌디한'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그냥 별로 나는 공감능력 없는 글쟁이인 모양이다. 쓸모없는 글을 쓰는건 더 이상 의미도 없고, 그렇잖아도 볼품없는 정보들이 넘쳐흐르는 거대한 월드와이드웹이란 쓰레기장에 쓰레기 하나 더 던져 넣는 일이니 그냥 모두 때려칠까 싶다.

솔직히 말해 요새 학교생활도 영 신통치 않다. 다들 오른쪽을 보는데, 나만 왼쪽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래, 나는 관심받고 싶다. 관심없으면 살아가기가 버거운 사람이야. 그래도 일상 공간에서 대놓고 일탈활동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이렇게 조용히 침잠해야겠다.

흑흑, 열심히 살자. 언젠가는 나에게도 볕들날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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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gonghyun.tistory.com 공현 2011.12.23 11:46

    밥 사줄게

뭐 할 거야?

2011. 11. 24. 23:57
사실 뭐 하면서 먹고 살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졸업한, 그리고 졸업할 동갑내기들은 물론이고 아직 졸업이 먼 후배님들도 뭐 할지 나름 답을 내려서 앞으로 착착 나아가는 모양새인데 나는 뭐 그냥 지금 학교 다니는 것도 버거울 뿐이고 그렇다.

지금 누리고 싶은 최대의 가치는 '재미'다. 아직까지 말없이 사람들 지켜보는 거(!)랑 돌아다니는 거 외에는 재미있는게 없는 실정이다. 오늘 누구 이야기 들어보니, '인턴 활동도 재밌었어요.'라고 하던데 오늘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며 도서관도 때려친 내가 직장생활을 즐길 리는 사실 좀 만무하고.

여행 좋아하고, 글쓰는 것도 싫어하진 않으니 '여행 작가'가 되세요, 라고 누가 말한다면... 사실 취미가 생업이 되기가 어려운게 취미가 생업이 되면 일단 재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게 인간이 정말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다들 그냥 그렇게 산다. 재미는 없으면 아쉽지만, 돈은 없으면 힘들거든.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들 산다.

사실 내가 꿈꾸는 삶은, (몇 번 공개적으로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능력있는 와이프 만나서 와이프가 일하고 나는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애들 보고, 그러다가 시간 나면 글 좀 깨작깨작 써서 원고료 좀 챙겨서 비자금 만들고 그거 모아서 와이프님이나 애들 선물 사고. 뭐 이런 소소한 낙인데, 일단 남한에서 결혼은 계급동맹의 수단이 이미 되어버렸기 때문에 나를 먹여살릴 만한 와이프님이 이렇게 놀 궁리만 하는 나랑 결혼해 주실 리가 없으니 저 계획은 폐기해야 된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차선책으로, 부의 집중이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아리따운 외동딸과 결혼하는 게 있는데 이런건 좀 슬프니까 이미지 관리를 위해 이런 생각 안 해 본 것처럼 굴어야 할 것이고.

그래서 현실적으로 지향하는 바, 그러니까 몸이 좀 힘들어도 그나마 하고 싶은 거는 그냥 '남한에서 안 사는 일'이다. 여유가 생기면 좀 정신이 편한 데서 살고 싶다. 이제까지 내 몸 건사하느라 제대로 마음 가는대로 못하고 살았는데, 다시 내 전철을 밟을 아해들 뒷바라지 하느라 남은 여생을 버리고 싶진 않다. 애들도 편하고, 나도 편하려면 방법은 남한 바깥으로 가는 수 밖에. 여기선 계속 살아남기 위해 길고 험한 싸움을 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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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주변사논고'는 간단히 말해 성대 주변의 건물, 길 등에 담긴 역사를 톺아보기 위한 연재물입니다. 오랫동안 준비하기는커녕, 11월 16일의 산책 과정에서 불쑥 튀어나온 프로젝트라 사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쓸거라고는 장담 못하겠습니다. 즉, 쓰기 싫으면 언제든 때려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야기입죠.

먼저 다룰 두 개의 주제, 성균관과 종로1가 사거리 일대는 주변인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정작 본인은 모를겁니다만, 여튼 좋은 주제를 정하도록 도와준 그 사람에게 앞 두 편은 헌정을 하도록 합니다.

이제 첫 발을 내디뎠으니,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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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균관대학교의 늦가을.


아, 잘 쉬셨나요? 커피는 맛있으셨어요? 다른 서울시내 사립대학교에 비해 성균관대 앞 상권은 규모가 작은 편입니다. 아마도 더 큰 상권인 대학로가 인근이라, 그 쪽으로 집중되는 경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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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법학관 자리에 새로 들어선 국제관.



지금 '청룡상' 앞에 계시죠? 이제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따라 언덕 위로 찬찬히 걸음을 옮겨보시죠. 비천당을 지나면 최근에 신축한 건물인 국제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글로벌-'로 시작하는 학과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만, 이름과는 달리 애당초 별로 글로벌하지 않은 발상에서 생긴 학과들이니 뭐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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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있던 석조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600주년 기념관. 비록 시설은 현대화 되었을지도 모르나, 그 운치는 예전 석조건물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그 위 쪽으로는 이름도 위엄찬 '600주년 기념관'이 있습니다.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 성균관은 고려 성균관이 아닌 조선 성균관의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역시 이 논리를 기반으로 하여, '우리는 1398년에 개교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거죠. 이를 두고 각 학교 훌리들 간 배틀이 왕왕 벌어지기도 합니다만, 정작 현재 국내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는 자기네들 역사를 60년으로 줄이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뭐... 그냥 재미로 이해해야죠. (경성제대가 참 좋은 대학교긴 했는데...)

근대화 바람 속에서의 성균관

이야기가 나온 김에 성균관대학교 설립사를 돌아봅시다. 성균관대학교가 근대적 대학으로서의 틀을 형성한 계기는 1895년의 을미개혁입니다. 갑오개혁 이후 근대교육이 도입되며 기존의 교육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요구되었는데, 이 때 전통 유교교육기관의 최고학부였던 성균관은 고종과 개화세력에게 고민거리가 되었죠. 성균관을 폐지하거나 근대 학문 교육기관으로 전면적으로 탈바꿈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에 내부에 경학과를 설치하여 근대적인 교과목을 부분적으로 도입하는 절충안이 등장하게 됩니다. 「성균관관제」(1895. 7. 2, 칙령136호)과 「성균관경학과규칙」(1895. 8. 9, 학부령2호)은 이러한 배경에서 제정된 것이며, 이후에도 성균관에 대한 절충적 정책은 지속됩니다. (이런 이유로, 성균관은 온건개화파의 '동도서기'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됩니다.)

「성균관관제」 에 의해 성균관은 학부대신의 관리 하에 운영되는 것이 명시되었고, 문묘의 봉사와 경학과 설치 · 운영이 규정되었어요. 직원으로는 성균관장(1인, 주임), 교수(2인 이하, 주임 혹은 판임), 직원(2인, 판임)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관제가 마련된 지 1달 후, 「성균관경학과규칙」이 발표되어 경학과의 운영에 대한 세부내용이 정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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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학술정보관에서 바라본 600주년 기념관.


성균관의 근대화된 모습을 본격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은 「성균관경학과규칙」입니다. 이것의 주요내용은 교육과정, 수업연한, 학년, 입학, 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교육과정은 전통적인 경학교육을 유지하면서도, 본국 및 만국역사, 지리, 산술을 부가함으로써 근대적인 교과교육을 도입하려 했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수업연한은 3년으로 하고, 1년을 2학기로 나누어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1년의 수업시수를 42주, 매주 28시간 이내로 규정하는 등 학교운영 면에서도 현재의 대학교들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이죠. 입학지원자는 20세 이상 40세 이하인 자로 하고, 입학시험을 보는 경우와 성균관장의 추천으로 입학하는 경우로 구분하였습니다. 시험은 임시시험, 정기시험, 졸업시험의 3종류로 하였는데, 임시 및 정기 시험은 이전의 성균관에서도 시행하던 것이었으나 졸업시험은 이제까지 시행되지 않았던 새로운 성격의 시험이었어요. 즉 이전에는 성균관에 학적을 두면서 과거에 합격하면 자동적으로 졸업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과거시험제도가 폐지된 당시로서는 졸업시험이라는 별도의 단계를 두고 이들의 자격을 공인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졸업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문묘관리 직원 가운데 결원이 생기면 우선적으로 충원되는 자격이 주어졌었다고 하니, 그래도 성균관을 나오면 입신양명은 하지 못해도 준정부기관에 취업은 해서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하하.

성균관, 과거의 영화와 이별하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너울대기 시작하면서, 국립대학인 성균관 역시 세파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1908년 11월에 통감부는 「성균관학칙」을 제정하여 경학 이외에 수신, 국어, 일어, 역사지리, 수학, 이과, 도화, 법제경제, 체조 등을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며 실질적으로 일제에 의한 고등보통교육기관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명실상부 국립 최고학부로서의 성균관은 이쯤에서 막을 내렸다고 보아야겠죠.

이어 식민지기인 1911년 6월 조선총독부는 「경학원규정」을 제정함으로써, 직제 및 운영에 관한 내용을 새롭게 정비하였습니다. 이 규정은 전문 17조로 된 것으로서, 경학원을 총독의 감독 하에 둔다는 것, 경학의 강의와 연구, 그리고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한) 교화를 돕는 일[敎化裨補]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 대제학 · 부제학 · 제주 등의 직원을 두어 운영한다는 것 등을 제시하였습니다. 경학원의 소속과 설립 목적에서도 엿볼 수 있듯 이 시기의 경학원은 이미 교육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되었으며 다만 유림의 저항을 무마하거나 일제 강점기 동안 유교를 총독부 체제에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존립했다고나 할까요.

