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記/2015 이전 123

몇 가지 도상에 관한 몇 가지 코멘트 - 영화 '브이 포 벤데타'를 보고 (시안)

한양대의 임지현 교수는 역사상 모든 독재 정권이 다 대중의 암묵적 동의하에 건설되었다는 ‘대중독재론’을 펼친 바 있다. 애초에 이 영화를 접하게 된 것은, 순전히 브이가 지니고 있는 대중관이 이 임지현의 대중독재론과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은 이런 시시껄렁한 나의 잡학적 호기심에서 발동했다. 줄거리 미래,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2040년 영국. 규범을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거리 곳곳에 카메라와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모든 이들이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평온한 삶을 유지한다. 어느 날, ‘이비’라는 소녀가 위험에 처하자 어디선가 한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다. 재빠른 칼놀림, 명석한 두뇌와 모..

사회적인 '숙명'을 배려해야 하는 이유

여성과 거의 평생을 함께 하다시피 하는 게 있다. 남편이냐고? 아니다. 바로 생리다. 10대 때 2차 성징의 일환으로 시작되는 생리는, 중년 이후 완경기까지 대략 4, 50년 간 여성의 일생과 함께 한다. 생리는 많은 점에서 여성의 활동을 제약하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생리와 함께 찾아오는 생리통이다. 남자 입장에서 생리통이 어떤지 말할 수는 없지만, 생리통을 전면에 내세워 진통 효과가 좋다고 강조하는 약들이 미디어에 범람하는 현실은 그 고통의 크기에 대해 짐작이나마 가능케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리로 인한 불편함 때문에 학교에 출석하지 못할 경우, 이를 공결로 인정하는 ‘생리공결제’의 도입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생리공결제가 인정되어야 하는 윤리적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숙명이며 그 숙명..

왜 계속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지 따져 묻지 마라

유럽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아테네에서 만난 형과 델포이를 함께 간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국제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되었다. 그 형님 말씀이, 푸틴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다. 잠자던 불곰이었던 러시아를 다시 깨운 사람이기 때문에 대통령 임기 후에 총리직을 수행하게 되었으니, 그렇지 않냐는 거였다. 뭐, 따지고 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가관이었던 것은 그 말 뒤에 이어진 이야기였다. "푸틴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본 러시아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푸틴을 총리에 옹립한거야. 교수님이 이야기 해 주신 건데, 실제로 푸틴 임기 전에 각 사회단체와 국민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푸틴에게 또다시 권력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생각한 묘안이 바로 총리 임명이라 하더라고. 역시 큰 ..

'예술사와 철학사상' 과목의 시험을 위한 끄적거림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미에 대한 관점

플라톤의 미학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데아란 일종의 관념적인 세계다. 예를 들어 장인이 사각형의 책상을 만들었다고 했을때, 그것은 이데아의 모방품이다. 완전무결한 사각형 상판을 지니고, 네 개의 다리가 90도로 붙은 완벽한 모양의 책상은 단지 개념으로서 오직 이데아의 세계에서만 존재한다. 플라톤은 모든 사물을 이렇게 보았다. 다시 말해, A란 물체는 허상이며 그것의 본질은 이데아란 이상적 세계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현실이란, 어디까지나 이데아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회화나 시는 이 현실을 또다시 모방하는 것들이다. 예술품들은 회화보다는 한 단계 낮고 실재(reality)의 세계인 이데아보다는 두, 세 단계나 낮아 존재론..

백남준 아트센터 - 용인, 정말로 '세계최고 선진용인'에 한 발짝 다가서다

백남준 아트센터가 문을 열었다. 백남준의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란 평 덕택에 완공 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듬뿍 받았던 프로젝트가 드디어 그 결실을 맺은 것이다. 아트센터를 짓겠다는 경기도청 측의 제안에 백남준은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의 작품 2000여점을 선뜻 내놓았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 이 기증은 백남준의 사후, 백남준의 유산 관리인이었던 장조카와 경기도청 간의 법적분쟁을 불러왔지만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백남준 아트센터에 대한 세간의 이목을 더욱 집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 아트센터가 위치한 용인은 백남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이와 같은 국보급 시설이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아트센터의 옆에 위치한 경기도박물관 때문이다. 인구 수로나 크기로나 국내 최고인 경기도청으..

