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결집'에 관하여

2015. 6. 21. 20:00

내가 속해 있는 정당은 표면상으로 벌써 3번이나 모습을 바꾸었다. 최근에는 이 당이 다시 모습을 바꾸겠다고 한다. 애초부터 빅텐트론이나 대중정당론 따위에 입각한 통합론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10년의 세월 동안 전선에 서 있기보다는 뒤에서 훈수나 둔 주제에 그동안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나 고생해 온 사람들이 좀 편해보자는 것에 어깃장을 놓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마 이게 일단은, 합당 논의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훈수가 될 듯.


사실 합당의 범위나 그 정치적 의미에 앞서, 새로운 진보정당은 욕심을 좀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한국과 같이 보수편향적인 사회에서 진보(좌파)정당이 가져가야 할 의제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지난한 세월을 돌이켜보면 그 전선이 우리의 '깜냥'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길고 넓었던 것 같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제국들도 그 끝에 가서는 넓은 영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차차 무너져 갔는데, 한국 사회에서 아직 한 줌도 안 되는 진보정당이 그 의제를 버틴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꿈이 컸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딛고 서 있는 정치적 자산에 실망하여 '현실정치를 하겠다'며 보수정치에 귀의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진보결집회의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은, 단순히 총선 및 대선에 대한 대응방안을 논의하는 것에서 벗어나 마땅히 새로운 진보정당이 꿈꾸는 의제들의 순서를 정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의는 대내외적으로 장점을 갖는데, 우선 대외적으로는 새로운 진보정당의 방향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각 당 내에서의 합당 논의에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힘이 없어 합치자'는 논리는 그간 진보정치를 배신하고 보수정당으로 떠나간 사람들의 고정 레퍼토리였다.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안건을 긍정적으로 살려 많은 사람들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굳이 부정적인 레퍼토리를 꺼내들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명확한 기준이 생긴다는 것은, 명확한 논지가 생긴다는 의미이고 앞서 언급한 부정적 레퍼토리보다 더 분명한 메시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진보신당 시절의 합당논의부터, '컨텐츠'에 집중했다면 지금과 같은 파국은 마주하지 않았으리라는 아쉬움도 생긴다. 동시에 최근 뉴스룸과 인터뷰한 다니엘 튜더의 논의에서도 이 '컨텐츠'의 가능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튜더가 새정치민주연합에게 아쉬워 했던, '조직력'과 '의제설정능력'은 모두 우리가 지난 민주노동당 시절에 갖추었던 능력들이다. 그러나 그때만큼의 크기는 아니더라도, 제도정치에 편입될 수 있었던 정의당에서 민주노동당 시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단순한 권력유무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누구도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던 데에서 비롯된 문제인 것 같다. 지난 10여 년 간, 그들이 진보정치를 위해 퍼부은 자기희생에는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그 희생의 목적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한번쯤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를 하는 데에 '순수' 따위를 운운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목표를 확실히 한다면 적어도 노선의 이탈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조성주 씨가 정의당 당대표 경선에 나섰다고 하는데, 정치발전소 소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여기가 뭐하는 데인가 찾아보니, 예전에 한 번 정도 알았던 사람들이 그 이후에 만든 조직인 모양이다. 이 사람들의 논의에 대해서 기억이 나는 것은, 당시에도 꽤 진보통합에 긍정적이었다는 점과 그 이유가 '나는 여기도 좋고 저기도 좋은데 선택하기 싫으니 그냥 둘이 합쳤으면 좋겠다'는 정도. 물론 그 바람이 갸륵하지만, 정치를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좋은 마음을 갖는 것은 필요하지만, 미래의 진보정치는 좀 더 명확한 이유들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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