이러한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강연회와 순회 강사 파견입니다. 일례로 1915년에 경학원 사성 이인직('혈의 누' 작가)은 이원군 순회강연에서 '일선동화'를 주장하기도 하였었죠. 총독부 정책을 유교적 언어로 홍보하는 역할을 맡은 계간 《경학원잡지》도 발행하였는데, 이 잡지는 경학에 대한 논설 외에 일본인의 논설, 정책 해설과 법령, 시국에 대한 성명을 게재했으니 할 말은 다 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이후 1930년에 경학원 안에 '명륜학원'이 설치되었다가 다시 '명륜전문학원'으로 개편되었고, 1939년에는 '명륜연성소'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42년 3월 17일에 '명륜전문학교'란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에서 인가를 받았으나, 2년이 채 되지 못한 1943년 12월 31일자로 폐교되기에 이릅니다.

▲ 1942-43년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 <명륜전문학교 건축평면도>. 본관과 강당, 도서관, 교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관과 뒤쪽의 교사는 ㄷ자 모양의 건물이다. 학교는 본관과 교사가 병렬 배치되고 강당과 도서관은 본관의 옆쪽으로 배치되는 전형적인 관학교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뒤쪽 교사의 평면도에는 중앙과 좌측에 계단이라고 표시가 되어 있어 이층 건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 : 국가기록원)


성균관, 광복과 함께 과거의 찬란했던 역사와 조우하다

1945년 8월 15일, 독일 · 이탈리아와 함께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일본이 패망선언을 하며 식민지 조선에도 광복이 닥칩니다. 물론 잘 아시겠다시피, 일본을 접수한 미 태평양 방면 육군사령부가 식민지 조선에도 들어와 3년간 군정을 실시하게 되죠. 군정은 조선인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한정적으로 일제강점 이전의 모습을 찾는 작업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에 1945년 10월 17일, 군정법령 제15호 「제국대학명칭변경」[각주:1]이 발효되며 경학원은 성균관으로 명칭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 전인 9월에는 명륜전문학교가 부활하게 되죠.

이어 11월에는 전국유림대회가 열려 과거 성균관의 정통을 계승할 대학의 수립을 위하여 '성균관 대학 기성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 그 이름도 찬란한 심산 김창숙 선생님이 대표로 취임하기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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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산 김창숙 선생님의 동상.


이러던 중에 1946년 9월, 재단법인 학린사의 이사장이던 학봉 이석구 선생님이 거대한 토지자산[각주:2]을 포함한 재단 전체를 희사하고 거기에 종전의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이 꾸려졌으며, 드디어 문교부로부터 정규 단과대학인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인가받기에 이릅니다. 당시 성균관대학은 전문부(철정과 · 경사과)와 예과로 편성되었으며 초대 학장과 재단이사장으로 각각 김창숙 선생님과 조동식 선생님[각주:3]이 취임합니다. 이후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김창숙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며 늘상 이승만과 반대되는 길을 걸어왔고 이런 관계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며 국가교육정책의 수립에 있어 김창숙 선생이 학장으로 있던 성균관대학이 소외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후 권력과 유착하던 유도회 인사 몇이 나서 유도회로부터 김창숙 선생을 비롯한 정통파를 축출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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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봉 이석구 선생 기념비. 현재는 600주년 기념관 앞에 있다.


이후 1947년 9월에는 학부 승격을 전제로 전문부와 예과 신입생 모집을 중지하였으며, 1948년 7월에 문학부와 정경학부의 2개학부가 설치됩니다. 당시 동양철학과 · 문학과(국문학전공, 영문학전공, 불문학전공) · 사학과가 문학부에 속해 있었고, 법률학과 · 정치학과 · 경제학과가 정경학부에 속해 있었습니다. (문과대학의 몇 개 학과 친구들이 콧대가 높길래, 뭘 믿고 저러나 싶었는데 이래서 그랬군요.)

1950년의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연합군의 수도탈환 즈음에 학교에 화재가 발생하여 1,500명을 수용하던 교사 전체와 7세기에 걸쳐 소장해온 7만여 권의 서적들이 회진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이에 성균관대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고등학교 안에 임시 천막교사를 설치하여 강학하다가 다시 부산시 동대신동의 임시교사로 전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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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학술정보관 내부.


휴전 직전인 1953년 2월에, 성균관대는 문리과대학과 법정대학, 약학대학의 3개 단과대학과 대학원을 신설하고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의 승격 인가를 얻습니다. 문리과대학에는 기존의 문학부에 속해 있던 동양철학과 · 국문학과 · 영문학과 · 불문학과 · 사학과와 함께 교육학과와 생물학과 · 화학과가 새로 속하게 되었고, 법정대학은 기존의 정경학부에 속해 있던 3개 학과가 속하게 됩니다.[각주:4] 이렇게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성균관대의 초대 총장에는 이전부터 성균관대를 이끌어온 심산 선생님이 다시 취임(1953년 4월)하게 되죠. 이어 1953년 6월에는 미군정법령 제194호에 의거, 각도 향교재단의 재산을 갹출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재단법인 성균관과 병합, 재단이 확충되기에 이릅니다.

1953년 9월, 휴전과 함께 환도하여 폐허가 된 교사를 정리하고 가교사를 세워 일단 개강하였다가 1954년 4월에 석조본관 건축공사를 재착공하고 가교사 185평을 준공하는 등 본격적인 캠퍼스의 모양새를 갖춰나가게 됩니다. 건물 뿐만 아니라, 다루는 학문의 영역에서도 점차 대학의 모습을 찾아가는데 1954년 2월에는 문리과대학에 수학과 · 심리학과 · 물리학과가, 55년에는 중어중문학과가, 58년에는 법정대학에 상학과가, 59년에는 문리과대학에 독어독문학과와 법정대학에 경영학과가 개설됩니다. (중요한 것은 중어중문학과가 55년에 개설되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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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리모델링으로 새단장한 중앙학술정보관.


성균관대의 역사는 여기까지입니다. 1965년부터 삼성문화재단이 본교의 운영을 맡으면서는 사실 '삼성재단의 역사'인지라 더 이상 서술하지 않겠습니다. 간략히 말씀드리면 수원으로의 캠퍼스 이전설[각주:5]과 함께 삼성 특유의 '자기만 선진적'인 운영행태 등으로 잠깐 삼성과 결별(1977년 삼성문화재단 운영 포기)을 했다가, 도투락 만두 만들던 봉명재단과 붙었다가 다시 삼성과 붙었다가 뭐 하는 역사가 이후에 펼쳐집니다만 그다지 뭐 이 당시의 역사는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그냥 넘깁니다. 삼성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빼놓고 싶지 않은 역사겠지만, 비전 2020이다 뭐다 때문에 강제로 없어지게 생긴 문과대학 학생으로서 '삼성재단의 역사'에는 별 흥미가 없는지라 말입니다. 졸업생들이 모인 성대사랑이라는 데에 가면 삼성재단을 찬양하는 글들이 많으니, 구글에서 검색해 들어가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 되겠습니다.

아스라이 흩어져버린 성균의 기개

마지막으로 지난번 성균관 편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성균(成均)'의 뜻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끝을 맺으려 합니다.[각주:6] 성균관의 '성균'을 풀어쓰면 아래와 같습니다.[각주:7]

人材之未就(성인재지미취)[각주:8], 風俗之不齊(균풍속지부제)[각주:9]

"인재로서 아직 성취되지 못한 것을 완성하게 하고, 민중의 생활이나 문화가 가지런하지 못한 것을 고르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이를 요즘 식으로 풀어 말하면, "전인교육"과  "대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육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옛날에, 교육과 교육받은 자(well-educated people)의 책임을 강조하는 이념은 시대를 앞선 선진적인 발상이라고, 그리고 세계 역사 속에서도 흔치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성균(成均)의 '成'은 인재를 완성시킨다[成人材]는 '수기(修己)'의 목표를, '均'은 풍속을 고르게 한다[均風俗]는 '치인(治人)'의 목표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잘 아시겠다시피, '수기'와 '치인'은 성균관대의 건학이념이기도 하지요.

이에 대한 설명은 1954년 심산 선생님이 성균 제5호에 쓰신 원고의 말미에도 잘 드러납니다.

"우리 성균의 건아들이 성균의 유래인 '성진재지미취 균풍속지부제'의 진의를 파악하여 전통에 빛나는 우리 학원에서 굳세고 참되게 자아 완성을 면려(힘쓰게)하여 국가 민족의 부흥과 인류복지의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

성대사랑에 올라온 이야기들을 보니, 80년대에 대학에 입학을 하면 선배들이 바로 이 내용들을 말해주며 성균관의 의미를 새기라는 말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80년대 총장실에 저 내용(成人材之未就 均風俗之不齊 館 = '성균관')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고 하죠. 검색을 하다보니, 어떤 어르신께서 "50년대 말에 귀교(성균관대 - 옮긴이 주)를 찾았을 때, 정문 뒤 양 옆으로 장승같은 두 개의 기둥이 서 있었고 그 기둥에 각각 '성인재지미취, 균풍속지부제'란 글귀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는 이야기[각주:10]를 남겨두셨네요. 이 분은 이것이 '대학'이란 것의 사명을 간명하게 압축한 글귀라고 하셨던데,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학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찾아보기는 크게 어렵다는 사실입니다.[각주:11]

조금 슬픈 이야기입니다만, 이 사상과의 단절이 성균관대의 변화를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더 이상 600년 전통의 성균관을 다니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단순히 숫자 '600'을 자랑스러워 하는 찌질한 숫자놀음에나 낄 것이 아니라 그 '600'이란 숫자가 주는 역사와 철학의 무게를 고민하고 계승할 일입니다. 물론 지금의 학교에게는 그 모든 것이 버겁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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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뒤로는 창덕궁 후원이 보인다. '예전에 저기 많이 넘어갔다'는 교수님의 말을, 누군가에게 전한 적이 있다. 그때 그 사람이 '저기가 어디냐?'고 묻길래 얼버무렸었는데, 지도를 보니 창덕궁 후원 어디메쯤 되는 모양이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주변사논고 주제 2. '종로1가 사거리' 편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날씨가 다시 추워졌는데 몸 관리 잘하셔서 건강하게 지내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변사논고 주제 1.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편 끝.>