눈으로 기억되는 그녀

눈이 깊은 여인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 그녀는 아름다우면서도 요새 여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윽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멋이 있다. 그래서인지 한편으로는 까다롭다. 너무나도 까다로워 가끔은 그 성미를 맞춰주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사랑스럽다. 간혹 나에게 보여주는 환한 미소와 그 깊은 눈으로 그윽하게 보내는 눈길은 나를 그녀에게서 더욱 헤어나올 수 없게 한다. 나의 매일은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시간이 되었다. 집을 나서다가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하다못해 공부를 하다가도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면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떠오른다. 그녀를 다시 만나보기를 늘 희망한다. 그녀가 나에게 주었던 것들을 잊지 못해서다. 그녀는 내 삶에 '색'이란 걸 도입했다. 모노톤의 단조로운 삶을 총천연색으로 치장해주었다. 굳게 ..

슬픔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

안타까운 또 한 명의 영혼이 세상을 등졌다. 이십 여 년을 우리 곁에 있었던 사람인지라, 떠나는 순간도 절친한 벗을 잃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고 언제나 연예인들과 최후를 함께했던 사신(死神), '악성 루머'가 또 등장했다. 악성 루머에 희생된 영혼은 오늘의 그녀가 처음은 아니었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들도 그랬다. 우리는 연예인들이 돈을 먹고 자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연예인들은 팬들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결국엔 그것이 순환하여 자본을 벌어들이는 기제로 작용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에게 팬들의 열정이 큰 힘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연예인들로서는 인기를 얻어야겠다는 그들의 욕망 뒤에 자리잡은 비난에 대한 중압감이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내가 ..

과연 나 역시 덤덤할 수 있을까 - 성 정체성에 대해

요새 네이버 웹툰에서 와난 씨의 '어서오세요, 305호에!'를 꽤 열심히 보고 있다. 이성애자들이 갖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을 꽤나 잘 뒤집어놓는 만화인데, 보면 볼수록 어쩜 이렇게 차분하게 말을 풀어놓는지에 감탄하고 터부시 되었던 이야기를 이렇게 친근감있게 풀어놓는 작가의 용기와 능력에 또 감탄한다. 이번주 미녀들의 수다에는 왕비호가 나왔는데, 브로닌이 '게이 같습니다~'를 연발해서 꽤 웃었던 기억이 있다. 짧은 핫팬츠와 딱붙는 하트표 면티셔츠, 눈가에 짙게 그은 아이라인이 브로닌이 알고 있는 동성애자의 이미지에 부합했던 모양이다. 웃고 즐기는 분위기로 흘러가자 브로닌은 또 이렇게 말했다. '나 게이 친구 많습니다~' 시쳇말로 무척 쿨했다. NBC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로앤오더 : 성범죄 전담반'의..

'글쓰기의 기초와 실제' 과제 중

성균관대학교가 자랑하는 수업 중에 '글쓰기의 기초와 실제'라는 과목이 있다. 말 그대로 글쓰기의 기초와 글을 실제로 써 보는 연습을 하는 수업이다. 과제가 하나 나왔는데, 아래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대로 자유롭게 1200자 내외의 글을 쓰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나는 이런 글을 썼다. 태초에 말씀이 있으셨다. 그 말씀은 빛과 어둠을 가르시고, 이어 닷새 동안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만드셨다. 첫 사람이 등장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창세를 시작한지 엿새째에, 말씀은 점토로 자신의 모습과 꼭 닮은 형상을 빚어 숨을 불어넣었다. 흙이 눈을 뜨자, 말씀은 그것을 가리켜 사람이라 부르시고는 선과 악을 구별 지을 수 있는 지혜를 얻지 말라 사람에게 신신당부하시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말씀을 배신했다. 분노한 말씀은 사람..

아고라의 쇠락, 민주주의 2.0의 개막 - 촛불의 행방은?

9월 18일 정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들여 준비했던 '민주주의 2.0'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노 전 대통령이 '노공이산'이란 필명으로 올린 환영사 겸 감사인사에서도 읽을 수 있듯, '민주주의 2.0'은 개방과 공유를 원칙으로 하는 웹 2.0 정신을 정치토론에도 적용시켜보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전 대통령의 이러한 행보는 수많은 이해당사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데일리 서프라이즈 정치부 차장의 말 마따나, 그동안의 전임 대통령들이 '청빈한 29만원',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등의 발언으로 도움은 커녕 물의만 일으켰던 것을 생각하면 민주주의의 핵심적 요소인 다양성을, 토론을 통해 제고해 보자는 그의 이번 행보는 새롭다. 이러한 '새로움'에 대해 그의 이해관계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5..