[어디까지 왔나?]
성균관 - 성균관대학교


  1.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의 지령에 의하여 조선군정장관 겸 미국육군소장 A. B. 아놀드의 명의로 발표된 군정법령. 제1조는 경성제대를 서울대학으로 변경한다는 내용을, 제2조는 경학원을 성균관으로 번경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2. 1940년 3월 3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석구 선생은 1940년 2월 12일 “환갑잔치보다는 사업이 중하다.”고 아들 능우(能雨 : 문학박사, 숙명여자대학교 총장서리 역임)에게 훈계하고 환갑잔치까지 거두면서 30만 평의 논을 매각, 환갑기념사업으로 재단법인 학린사(學隣舍)를 설립하였다고 전합니다. [본문으로]
  3. 재밌는건 이 조동식 선생과 앞서 언급했던 이석구 선생의 후손들이 동덕여대의 '주인' 자리를 놓고 최근까지 법정싸움을 했다는 겁니다. 2003년 비리로 동덕여대 재단에서 퇴출된 조 선생의 후손들이 정이사 추천을 통해 재단복귀를 꾀하던 과정에서, 조동식 선생이 동덕여대의 설립자라고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를 알게 된 이석구 선생의 손자가 법원에 '설립자는 이석구 선생이니 동덕여대의 모든 문서에서 설립자를 조동식 선생에서 이석구 선생으로 바꿔달라'는 소를 제기했던 거죠. 이 소는 2011년 7월, 재판부가 '이석구가 설립자임!'이라 판결을 내리며 일단락 되긴 했습니다. 어쨌거나 현세의 복 못지 않게 내세의 복도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본문으로]
  4. 1951년 12월, 개정된 교육법령에 따라 기존의 문학부와 정경학부가 폐지되고 학과제로 변경되었으나 서술상 편의를 위해 개념적으로 차용합니다. [본문으로]
  5. 삼성재단이 77년에 성균관대의 운영을 포기하면서 수원으로의 캠퍼스 이전 계획 역시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대신 자연과학캠퍼스와 인문사회캠퍼스가 각각 수원 율전동과 서울 명륜동에 위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이 자주 묻는 왜 '성균관대가 두 개냐'에 대한 답이 되겠군요. [본문으로]
  6. 지난 편의 글에 덧글로 여러 중요한 지점을 꼬집어 주신 'ㅁㄷ'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본문으로]
  7. 어딘가를 보니 음을 조율한다는 뜻이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본문으로]
  8. 구글에서 검색하다보니, 중국 쪽에서는 재목 재(材) 대신 재주 재(才)를 쓰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본문으로]
  9. 사실 이 뜻을 어렵게 생각했는데, 이미 '성균관 스캔들'에서 금등지사를 찾는 암호로서 김윤희의 아비인 김승헌이 정조에게 남긴 사직상소문에도 등장했다더군요. [본문으로]
  10. 서동오, '감동의 편지한장', 네이버 블로그, 2010년 9월 12일 작성. 2011년 11월 20일 확인. http://blog.naver.com/wind0631/150093735308 [본문으로]
  11. 졸지에 심산 선생의 동상도 호젓한 곳(!)으로 밀려 있는데, 무얼 더 말하겠습니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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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동 |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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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주변사논고'는 간단히 말해 성대 주변의 건물, 길 등에 담긴 역사를 톺아보기 위한 연재물입니다. 오랫동안 준비하기는커녕, 11월 16일의 산책 과정에서 불쑥 튀어나온 프로젝트라 사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쓸거라고는 장담 못하겠습니다. 즉, 쓰기 싫으면 언제든 때려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야기입죠. (...) 물론 주제는 벌써 열 한 개나 생각해뒀습니다만, 역시 그게 언제 글로 화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다섯 개만 미리 적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물론 변동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1주제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 / 제2주제 종로1가 사거리 일대 / 제3주제 대학로 일대 / 제4주제 백악산과 서울성곽, 그리고 김신조 / 제5주제 낙원시장 일대

1편과 2편의 주제는 주변인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정작 본인은 모를겁니다만, 여튼 좋은 주제를 정하도록 도와준 그 사람에게 앞 두 편은 헌정을 하도록 합니다. (역시 이런건 생색을 내는 겁니다만, 문제는 자기가 뭘 도와줬는지 모르니까 읽지도 않을겁니다.)

자, 그럼 이제 떠나볼까요?

성균관의 역사는 어디에 맥을 닿느냐에 따라 달리 읽힐 수도 있겠습니다. '성균'이란 이름이 최고학부의 이름으로 사용된 것을 연원으로 본다면 1289년 고려 충렬왕 대부터라고 볼 수도 있겠고요. 현 위치를 기점으로 생각한다면 조선왕조에서 성균관을 처음 설치한 1398년을 연원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균관대학교의 경우에는 후자를 따라 개교년을 1398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조에서 성균관은 어떤 역할을 했느냐. 이 곳은 일종의 국립대학교이자, 왕조의 권위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씽크탱크의 역할을 했습니다. 기능적으로는 소과에 급제한 유생들이 대과를 준비하기 위해 들어오는 일종의 기숙형 관료양성소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잠시 딴 이야기를 하죠. 모두 조선의 관료등용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는 대강 아실 것입니다. 생원이니, 진사니 하는 호칭은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거 왜, 제가 막 한 두 번 불렀던 조영남 번안곡 '최진사 댁 셋째 딸'의 그 진사 말입니다. 이 호칭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급제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 생원시와 진사시가 바로 소과(小科)입니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식년(式年, 3년)마다 치러졌는데[각주:1] 생원시는 사서오경을, 진사시는 문예창작의 재능을 물었습니다. 이 소과에 합격을 하면, 대망의 대과(大科)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물론 성균관에 입학하지 않아도 대과를 치를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대과 합격인원이 적었고 (33명), 그마저도 대부분 성균관 출신 유생들이 합격했기에 소과 합격자들이 성균관에 입학해 대과 준비를 하는 것은 일종의 '왕도'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잖아요? 법대나 법학원 안 다녀도 사법시험에 응시하거나 합격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 법학과에 진학하거나 법학원에 등록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잖아요. 이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 성균관의 건물 배치도 입니다. 우리는 이 많은 건물 중 단 몇 개만을 보고 지나갑니다. (출처 : 성균관)


여튼, 이를 위해 성균관에는 기숙시설인 서재와 동재가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균관대학교의 유학동양학부 학생들이 선배들을 흠모하여 실제로 이 서재와 동재에서 기거하는 기개를 펼쳤다고 합니다. 물론 성균관이 (일종의) 성역화가 되면서 이들을 쫓아냈고, 뭐 이 과정에서 알력다툼이 있었다고는 합니다만 옛날 이야기니까요. 최준식 교수가 작성한 네이버캐스트 '성균관' 편[각주:2]을 보면, 이 동재와 서재의 방이 다 합쳐 총 30개[각주:3]라 어떻게 200명이 살 수 있었는지 의문이라고 한 언급이 있네요. 실제로 가보시면 알겠지만 방 크기가 크지도 않은지라 - 자물쇠가 한 쪽만 채워져 있어 마음만 먹으신다면, 그리고 들키지만 않으신다면 열어 보실 수도, 들어가 보실 수도 있습니다 - 저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긴 했습니다. 원래 스킨십이 많으면 애정이 싹트는 건데, 그렇게 좁은 방에 여러 명을 넣었으니... 아마 이런 데서 성균관 스캔들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 망상을 잠시...

서재와 동재 앞에는 돌단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는 유생들이 스스로의 나태함을 꾸짖기 위해 회초리를 들었던 곳이라고 하죠. 성균관 유생들은 의식주부터 모든 것을 국가에서 대주는, 일종의 국비장학생인지라 한 달에 30번 이상씩은 꼭 시험을 봤다고 합니다. 1년에 단 네 차례만 시험을 봐도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게 시험인데, 그걸 한 달에 서른 번씩이나 봤다니... 이런 데이터들을 모아 일정 기준에 충족하지 못하는 유생은 성균관에서 퇴출을 시켰다고 하는데, 이 기준을 찾기가 어렵네요. ('성균관 퇴출'이라는 키워드를 구글에 넣으면 맨 박민영과 박유천, 전태수의 이름만 나오니... -_-;;;)

서재와 동재 이야기를 했으니까, 성균관의 다른 건물 이야기도 해볼까요? 성균관에서는 학문수양 말고도 선현을 모시는 일도 했는데, 그 중심건물이 바로 대성전입니다. 대성전에는 공자 선생님을 비롯한 39명(공자와 4성, 공문 10철, 송조 6현, 한국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 양반들(!)에게는 매년 2월과 8월에 '석전제' 혹은 '문묘제'라는 제사를 올립니다. 여기서 연주하는 음악이 바로 '문묘 제례악'인데, 재밌는건 이 문묘 제례악이 정작 공자 선생님의 고향인 중국에서는 청조 말의 혼란과 공산주의 국가의 수립 등을 거치면서 완전히 잊혀진 유산이란 겁니다. 유교문화의 변방국이었던 일본에 이런게 있었을 리는 없고요. 그러니까 이 문묘 제례악의 원형은 유일하게 남한에만 남아 있는 거죠.

대성전 앞을 볼까요? 세 개의 가지를 가진 나무와 다섯 개의 가지를 가진 나무가 좌우로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아마도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고, 후대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져다 붙인 이야기겠지만 참으로 공교로운 가지의 수 때문에 이 두 나무는 각각 '삼강목'과 '오륜목'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수종은 측백나무인데, 올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어 유교에서는 소나무와 함께 군자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제 발걸음을 옮겨 대성전 뒤로 가보죠. 대성전 뒤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수령이 벌써 500년은 되었다(1519년에 심었다고 합니다)고 하는데, 공자 선생님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종종 은행나무 밑에 좌판을 깔으셨다고 해서 유교를 가르치는 국립학교(성균관, 향교)에는 꼭 이 은행나무를 심는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천연기념물로 등록된 나무들이 암나무인데 반해, 이 나무의 경우엔 수나무입니다. 사실 가을이 되면, 은행 녀석들도 나름 종족번식을 해야겠기에 신나게 은행을 주렁주렁 달고 떨어뜨리는데 만약 이 나무가 암나무였다면 대성전 안팎은 온통 구린내로 진동했겠죠. 그러니까 4년을 다녀야 하는 제 입장에서는, 이들이 수나무인게 무척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묘목일 때 암나무인지 수나무인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각주:4])

은행나무의 건너에는 명륜당이 있습니다. 명륜당은 성균관에 기거하는 모든 유생들에게 강의를 하던 일종의 강당으로서, 간혹 이곳에서 과거 시험을 보기도 했습니다. 성균관대학교와 성균관이 위치한 명륜동이란 이름의 어원이 되는 건물이기도 하고요. 한자를 풀어보면 밝을 명(明)에 도리 륜(倫)으로, '도리를 밝히라'는 쯤의 뜻이 되는데 성균관의 정치-사회적 위치와 참으로 잘 맞는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 이제 명륜당 뒷편으로 돌아가보면 한국 대학도서관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존경각'이 있습니다. 성균관 존경각에는 한때 수 만 권의 유학 관련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국운이 기울던 조선 후기부터 장서 규모가 줄기 시작해서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도서를 전부 이관했습니다. 뒤이어 이야기 할 비천당과 함께, 존경각은 성균관 개설 당시에 건축된 것은 아니며 성종 6년(1475)에 한명회의 건의로 건립된 것입니다. 성종이 하사한 책 1만 권과 함께 개관한 성균관은 중종 9년(1514)에 소실되었다가 복원, 이후 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에 중건하고, 영조 48년(1772)에 개수하였습니다. 기본 장서는 사서오경 · 제자백가 등 각종 역사서와 성리학 중심의 유가 서적 위주였으며, 불교 · 도가나 기술 서적은 '잡서'로 취급되어 소장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존경각의 우측에는 활과 화살을 보관하던 '육일각'이 있습니다. 육일각은 영조 19년(1743)에 건립되었으며, 성균관 내에 있는 활과 화살, 대사례(大射禮)에 사용하는 각종기구를 보관하였다. 고대 유교에서는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숭상하였기 때문에 육례(六藝 : 禮·樂·射·御·書·數) 중에 하나인 활쏘기[射]를 선비들의 기본소양으로 생각하여 유생들에게 장려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죠. 왜 성균관 스캔들에서도 4인방이 열심히 활쏘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

그럼 이제 존경각 왼쪽으로 난 입구를 통해 나가볼까요? 예전에는 흙으로 덮혀 있었을 법하나, 이제는 아스팔트로 덮힌 평지가 나오고 다소 뜬금없이 서 있는 '비천당'을 발견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비천당 역시 성종 때 건립되었으며 과거시험장으로 쓰였다고 하니 비천당 앞의 너른 마당이 왜 존재하는지 알 것도 같지요.

자, 이제 성균관 구경은 다 한 듯 싶습니다. 이제 발걸음을 언덕으로 옮겨 성균관대학교로 가보아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좀 쉬었다 가죠. 쉬기 전에... 성균관대학교의 정문으로 들어와 바로 왼 편에,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는걸 보셨나요? 네, 눈이 좋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것이 바로 영조가 세운 그 유명한 '탕평비'입니다. 정치를 할 관료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던 만큼, 탕평의 도를 제1국정지표로 삼았던 영조가 탕평비 건립에서 이 곳을 빼놓을 수는 없었겠죠. 아, 마침 탕평비 뒤쪽으로 쉴 만한 공간도 있네요.[각주:5] 다시 정문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성균관대 학우들이 '청룡상 있는 데'라 부르는 곳이 있습니다. 이 곳에서 잠깐 커피 한 잔 하셨다가 슬슬 성균관대 쪽으로 시선을 옮겨봅시다.

성균관대학교 편으로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어디까지 왔나?]
성균관
  1. 물론 이외에 국가에 큰 경사가 있는 것을 기념해 치뤄진 증광별시도 있습니다. [본문으로]
  2. 최준석, '성균관'. <네이버캐스트>, NHN Corp., 2010년 7월 29일 작성. 2011년 11월 16일 확인. [본문으로]
  3. 하지만 성균관 측이 제시한 수를 보면 28개입니다. 최준식 교수는 직접 세 보았다고 하는데, 아마 두 개의 방은 방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지요. [본문으로]
  4. 국립산림과학원의 2010년도 3월 4일자 답변. 네이버 지식IN에서 재인용.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105&docId=105603507&qb=66yY66qpIOyVlOyImCDqtazrtoQ=&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gVgY4c5Y7uRssvvkUA0ssc--021788&sid=TsTvF5DPxE4AAGY3THI [본문으로]
  5. 정문 왼 편에 있는 것은 하마비로 밝혀졌습니다. 탕평비는 성균관 안 쪽에 존재하더군요. (2011년 11월 21일 작성.)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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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ㅁㄷ 2011.11.20 05:02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만큼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을 것 같아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을 말씀드립니다. ^^

    일본은 유교문화의 변방국이었는가, 문묘제례악의 원형은 남한에만 남아 있는가에 대해서입니다. "유교문화"가 지시하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는 부분입니다. 위 글의 문맥을 살펴 "유교문화"를 '주자학과 연관된 문화'라 한다면 일본이 변방국이겠지요. 하지만 조선 후기 한반도에서 주자학이 갖는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당시 조선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변방국이 됩니다. "변방국"이란 말이 따로 필요가 없게 되지요. 물론 필자께서는 "유교문화"를 주자학에 국한시켜 쓴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세계 여러 나라들과 비교를 해보면 일본은 결코 유교문화의 변방국이라 할 수 없습니다. "유교--여기에선 '유학'이 마땅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를 가르치는 국립학교"에 꼭 은행나무를 심는다는 점을 언급하셨는데, 일본 東京大學 교표(http://www.u-tokyo.ac.jp/files/images/logo.gif)가 은행잎인 점은 우연이 아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문묘제례악의 원형"은 남한을 비롯하여(북녘에도 남아있을 법 하지만 제가 지금 확인할 길이 없으므로 ㅎ) 일본, 타이완, 베트남 등 유교문화의 영향이 미친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문묘제례악은 조선 세종 때 박연이 周나라의 규범대로 만든 雅樂이 전승되어 내려온 음악입니다. (박연이 周나라의 음악을 들어봤을리는 없고 문헌을 보고 만들었을텐데, 일단 지금은 이것을 "원형"이라 합시다.) 이 아악이 바로 문묘제례악의 원형이고 유교문화와 함께 각지로 전파되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가을 대성전이야 안가면 그만이지만, 가을비 내리는 대성로는 ㅋㅋ
    또 여담입니다만, 아무도 성균관의 成均이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하지 않더군요. 성균관대학교 편에 기대해봅니다~

    • Favicon of https://blog.philobiblic.com 클라시커 2011.11.20 11:56 신고

      장문의 덧글 감사합니다. (덧글이 하나도 없어서 약간 섭섭했는데, 이렇게 달아주셔서 감개무량합니다 ㅠㅠ) 역시나 쓰면서 약간 '아리까리' 했던 부분에 대해서 정확히 지적해주셨네요.

      말씀을 듣고 조금 찾아봤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문묘제례악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아악'의 영향은 다른 유교문화권에도 남아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저 문장에서의 '문묘제례악의 원형'이란 문묘제례악의 '원래 모습'이란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만, 박연이 상고시대의 음악을 직접 듣고 쓰지는 않았을테니 저 말도 엄밀히 말해서는 틀렸다고 해야겠네요. :)

      일본이 유학의 변방국이라는 입장에 대해서는, 저도 공부가 짧아 조금 망설였던 부분으로 수업시간에 들은 표현을 비판적 검토없이 가져다 쓴 것입니다. 다만 일본의 경우에는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유교문화를 정신문화의 축으로서 가지고 갔다기 보다는 그네들의 전통문화에 유교문화를 흡수 - 그나마도 유교문화가 중심부로 끌려 나온 것은 대정봉환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사용 - 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가을비 내리는 대성로는 성대 다니는 사람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풍경입니다.

      성균의 어원에 대해서는 덕분에 찾아보았습니다. 성균관대학교 편에 꼭 넣겠습니다.

고마웠어요, 정치

2011. 11. 3. 10:45
이미 어느 정도 이야기 했던 것이지만, 확고하게 말씀을 드리고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또 키보드 앞에 앉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그동안 남한의 정치에 대해 큰 관심을 보여왔고 그에 대한 평론 비스무리한 글들을 블로그나 트위터에 올려서 '정신적으로' 먹고 살던 룸펜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현실정치와 인연이 닿아, 이름을 공공의 영역에 내걸고 일을 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그런 전차로 많은 좋은 분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지요.

그러다 생각한 것이... 더 이상은 인연을 맺은 분들께 누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정치적 자산이란 것은, 어떠한 노력이나 학문적 성과가 없이, 그저 몇 개의 돌출발언으로 얻었기 때문에 갈수록 그 질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동시에 함께 패를 맞잡고 있는 여러분께 피해를 주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부터는, 되도록이면 공식적으로 (정치적) 주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시 본연의 '아무 것도 없는' 신분으로 돌아가 조용히 공부하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보잘 것 없는 제 정치평론을 읽어주시고, 아낌없는 조언을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더 가치있는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많은 응원도 - 염치없지만 - 부탁드립니다.



● 서론

18세기의 중국은 ‘큰 시장’을 선점하려는 구미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다. 이에 일본과 조선(남한)처럼 중국 역시도 강제된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근대 체제로 편입된 이상 사회 진화론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 진화론이 가지고 있는 원천적인 이론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이 한계를 전통 사상의 저력을 활용하여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곳이 바로 중국이다.[각주:1]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자들의 저작을 검토하여 근현대 중국의 구미문화(서구문화) 수용 양상과 이 과정에서 보이는 중국 지식인들의 모습에 대해 서술하는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중국의 구미문화 수용 양상을 평가하고자 한다.

● 본론

1. 신해혁명 이전의 구미문화 수용 양상

1.1. 양무운동의 시기 – 아편전쟁부터 청일전쟁까지

당시 청나라는 바깥으로는 아편전쟁과 애로호 사건, 안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을 겪으며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사상적으로 “서양의 장점을 배워 서양 오랑캐를 견제 또는 제압한다”는 입장에서 부국과 강병을 위한 새로운 모색이 지식인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것이 바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인데, 이를 바탕으로 초기의 서학은 정치적 사고와 결합된 자연과학 지식에 국한되어 수용되었다.
그러나 중체서용이란 ‘전통적인 유교관료의 통치나 왕조체제를 온존시켜[中體] 서구의 기술을 도입하는 것[西用]’[각주:2]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를 배경으로 한 구미문화의 도입은 결국 봉건 통치의 동요를 막는다는 실용적인 정치적 목적을 충족하는 데서 그치고 말았다. 이에 따라 구미문화의 내용을 구성하는 철학이나 사회과학 분야는 도외시되어 자연과학을 제도적으로 응용할 인재나 사회 제도적 뒷받침도 마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수용된 자연과학도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

1.2. 변법유신

청프전쟁, 청일전쟁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인해, 단순히 기술의 도입만으로는 진정한 개혁이 어렵다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등장한 것이 바로 변법유신이다. 이 시기에는 청일전쟁 패배에 대한 자각에서 서양 수용이 이루어진 만큼 우선 ‘구망’(救亡)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각주:3]

이 시기의 대표적 지식인으로는 캉유웨이[康有爲]를 들 수 있는데, 그를 중심으로 한 유신파는 변법유신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캉유웨이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공자개제고』를 저술하여 공자의 개혁가로서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한편으로, 이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옛 것에 의탁한 제도개혁’[托古改制]을 주장하며 공자와 중국의 전통적 요소가 서학과 완전히 들어맞고, 따라서 전통적 요소 중 개혁에 아주 적합한 것들이 수없이 존재한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캉유웨이의 생각은 중학과 서학의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발견해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는다.[각주:4]

한편 이 시기에는 옌푸[嚴復] 등이 영국의 인식론과 함께 사회진화론을 도입하여, 기존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순환적 역사관을 단선적이고 전진적인 역사관으로 바꾸는 문화충격을 선사하기도 하였다.[각주:5]


2. 신해혁명 이후의 구미문화 수용 양상

2.1. 신해혁명을 전후한 시기

이 당시는 청조의 분열과 열강의 이권 획득 경쟁으로 인해 중국내 모순이 정점을 달리던 시기였다. 따라서 사상가이자 정치가들은 사상보다는 정치 활동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비로소 이 시기에 이르러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가 중국에 소개되었다. 특히 이때에 도입된 사회주의는 이어 벌어지는 5․4 신문화 운동 이후 본격화되는 맑스주의 전파의 서막을 여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각주:6]


2.2. 5․4 신문화 운동과 북벌전쟁기

중국은 신해혁명 이후 표면적으로는 근대국가의 반열에 오른 것 같았으나 아직 봉건적인 경제, 정치 및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위안스카이가 정권을 탈취한 이후부터는 존공복고(尊孔復古)의 기운마저 감돌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중국의 젊은 지식인들은 과학과 민주의 구호 아래 거대한 규모의 신문화 운동을 벌였다.
이 시기 후스[胡適] 등에 의해 ‘실용주의’가 도입되었으며, 후스는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백화문운동을 제창, 이후 천두슈[陳獨秀]와 루쉰[魯迅]에 의해 문학혁명운동으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또한 이와 더불어 등장한 후스의 ‘전반서화론’은 1916년, 천두슈가 ‘최후의 각오가 되는 각오’를 제기하면서 전통을 반대하고 계몽을 호소하는 흐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즉, 혁명의 분위기를 타고 옛 것을 전복하며 새 것을 추구하는 일련의 흐름이 폭발한 시점을 5․4 신문화 운동기라 볼 수 있을 텐데, 이 흐름을 가장 함축적으로 집약한 구호가 바로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이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는데, 량치차오[梁啓超]․량수밍[梁漱溟]․장쥔마이[張君勱] 등은 앞서 언급한 ‘중체서용론’의 창안자인 장즈둥[張之洞]의 학설을 계승하여 중국의 ‘정신문명’ 또는 ‘동방문명’의 우월성을 제기하였다. 이후 이들은 ‘현대 신유가’의 구성 배경이 된다.[각주:7]


2.3.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문화대혁명기, 그리고 문화열

1949년 중국 본토에 맑스-레닌주의를 근본으로 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창설되면서 기존의 중국 본연의 사상이던 유학은 쇠락기를 맞게 된다. 특히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유교는 타도해야 할 봉건시대의 유물로 지목되어 다시 한 번 혹독하게 비판받는다. 그러나[각주:8] 바깥에서는 현대 신유가들에 의해 꾸준히 연구되었으며, 내부적으로도 마오쩌둥의 사후, 문화대혁명이 종결되고 개혁개방의 기치가 들리면서 리쩌허우[李澤厚] 등에 의해 유교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중공 정부 역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의 보인 중국의 낙후한 현실에 대해 각성하며 사회주의 현대화를 위한 이념적 기반을 찾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안팎의 이러한 움직임이 맞아 떨어지며 1984년경부터 유교문화와 사회주의, 그리고 자본주의를 한데 아울러 본격적으로 논의해 보려는 움직임이 일게 되는데 이를 ‘문화열’이라 한다.
이 논의의 중심주제들은 전통, 서방을 향한 학습, 민족과 사회주의 등이며 이 주제들에 대한 관점, 방법 등의 차이에서 여러 유파가 갈라진다.[각주:9] 그 유파들은 유학부흥론, 비판계승론, 서체중용론, 철저재건론으로 나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주장들 중 사회주의와 민족을 축으로 중국적 전통과 현대화를 변증법적으로 통일시키려 하던 중국공산당의 마음에 든 것은 비판계승론이었다.[각주:10] 그러나 비판계승론이 학술적 입장과 논리체계를 통해 주장을 전개하는 것과 달리 당은 정치사회적 요구라는 현실인식을 기준틀로 삼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즉, 당의 문화전략은 개방을 계속해가면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을 최선의 목표로 하고 있는 바, 상황에 따라 문화열의 여러 유파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일례로 그들은 개방의 부작용의 책임을 철저재건론이나 서체중용론과 같은 전반서화론자들의 몫으로 돌린다. 그리고 유학부흥론이나 비판계승론의 주장을 완충장치로 사용하고 있다.[각주:11] 하지만 전반서화론이 꼭 당의 입장에서 비판대상만은 아닌 것이, 역사의 동력이 생산력에 있음을 강조하는 서체중용론이나 서양으로부터 배울 것을 강조하는 철저재건론의 입장이 어느 부분에서는 당내 개혁론자들의 주장과 맞아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각주:12] 따라서 당은 특정 유파의 손을 완전히 들어주고 있다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 결론

이상의 서술을 통해, 중국의 구미문화 수용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의 근대화 과정은 동일한 유교문화권이었던 조선(남한)과 일본과 다르게 지속적으로 전통 사상의 저력을 활용하여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근대화의 초기에 자체적인 근대화를 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살리지 못하고 오롯이 타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근대화된 사회에서 현실을 사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중국의 저력은, 중국 사회주의의 미래가 그렇게 어둡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급속도로 진행된 개혁과 개방으로 비록 공산당이 계급정당으로서의 이미지를 상당부분 실추하였으며, 동시에 자본주의화가 고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중국 사회주의의 미래를 어둡게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중국인들에게는 오랜 기간의 혁명전쟁을 거치며 얻은 많은 투쟁경험이 있으며, 오늘날의 중국은 그로부터 얻어낸 소중한 성과라는 생각을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맑스-레닌주의를 중국전통 및 중국현실과 결합시킨 중국식 사회주의는 전통문화의 연장선 위에 있기 때문에 단순한 옮겨심기 차원을 넘어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레포트의 말미에서도 볼 수 있듯 당이, 그리고 중국인들이 문제의 초점이 되는 논의를 최대한 증폭시켜 충분한 검토를 통해 현실에 적용하고 있는 점 등은 중국이 소련이나 동유럽과는 달리 자본주의와의 대결에서 그렇게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 정확히 이야기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거주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 현대의 중국이 자본주의와 같은 구미문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유교문화를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을 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 사실이다. 즉, 이미 중국문화에 어느 정도 녹아 있는 유교문화를 활용해 당이 자신들의 의도를 저항 없이 전달하려 한다든가, 혹은 질서와 조화와 같은 유교문화의 보수적인 측면만을 강조해 인민들에게 사회에 복무할 것을 강권한다든가 하는 의심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저자명 가나다 순)

◆ 김예호, 유교문화와 자본주의 수업자료
◆ 김교빈(1992), 문화열과 현대중국, 『현대 중국의 모색 – 문화전통과 현대화 그리고 문화열』,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논전사분과(편), 서울: 동녘
◆ 리쩌허우(1987), 『중국현대사상사론』, 김형종(역), 서울: 한길 그레이트북스, 2005
◆ 조경란(2003),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 – 캉유웨이에서 덩샤오핑까지』, 서울: 삼인
  1. 조경란(2003), 『중국 근현대 사상의 탐색 – 캉유웨이에서 덩샤오핑까지』 (서울: 삼인), p.11 [본문으로]
  2. 김예호, 유교문화와 자본주의 수업자료, p.3 [본문으로]
  3. 조경란(2003), p.36 [본문으로]
  4. 김예호, pp.3-4 [본문으로]
  5. 김예호, p.4 [본문으로]
  6. 조경란(2003), p.41 [본문으로]
  7. 김예호, p.4 [본문으로]
  8. 중공 중화인민공화국을 말한다. [본문으로]
  9. 김교빈(1992), 문화열과 현대중국, 『현대 중국의 모색 – 문화전통과 현대화 그리고 문화열』, 한국 철학사상연구회 논전사분과(편), (서울: 동녘), p.11 [본문으로]
  10. 김교빈, 앞 글, p.19 [본문으로]
  11. 김교빈, 앞 글, p.19 [본문으로]
  12. 김교빈, 앞 글, p.20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s://blog.philobiblic.com 클라시커 2011.11.03 09:26 신고

    후훗, 아직 학점 안 나왔으니까 이거 보고 베껴서 나오는 점수에 대해서는 난 책임 못 져요.

  2. Favicon of https://blog.philobiblic.com 클라시커 2011.11.03 09:28 신고

    어제 수업 듣고 안 사실인데, 이 레포트의 전제 몇 가지는 사실과 맞지 않다. 물론 일본 유교에 대해서 배우기 전이었다고는 하나, 여튼 틀린건 틀린거니까. 혹시나 검색으로 보실 분들의 주의를 요한다.

녹색당 창당 발기인 대회는 9월 30일도, 10월 31일도 아닌 10월 30일이라고 합니다. 31일은 월요일이네요. (...)

10월 30일, 선유도 공원에서 (가)녹색당 창당 발기인 대회가 열린다. 남조선에서도 유럽 등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처럼 정당으로서의 환경운동조직이 건설되는 것이다. 사실 남조선에서 아예 녹색당 건설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초록정치연대랄지, 초록당 사람들(준)이라는 이름의 조직들이 존재했지만 그동안은 정말 '준비'만 했던 조직들이었다. 그 준비와 노력들이 이제 결실을 얼마 앞두지 않은 셈이다.

녹색당 창당의 배경과 구성

사실 그동안 이들이 '준비'만 열심히 하는데는 이유가 있었다. 남조선의 인민들이 '생태'라는 가치를 부차적인 가치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먹고 살 만 하면, 그때쯤 생태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아주 '자애로운' 생각들이 지배적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이 쉽게 깨질 수도 있다는 게 최근 이웃나라 일본의 재해로 인해 확인되었다. 막연하게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던 핵발전소(원전)이, 사실은 다른 이름의 핵폭탄일 수도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남조선에서 '녹색당 창당'이란 담론이 공론화된 시점은 이 이후였다. 시점만 놓고 보면, 애당초 일본의 일을 기회로 삼아 남조선에서도 녹색당 창당을 해보겠다는 의도가 명확히 드러난다. 물론 이후의 상황은 이들의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는데, 핵발전소에 전기 생산량의 상당부분을 의존하고 있다는 남조선의 현실논리가 등장했고 사람들이 이에 동조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번 창당 발기인 대회에는, 애당초 이들이 노렸던 것처럼 많은 '탈색된 민간인'들이 참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초록당 사람들(준) 같은 기성정치조직이 참가하는 동시에 그동안 환경운동을 해 온 환경운동연합 같은 기성 환경운동 그룹들, 생태에 관심있는 소수의 '탈색된 민간인'과, 그리고 - 녹색당을 조직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고맙게도 - 삽질을 크게 해주는 진보신당 같은 진보정당에 크게 실망, 대안정치세력을 찾는 활동가 및 당원들이 참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녹색당 우경화의 바람

문제는 이들 간에 약간의 동상이몽이 있는 것 같다는 거다. 초록당 사람들(준)이나 환경운동연합 같은 기성 환경운동그룹들은 이 당을 오롯한 생태주의 정당으로 꾸미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반해, 기성 정당 영역에서 대안을 찾아 녹색당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은 적-녹 정당의 실현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인지는 모르나, 벌써 오랫동안 생태운동을 해오신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이 "적색과 녹색은 같이 갈 수 없다"(http://cafe.naver.com/yesgreens/3504)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고 전해진다.[각주:1] 반면 기성 정당 영역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생태주의의 실현은 무한 성장을 지향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과 대립한다'는 요지로 적-녹 연합의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김수민의 '녹색당 참여선언'으로 갈음한다. 꼭 읽어보길 권한다. http://kimsoomin.tistory.com/378)

사실 녹색당의 우경화는 이미 녹색당이 건설된 대부분의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당장 녹색당이 '집권했다'며 남조선 녹색당의 롤모델 쯤으로 종종 등장하는 독일의 경우가 그 대표적 사례다. 이 이야기에 관해서는 8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그 중 일부를 소개한다.

(전략) ‘경제와 생태는 서로 잘 통한다’는 확신에 고무된 함부르크 녹색당은 15년 전부터 완벽한 행동 변화를 보여왔다. 오랫동안 좌파에 몸담은 함부르크 녹색대안당인 ‘녹색대안명부’(GAL·Grün Alternative Liste Hamburg)의 일부 창당 회원들은 1999년 연방 당국이 코소보전쟁 참여를 승인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문을 박차고 나갔다. 평화주의의 포기와 이후 코소보전쟁에서 흘린 피는 고등교육을 받고 가정형편이 넉넉한 신세대와, 정부기관이나 기업에도 호의적인 신세대 녹색 활동가들을 많이 양산했다. 함부르크 적-녹 연정의 대변인인 여성의원 안야 하즈덕은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다. 심리학자인 그는 1995년 당원증을 발급받기 전까지는 녹색당을 찍은 것 말고는 한 번도 녹색당을 위해 시위해본 적이 없다. 2002년 분데스타크 의원으로 당선된 뒤, 그녀는 동료들과 똘똘 뭉쳐 부자들에게 부과된 부유세 감축을 승인했다. 이후 부유세 세율은 슈뢰더 집권 기간에 53%에서 42%로 낮아졌다. 그는 “좌·우파의 도식이 내게 믿음을 준 적이 없다. 녹색당이 경제개방을 한 것은 잘한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후략)

- <녹색당의 황금빛 아망>, 올리비에 시랑,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

(전략) 피셔(요슈카 피셔 : 녹색당 출신 정치인. 독일연방공화국의 총리를 지냈다 - 인용자 주)는 2005년 선거 패배로 조기 퇴진하며 (중략)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 그는 컨설팅 회사 요슈카&코(CO)를 설립했다. ‘CO’는 1995~2004년 분데스타크 녹색당 대변인을 지낸 동업자인 디에트마 후버를 의미한다. BMW와 지멘스, 그리고 유럽의 거대 상설 할인마켓인 레베(Rewe) 등이 고객이다. 게다가 이 회사는 1년 전부터 투르크메니스탄·이라크·터키의 지도자들과 함께 나부코(Nabucco) 유럽 가스관 프로젝트 컨소시엄을 추진하고 있다. 공직을 떠나 사기업을 운영하는 전직 독일 외무장관에겐 적격인 프로젝트다. (중략) (녹색당 출신으로) 권력의 맛을 본 이들은 ‘색다른 정치’를 펴고 있다. 이를테면 이들은 자신의 의원 경력을 재계의 문을 여는 ‘마법의 열쇠’로 활용하고 있다. 2006년, 슈뢰더 정부에서 보건부 장관을 지낸 안드레아 피셔(요슈카 피셔와 인척 관계가 없음)는 제약업계 로비 전문 홍보 자문회사인 플레온(Pleon)에 합류했다. 그는 현재 보건업계를 상대로 ‘독립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베를린 녹색당 대변인 출신인 그의 동료 노베르트 셸베르크가 그를 돕고 있다. 셸베르크는 동시에 주요 고객인 약사연맹(VFA)의 이익도 옹호하고 있다. (중략) 미국 그룹 마스인코퍼레이티드는 ‘건강·영양·지속적인 개발’ 부서 총괄을 2005년까지 슈뢰더 정부에서 소비자보호 국무장관을 지낸 전 녹색당 의원 마티아스 베르닝거에게 맡겼다. 분데스타크 녹색당에서 기부금 조성과 기업 관계를 담당했던 전 녹색당 의원 마리안 트리츠는 현재 독일 담배산업의 로비스트로 일하며 흡연자 보호를 책임지고 있다. 그녀는 채용 당시 담배를 옹호하는 것이 “무척 흥분된다”고 했다. 하지만 모험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향후 원자력산업에도 뛰어들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실망스러운 답변을 했다. (중략) 2008년, 13년간 분데스타크(Bundestag, 독일연방하원 - 인용자 주) 녹색당 의원을 지낸 마가레타 울프는 디클링아른트자문(Deekeling Arndt Advisors)에 합류했다. 그녀는 이 업체에서 ‘그린워싱’(겉으로는 환경친화적인 정책 또는 이미지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환경을 파괴하는 등 다른 방향의 행위를 하는 것)의 미덕을 원자력업체들에 강연하고 있다. 울프의 줄타기는 원자력업체 EnBW에 취직한 녹색당의 역사적 인물이자 전 분데스타크 녹색당의 선동가 레조 슐라우흐의 줄타기와 거의 일치한다. 11년간 녹색당 의원을 지냈고 독일 텔레비전 에서 에너지 문제 전문가로 활동했던 미샤엘레 후스테트는, 현재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원자력업체인 RWE에서 ‘재생에너지’ 홍보를 담당하고 있다.

- <돈방석에 앉은 요슈카 피셔'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 인용자는 나를 의미한다.


독일 뿐만 아니다. 프랑스 녹색당(Verts)도 애초에는 좌파정당으로서의 포지션을 잡고 출발했지만, 이후 이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별도의 녹색당(Cap21)을 창당함으로써 2002년 대선에는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정당 출신 후보가 둘이나 나오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스웨덴 녹색당도 결국엔 득표를 위해 '고속철도 개발' 등 이른바 '녹색 성장' - '그린 워싱'의 대표적 수사다 - 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개중 뉴질랜드 녹색당 정도나 여전히 좌파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 상황이다.

남조선 녹색당의 미래

문제는 남조선이라고 해서 이렇게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는 거다. 일단 남조선의 환경운동가 출신 명사 중 (거칠게 말해) 좌파적 색채를 띈 인물은 거의 없다시피한 상황이다. 환경운동연합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최열이 그렇고, 환경운동연합 출신 변호사 오세훈이 그렇다. 오히려 이들은 '중도적'이기는 커녕 이후 기득권층의 이익에 복무하는 모습까지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도 현재 환경운동연합 같은 환경운동이나, 생협이나 한살림 등 생태주의에 기반을 둔 협동조합의 주 참여층은 좌파 진영에서 설정하는 전통적인 '사회적 약자 계층'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나 생태주의적 식품을 판매하는 협동조합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여기에는 생태주의적 농사, 생산방식을 총칭하는 '유기농'에 '고급스럽다'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도입된 영향이 크며, 궁극적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남조선 사회 자체적으로 '생태'라는 것을 기본적 권리가 아닌 부차적 권리로 여기고 있는 의식 덕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현재 상황 및 그동안 흘러온 맥락을 볼 때, 남조선의 녹색당 운동 역시 우경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나는 여기고 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색과의 연합을 통해, 좌향좌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우향우는 막아야 한다고 보지만 과연 이것이 얼마나 실현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1. 그러나 김종철 발행인의 평소 이야기들을 놓고 생각해 보면 이것이 김종철 발행인이 하려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이 날 이 발언을 요약해 옮긴 작성자의 의도가 개입됐을 거라 추측해 본다. [본문으로]
  1. Favicon of https://blog.philobiblic.com 클라시커 2011.10.21 13:47 신고

    벌써 10월이었나. 나는 아직까지 9월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서두의 9월 30일은 착각이다. (가)녹색당의 창당발기인대회는 10월 31일에 열린다.

  2. 2011.10.23 15:47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s://blog.philobiblic.com 클라시커 2011.10.23 17:29 신고

      아, 그렇군요. 역시 그랬네요. ㅎㅎㅎ. 지금은 정말 기대가 많이 됩니다.

  3. 징검다리 2011.10.24 11:26

    이 정도 조사와 관심이라니...저처럼 기대가 크시군요^^
    글 전체 내용중에는 사실이 아닌 부분도 많지만, 결론이 중요한거겠죠.
    결론만 본다면 저도 그런 우려를 하고 있고, 진보정당 출신 참여자들도 그런 걱정을 많이 합니다.
    저는 크게 3가지 길이 있다고 봅니다.

    1) 녹색 (생태주의에 동의하는 시민, 환경단체활동가, 환경단체, 생협회원, 생명-평화-동물단체 회원등)
    2) 적녹연대세력 (생태사회주의, 생태사민주의 동의하는 사람) +녹색
    3) 적색 + 적녹연대 + 녹색

    저의 결론은 2)번을 지향해야 한다고, 일부 진보정당 출신 혹은 여전히 진보정당이 정답이라고 얘기하는 분들은 3)번을 얘기합니다. 클라시커님이 얘기하는것이 2)번인지, 3)번인지 모르겠지만, 진보정당 출신 일부 분들이 3)번을 얘기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1)번을 지향하는 분들이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3)번은 진보신당 창당정신에 가까운것이지만 실패했습니다. 녹색은 아주 일부만 참여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심-노등이 녹색정치를 포장지로조차 생각안한 탓이 무능이 있었지만요. 여전히 3)번안에 대해서 1)번을 추구하는 분들은 동의하지 않는데, 지향하는 바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극복이라고 해도, 뭐가 자본주의 극복이냐? 적색은 산업주의(대량생산체제)를 인정하며 그곳을 기반으로 활동해왔는데, 산업주의(대량생산체제)를 극복하는 녹색사회를 지향하는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물론, 정교하게 동의할 부분에 대해 합의를 시도해 볼 수도 있겠지만,(예, 노동시간단축, 청년비대공장비정규직연대 등) 그런 합의는 정말 시간이 많이 걸릴것으로 예상합니다. 몇년 뒤가 되겠죠...

    하지만 2)번은 다릅니다. 아시겠지만, 진보정당 평당원들의 녹색수용성은 대단히 높습니다. 그리고 지역에서 녹색당에 버금가는 많은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진보정당에 대한 관성, 노동운동에 대한 막연한 부채의식만 아니면 녹색당 이름으로 활동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진보신당, 민주노동당 당원인 분들이 쉽게 녹색당으로 오기 힘든 상황이라 현실에서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녹색당은 이를 추진해야 합니다.

    결론은, 적색과의 연합은 진보신당 실험 실패로 끝났다. 적녹에 동의하는 좌파, 시민, 진보세력은 녹색과 연대해야 한다.

    • Favicon of https://blog.philobiblic.com 클라시커 2011.10.24 13:35 신고

      사실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기 전부터 초록당을 지향하는 움직임들이 있어왔다 보니, 수박 겉핥기 식으로 자료들을 읽고 옮겨적은 탓이 큽니다.

      반면 2011년도 8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기사는 재미있게 읽었고, 남한 녹색당과도 맥이 닿겠다 싶어 옮겨 적어 보았습니다. 이 올리비에 시랑의 기사가 이 글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는데 큰 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안면은 없지만 올리비에 시랑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각설하고, 말씀해 주신 세 안 중 2번과 3번의 차이는 결국 '누가 중심이 되는가'의 문제인지요? 물론 저 역시 2번이 진보신당의 창당 정신이었고, 이것이 실패했다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노와 심을 이야기하셨는데, 저는 그 둘보다는 당내에서 관련 당직을 맡은 이력이 있는 조승수의 무능력함 - 내지는 '나태함' - 에 더 큰 실망을 드러내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 셋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통합연대'에 대한 열의만큼이나 녹색정치에 대한 열의를 보였다면, 모르긴 몰라도 진보신당이 녹색정치 분야에서는 뭔가 해낼 수 있었겠죠. 창당 초에 태양열 발전시설 구좌도 모금하고, 옛 민노당 연수원을 개조해 생태체험 공간으로 바꾸는 일 등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적색이 대량생산체제(산업주의)에 일정 부분 기반하고 있다는 지적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론에 대해서는 좀 격하게 동의가 되는군요. 그래도 뭔가 좀 서운하긴 합니다.

[망] 지향에 관하여

2011. 10. 8. 18:11
누군가 그랬다. 이기심이 없었다면 세상은 발전하지 못했을 거라고. 사람들이 사는 이유는 어떻게 보면 간단하다. 자신이 꿈꾸는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바로 그것 때문이다. '요즘은 애들이 돈만 밝힌다',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른다'며 혀를 끌끌차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내용이 어쨌거나 자신의 지향을 향해 분투하고 있음은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해 곰곰히 생각해본다. 과연 내 지향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을 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나는 언제나 주류에 편입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꽤 멋진 일(?) 같았고, 한동안은 스스로가 '비주류'이라 굳게 믿으며 자랑스러워도 했던 것 같은데, 요 몇 년 새 그런 생각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니 애당초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참 꿋꿋하게 해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논쟁의 시작

저런 생각에 취해 있던 벌거숭이 시절이다. 친구들과 함께 잠깐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우리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자'는 결론을 낸 적이 있다. (어찌나 호기로운지!) 그런데 그 방법에 대해 이견이 났는데, 나는 '아래에서 변혁을 노래하자'고 주장했고 다른 친구는 '성 내에서 가교를 내려 성을 무너뜨리자'고 주장했다. 그 친구는 '일단 안에 들어가서 문을 여는 것이 빠르고 효율적이다'는게 논거였고, 나는 '일단 체제에 편입된 자가 문을 열어줄 거란 확신을 가질 수 없으며, 엘리트 중심보다는 인민 중심 체제를 세우는 것이 비록 느리지만 견고할 것이다'라 응수했던 것 같다. 물론 그 때의 생각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나눈지도 어언 7년이 다 되었고, 지금 생각하면 당장의 남조선 사회에서는 그 친구의 방법이라도 일단 차용하는 것이 조금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조금씩 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성문을 열겠다'는 친구들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다. 단적으로 남조선의 역사를 통틀어 그렇게 한 전례를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마이너리티를 생각하는 몇몇의 엘리트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세상이 미쳤기 때문인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한 사람의 '지사'로 기억될 뿐이지 세상을 뒤엎은 '혁명가'로 기억되지는 않고 있다.

귀찮을 때는 경험적 증거를

반면 애당초부터 아래에서 시작해 세상을 조금씩이라도 바꾸는 사람들은 많다. 전태일이 그랬고, 김진숙이 그렇고, 가깝게는 내 친구 공현이 그렇다. 함께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아, 학교의 비합리한 조치에 여러모로 이의를 제기하던 공현은 이제 어엿한 중견 활동가가 되어 책이며 강연을 다니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물론 '김상곤이라는 엘리트 관료가 말을 꺼냈기 때문에 학생인권조례라는 게 비로소 현실화 될 수 있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공현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가 일을 시작하면서 해왔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들의 활동에 의한) 맥락이 있었기 때문에 김상곤이라는 엘리트 관료가 제안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법 하다.

어쨌거나 그래서 내 경우에는 어떻냐면. 나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전히 마이너리티를 추동하는 것이 근본적인 사회변혁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딛고 서 있는 맥락인데, 이것을 보면 나는 어느새 7년 전 나랑 의견을 달리 했던 친구의 길을 가고 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행동으로는 그동안 얼마나 메이저 리그에 진입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 왔던가를 생각하면 부끄럽기가 짝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마이너 리그의 반란을 지지한다. 다만 내 스스로 '변혁의 주체가 되겠다'고 말을 하지 못할 뿐이다.

미증유의 기록을 세워주길

얼마 전에 7년 전의 그 친구가 사법시험에 합격해 졸업을 하고 사법연수원을 다니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녀석이 그렇게 주장하던 대로 이제 '성 안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남조선이 어쨌거나 변혁의 흐름을 가져야 한다는 내 입장에서는, 당시의 기억을 근거로 한 명의 세작이 기득권의 견고한 성 안에 들어간 것으로 여기고 있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그 때의 소신도 잊지 않고 있기를 기원한다. 미증유, 내가 그 녀석에게 기원하는 것은 미증유의 역사다.

중문과 전공진입각론

2011. 10. 1. 20:34
올레길을 걷다가 문득 내 경우에는 어떻게 해서 왜 중어중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는지 썰을 풀어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딱히 누구에게 읽히기 위해서나, 혹은 어디 기고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그냥 내 자신을 위해서다. 이러한 일종의 '다짐'이 필요한 이유는 - 약간 순환논법 같지만 - 내가 전공을 선택하게 된 배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왜 중문과에 진입했나. 누가 그렇게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2학년 선배들에게 밥을 얻어먹기도 민망해,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던 1학년을 보낸 내게, 학기 말에 덩그러니 선택지가 주어졌다. 이제 계열생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전공에 입문해야 할텐데 어떤 전공을 선택하겠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1학기에 촛불집회다 뭐다 일이 많아 망했던 학점을, 2학기에는 꽤 좋은 성적으로 만회할 수 있었는데 그 덕에 나는 영문과 끝에서 중문과 안정권까지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영문과를 쓰자니 떨어질까 불안했고, 국문과를 쓰자니 중학생 때 들었던 중세국어의 암울함이 싫었던 나는 그나마 관심이 있으면서도 '상위학과'로 분류된 중문과를 1순위로 적어냈고 아주 적당히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중문과를 선택한 계기다.

사람들은 내가 중문과를 다닌다 하면 "중국이 이제 슈퍼파워를 갖는다는데 잘 선택했네.", "돈 많이 벌겠다, 야." 같은, 마치 짠 것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아마도 자신이 사고해서 조합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그저 몇몇 찌라시들에서 던져주는 이야기들을 미끼마냥 덮썩덮썩 문 데서 나오는 반응들일 것이다. 분명하게 말하건대, 중국어를 잘 한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건 없다. 자신이 어학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거나, 혹은 통번역으로 먹고 살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중국어 하나 가지고 할 수 있는 건 없다. 어학은 기능이다. 반드시 다른 능력과 조합되어야 큰 성과를 내는 기능. 그것을 알기 때문에 당장 중문과 인원의 상당수가 경영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는게 아니던가.

물론 경영학도 기능이다. 회계원리나 원가회계, 재고에 대해 아무리 배워봐야 당장 기업은 여러분들을 CEO나 혹은 그에 준하는 연봉의 - 이 세계의 가치척도는 오로지 화폐다. 시장평균보다 높은 화폐를 취득할 수록 우리의 가치는 높아진다. - 직위로 대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중국어일텐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화인민공화국이 단일 내수시장으로서는 최대 시장이라는 경제적 패권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패권까지 거머쥐게 될 전망이라 특히나 중국어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역시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어는 기능일 뿐이며 누구든 시간만 투자하면 모두 구사할 수 있다. (당장 내가 듣는 초급중국어 수업만 봐도 경영학과 친구가 실력 면에서 돋보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중국어를 공부하겠다고 생각할 때에, 단순히 '남들보다 낫기 위해'라 생각하고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중어중문학을 전공하겠다고 했다면 반드시 어학원에 다니는 심정 말고 다른 것도 필요할텐데 뭐, 남조선과 같은 상황에서 그딴건 애당초 있지도 않고 별로 요구하지도 않는 것 같다. 우린 그냥 학기당 근 4백만원 씩이나 내고 '잘 만들어진 제품입니다'를 증명하기 위한 어학원에 다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여튼 간에, 내 경우에는 별로 한국의 경제사회에 발을 들여놓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나는 이미 근 3년 동안 불필요한 경쟁에 노출되었고, 사실 앞으로도 그런 식의 치킨게임은 계속하고 싶지 않다. 따라서 나름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런 내게도 중국어는 역시 기능일 뿐이다. 하지만 필수적인 기능. 내게 중국어가 갖는 위치는 딱 거기까지다. 내가 하려는 일은, 영어는 기본이고 중국어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역시 구사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도 모두 상당한 수준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앞으로 근 10년은 하기 좋든 싫든, 어학원의 신세를 아니 질 수 없다는 거지.

이렇게 말하고 보니 중문과를 무슨 어학원 같이 서술한 느낌인데, (굳이 수습하자면) 그래도 성대 문과대에서 중문과 만한 학과는 없다. 어차피 다른 과들도 어학원인건 마찬가지니까. 게다가 여러분들이 '학문적 순수성'이나 '진리' 따위를 추구하며 철학과나 사학과같은, 돈 안되는 학과를 자원할 만한 배짱도 없을 것 아닌가. 수퍼파워에 대한 기대랄지, 구성원들의 열정을 보면 내 보기엔 중문과가 제일 낫다. 물론 가지 않은 길은 알 수가 없으니 나머지는 여러분들이 찾아보시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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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은 열렸나

2011. 9. 7. 00:09
뚜껑이 열렸다. 3분의 2를 얻지 못하는 수. 사람들은 '그러니까 진즉 당원총투표로 해야 하지 않았냐'라고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나오는 그런 말들은 그냥 죽은 자식의 불알을 만지는 일 뿐. 다른 방법이 있는데 하지 않아 아쉽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모름지기 사안을 두고 다투는 사람들이 어떤 방법이든 도출된 결론에 수긍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시점에는 그런 믿음조차 없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미 대세는 통합으로 기울어진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정치를 '힘을 얻는 것'이라 정의하고 실행할 때에, 여러 모로 통합을 하는 것이 정의한 '정치'를 실천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맞다. 대의원들 역시 그런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의 결과가 바로 '과반의 찬성'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나와 노, 심, 조 셋이 공유하는 지점인 것 같다.

다만 이 이후의 해석은 나와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복당파가 '매직넘버 10'을 얻지 못한 이유가, 매우 폐쇄적이고 상층부 중심주의로 흘러간 - 그리고 전혀 신당 사람들의 의지와 상관 없이 - 협상 때문이라고 본다. 한참 당내 의사소통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에 당대표였던 조승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9월까지 통합해야 한다'는 등, 매우 조급한 발언으로 당 사수파들의 지적을 받았는데 이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요건을 채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조승수는 협상의 대표였고, 모름지기 대표란 대표하고 나선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조정된 것을 바탕으로 협상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역시 이해당사자 중 하나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견을 발표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협상장에서까지 관철할 권리는 없다.

나는, 당대회에서 끝까지 찬성표를 던지지 못한 사람들이 이 부분을 문제삼았으리라 생각한다. 즉, 이번에 부결된 통합안은 '절차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에' 부결된 것이지, 통합 그 자체에 대한 부결은 아니라 해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흐트러진 당의 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다시 통합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 심, 조는 결국 '당외 투쟁'을 선언했다. 복당을 선택한 사람들 중에서도 탈당하겠다는 사람들과 탈당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혼재한 가운데, 이들의 거두 격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감히 탈당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못먹어도 고'를 외치는 것으로 봐서는 통합의 싹수가 아예 없다고 보는 것 같지는 않은데, 굳이 외곽 조직을 만들어 협상력을 만들겠다고 한다. 그들은 이를 '민중의 염원'이라 할지 몰라도 역사적으로는 매우 좋지 않은 전례로 남을 것이다. 항상 세가 커지는 것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인데, 이미 내용은 없고 껍데기만 남은 상황이다. 새로 내용을 채울 수도 있지만, 굳이 이 껍데기를 고수하겠다고 한다. 더욱이 이들에게 승복을 거부한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 당장은 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이 이어지겠지만, 결국 이 일은 나중에 이들의 운신의 폭을 줄이게 될 것이다. 결국 자신들에게 높은 충성도를 보였던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이들에 비해 충성도는 낮다.)

다른게 아니라 이것이 적전분열이다. 충분히 자신들이 가진 정치적 자산을 토대로 결과에 대한 '유리한 해석'을 이끌어 내 당 전체를 무기로 협상장에서 싸울 수도 있는데, (내 판단으로는) 매우 근시안적인 선택이 재분열을 낳고 있다. 신당과 민노당이 분당될 때는 '낡은 진보 청산'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셋에게 아직 때가 아니란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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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클라시커 2011.09.07 00:29

    쓰고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대세를 꼭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게 기본 입장이다. 하지만 대세가 존재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2. 2011.09.14 15:53

    비밀댓글입니다

  3. 이주홍 2011.09.18 09:57

    흥미로운 내용이네. 그럼 진보신당 당원 대부분, 그러니까 2/3를 넘는 사람들이
    '대세'에 어느정도 공감하고 있다는 거? 이건 생각지도 못한 부분인걸...

    암튼 네 블로그는 내가 항상 모니터링하고 있음.
    댓글을 달고 싶기는 한데 스스로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게 너무 많아서 쓰지는 못하고 있어 ㅋ
    그래도 보는 것만으로 내 신림동 고시생활에 소소한 낙이다 ㅎ

    • Favicon of https://blog.philobiblic.com 클라시커 2011.09.18 18:50 신고

      그러나 집단탈당 등 강력한 움직임이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보아, 평당원을 대상으로 한 투표를 했어도 3분의 2가 나왔을지에 대해서는 장담 못할 것 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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